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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27화 (827/1,000)
  • 827화 사탄 (3)

    콰콰콰쾅! 쿠르르르륵!

    사탄이 만들어 내는 화마의 소용돌이가 필드 전체를 휩쓸어 간다.

    와류(渦流). 불의 와류.

    이 거대한 흐름은 휘말려드는 모든 것들을 죄다 태우고 쓸어버리며 엄청난 규모의 용오름을 만들어 냈다.

    내가 지금까지 본 공격 스킬 중 불사조의 ‘멸망주의보’, 슬라임 퀸의 ‘푸딩 범벅’ 다음으로 범위가 넓은 기술이었다.

    그리고 이내 이 불의 벽 안으로 사탄이 직접 쏘아 보내는 불기둥들이 날아온다.

    펑! 퍼퍼퍼펑! 퍼퍼펑!

    어떤 불기둥은 덩어리처럼 굵고 짧았지만 어떤 불기둥은 긴 뱀처럼 길었다.

    심지어 연사 속도가 악마적으로 빠른지라 이것들을 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때.

    [잘 들어라, 인간… 아니 주인님.]

    오즈가 말을 걸어왔다. 평소와 달리 ‘주인님’이라는 호칭까지 쓰면서 말이다.

    [지금부터 저놈을 죽일 수 있는 필살 솔루션을 제공해 주마.]

    오즈는 눈앞에 있는 사탄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래 전 용마전쟁에서 치명상을 교환한 숙적(宿敵)이자 천적(天敵)!

    나는 오즈가 일러 주는 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녀석의 공격 패턴은 복잡한 동시에 간단하지. 상대방이 피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불기둥들을 쏘아 보내는 것. 하지만 그것들만 잘 피해 낸다면 놈은 제풀에 힘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보다시피 힘 조절이라는 것을 모르는 멍청이거든.]

    오즈의 말대로 사탄은 아까부터 계속 앞뒤 안 가리고 강맹한 공격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쿠르르르륵!

    어마어마하게 많은 불기둥들이 나를 향해 몰려든다.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가 휘말려들지 않게 저 옆으로 물러났고 이내 사탄의 공격을 혼자서 상대하게끔 되었다.

    1:1

    나를 따라온 사탄은 계속해서 불의 뱀들을 토해 놓는다.

    이제 맨땅보다 화마가 뒤덮은 땅이 훨씬 더 많아서 발을 디뎌 놓는 것도 어려운 형국.

    “빨리 그 솔루션이란 거나 내놔!”

    [성질 한번 급하군, 잘 들어라 주인님. 지금부터 내가 가리키는 곳의 땅만 따라 밟아라. 단 0.1초의 오차도 있으면 안 된다.]

    모든 땅이 쏘아져 오는 불기둥에 뒤덮여 있는 상황에서도 오즈는 귀신같이 디딜 만한 곳을 짚어 준다.

    이윽고, 사탄이 쏘아내는 불기둥 소나기 사이를 건너는 나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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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긴장감 있는 BGM이 추가되었다.

    니콜로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바이올린 연주 실력이 너무도 뛰어난 나머지 악마와 계약했다고 알려진 바이올리니스트.

    그의 ‘사탄 교향곡’이 전자 바이올린 버전으로 새롭게 리메이크되어 빠르게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 음악의 채보에 맞추어 사탄의 불기둥들이 뜨겁게 쇄도해 오고 있었다.

    나는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리듬 게임이잖아?”

    리듬(Rhythm) 게임이란 무엇이냐?

    일명 ‘사운드 시뮬레이션(Sound Simulation) 게임’, 플레이어가 리듬이나 사운드에 맞춰서 키나 패드를 조작하는 게임을 말한다.

    음악의 채보, 리듬, 박자에 맞추어 막대기나 화살표 모양의 표시들이 내려오면 그것이 판정선을 지나가는 타이밍에 딱 맞추어 사용자의 키나 패드를 눌러 점수를 획득하는 시스템.

    1983년 ‘멜로디 블래스터(Melody Blaster)’가 출시된 이래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DDR이나 펌프 등으로 유명해졌다.

    …쿠르르르륵!

    현재 사탄의 불기둥들은 마치 이 리듬게임의 스크롤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파기니니가 연주하는 악마적인 채보를 따라 쏟아지는 불의 심포니.

    나는 그것들을 피해 가뭄에 콩 나듯 생겨나는 맨땅을 디뎌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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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턴은 점점 더 악마적으로 어려워지고 있었다.

    “……살인적이네.”

    리듬 게임의 특성 상 음악을 미리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되기는 된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음악인 경우에는 변속 유무, 발의 배치 최적화, 낚시 노트 예상 같은 항목들이 더욱 더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었다.

    예전에 메두사를 상대할 때 비슷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극악 난이도이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절대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아라, 주인! 지금! 왼쪽! 다시 오른쪽! 깽깽이 발로 두 번 땅을 박찬 뒤 대각선으로 점프! 그대로 도도도도도도! 핫챠! 계속 직진! 후 레프트! 다시 라이트! 반박자 빠르게! 더 세게! 포르테! 메조포르테! 포! 르! 티! 시! 모!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채보의 불바다가 온다! 피아노! 메조 피아노! 피아니시모! 다시 쾅쾅! 차차챳!]

    내 옆에 수호령처럼 붙어 있는 오즈가 나의 양쪽 귀를 잡아당기며 방향을 지시해 준다.

    정확한 커맨드, 그리고 그 커맨드를 그대로 몸으로 재현해 낼 수 있는 피지컬.

    오즈와 나는 이 고인물스러운 리듬게임 플레이를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다.

    COMBO X 2

    COMBO X 3

    COMBO X 4

    COMBO X 5

    .

    .

    COMBO X 98

    COMBO X 99

    COMBO X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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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BO X 997

    COMBO X 998

    COMBO X 999

    .

    .

    P E R F E C T

    이쯤 되면 오즈를 펫으로 거둔 보람이 있다.

    “아이템 수거할 때만 쓸모 있는 줄 알았더니……”

    녀석을 펫으로 거둠으로써 얻은, 무엇보다 가장 큰 히든 특전은 바로 사탄 레이드 때 엄청난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뽀애앵!]

    늘 오즈를 때리기만 하던 쥬딜로페 역시 지금의 상황이 기특했는지 오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준다.

    나와 쥬딜로페의 인정을 받음으로서 기분이 좋아진 오즈, 녀석이 마지막으로 외쳤다.

    [사탄 놈은 아직 나와의 싸움에서 입은 데미지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니 방어력 자체는 그리 좋지 않아! 한- 방- 먹여 줘라 주인님아!]

    오케이. 커맨드 입력 완료다.

    나는 허공으로 펄쩍 뛰어 마지막 불기둥을 사타구니 사이로 흘려보낸 뒤 곧장 주먹을 들었다.

    불을 뚫는 쇠망치. 마몬의 건틀릿이 그동안 응축해 둔 힘을 폭발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번쩍!

    사탄이 갑자기 두 눈에서 기이한 빛을 뿜어낸다.

    내가 놈이 공격 패턴을 바꾸었음을 직감하는 순간, 내 귓가에 알림음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WARNING!]

    [WARNING!]

    [WARNING!]

    [WARNING!]

    [보스 몬스터 ‘사탄’이 최후의 공격 패턴을 준비합니다]

    .

    .

    동시에, 시간이 정지했다.

    또렷한 정신. 느리게 흘러가는 주변 풍경.

    “어엇?”

    “……뭐지?”

    저 멀리서 원딜을 넣고 있던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도 갑자기 딱 멈춰 버린 몸에 당황한다.

    나와 사탄 역시도 허공에 멈춘 채 체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띠링!

    우리 모두의 눈앞에 상태창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동영상 몇 개가 자동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엄마…… 배고파……]

    [자식들하고 헤어진 지 아주 오래되었다우……]

    [공부를 하고 싶은데 학비가 없어요……]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건강했으면 좋겠어……]

    눈앞에 수많은 스크린들이 재생하고 있는 다양한 동영상들.

    그 영상 하나하나에는 힘든 처지에 있는 가지각색 사연의 사람들이 담겨 있다.

    인종, 국적, 나이를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하나같이 소외되고 힘든 처지에 놓인 이들.

    갑자기 뜬금없이 왜 이런 영상이 뜨나 싶어 고개를 갸웃하는 찰나.

    -띠링!

    또 다른 알림음이 들려온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즐겨 주시는 모험가 분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본 AI(사탄)은 세계관을 17등분하여 관리하는 서브스트림 중 하나입니다]

    [이 서브스트림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관리하는 뎀 유니버스 사에 속해있는 한 부서의 시스템과도 연동되어 있습니다]

    [해당 부서는 사회 취약계층, 소외계층을 지원하는 ‘사회적 책임 경영’ 부서로 게임 출시일 이래 지금껏 사익의 일정 비율을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해당 서브스트림에 손상이 갈 경우 뎀 유니버스 사에서 각종 비정구기구, 시민단체를 통해 지원하는 후원금 정산에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서브스트림의 예상 손상 정도와 그로 인한 후원금 지급 정지액을 추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데미지 = 1 센트]

    .

    .

    윤솔과 드레이크는 알림음을 듣고는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으음. 그러니까, 사탄에게 데미지를 1 입힐 때마다 뎀 유니버스 사가 기부하는 금액에서 1 센트씩 줄어든다는 건가?”

    1¢라면 얼추 10원 정도.

    사탄의 HP가 십 수억에 육박할 정도이니 사탄을 죽이는 것은 뎀 사가 매년 내는 기부금에서 백 수십억이 증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힘든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후원하는 복지재단.

    사탄은 지금 그곳으로 흐르는 자금줄을 잡고 플레이어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윤솔과 드레이크는 이 교활하고도 황당한 시스템 구조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공격을 하라는 거야!”

    “……역시 사탄인가. 그야말로 압도적인 사악함!”

    하지만. 내 친구들은 뒤이어진 광경을 보고 더욱 더 심하게 놀라야만 했다.

    …뻐억!

    둔탁한 굉음.

    불길을 찢고 날아든 주먹이 사탄의 안면 정중앙을 냅다 후려갈겨 버린다.

    켁 소리를 내며 이빨을 내뱉는 사탄.

    터져 나오는 데미지. 폭발적으로 치솟는 딜 미터기!

    동시에 윤솔과 드레이크의 두 눈이 띠용- 하고 튀어 나온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서 뭐.”

    뒤로 나가떨어지는 사탄의 앞으로 내가 한 발자국을 크게 내딛는다.

    나는 또다시 주먹을 들어 사탄의 죽탱이를 후려갈겼다.

    …콰쾅!

    이번에도 역시 끔찍한 굉음, 제대로 먹힌 강타 데미지에 사탄이 무릎을 꿇었다.

    …….

    침묵.

    윤솔도, 드레이크도, 쥬딜로페도, 오즈도, 심지어 사탄 본인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척!

    내가 가슴에 손을 얹고 물었다.

    “자, 이제 누가 사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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