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818화 (818/1,000)
  • 818화 거마전쟁(巨魔戰爭) (5)

    [드르렁! 크으음, 음. 5년, 아니 60개월만……]

    되도 않는 잠꼬대를 하며 뒤척이는 이스비브놉.

    그런 이스비브놉의 옆구리 쪽으로 걸어 나가는 윤솔의 표정이 사뭇 비장하다.

    원래 윤솔이 가지고 있던 공격력은 악귀 세트에 힘입어 13,344.

    브라키오의 목뼈로 만든 목걸이 덕분에 5,000이 추가되어 18,334.

    식물 속성이 아닌 적에게 2배의 추가 피해를 주는 채식주의자 특성으로 인해 36,668.

    ‘만근추’ 특성에 의해 73,336로 상승.

    ‘압궤’ 특성에 의해 146,672로 상승.

    ‘팔씨름’ 특성에 의해 293,344로 상승.

    ‘신성모독자’ 특성에 의해 50,000의 공격력이 추가되어 343,344.

    ‘고대 신앙’ 특성에 의해 약 5만의 공격력이 추가되어 약 400,000.

    과거 러시아전에서 아시아 통합 랭킹 1위인 오우거 모드 트로츠키를 원자 단위로 분해해 버렸던 결정력.

    마동왕의 힘으로도 내기 힘든 힘이 윤솔의 주먹에 실린 채 정면을 향해 쏘아져 나간다.

    윤솔의 진심 펀치! 그 결과는……!

    [드르… 럵!?]

    천하의 거인대왕 이스비브놉조차도 윤솔의 주먹을 맞고 태연할 수는 없었다.

    기침을 하며 끙끙거리는 이스비브놉을 향해 윤솔이 왼손 주먹도 들어 올렸다.

    높이 든 양손, 단단히 바닥에 고정한 허벅지는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 봐 왔던 자세다.

    ‘아빠 오늘 놀이동산 가기로 했잖아’ 파운딩 자세!

    윤솔은 잠시 이스비브놉의 등에 귀를 대더니 악마처럼 웃었다.

    “어어? 잘 안 일어나네? 에잇! 한 번 더!”

    [일어났어! 일어났다구 이 작은 친구들아!]

    부스스한 기색으로 황급히 상체를 일으키는 이스비브놉이었다.

    [흐아아아암-]

    이스비브놉는 일어나자마자 기지개를 켜며 크게 하품을 했다.

    그의 동굴처럼 커다란 입에서 뜨거운 김과 함께 오래 묵은 악취가 뿜어져 나온다.

    이윽고, 이스비브놉은 고개를 돌리더니 윤솔을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오랜만에 엄마의 등짝 스매시가 생각나더군. 허허허- 인간에게서 손맛을 느낄 수 있을 줄이야. 잡아먹을 때를 제외하면은 느껴 보지 못했던 맛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무서운 말을 하는 이스비브놉이었다.

    쿠궁-

    그는 단순히 상체를 일으켰을 뿐이지만 우리에게는 눈앞에 거대한 산이 놓인 느낌.

    이스비브놉은 아직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실로 오랜만에 자는 잠이었어. 아주 개운하군. 꿈도 좋은 것을 꾸었지 뭐야.]

    그리고는 우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주 오래 전의 추억이 꿈에 떠올랐지. 무엇인지 한번 들어볼 텐가?]

    눈앞에 선택지가 떴다.

    YES or NO

    불사조의 ‘선택’ 특성이 아니더라도 답을 알 수 있는 쉬운 문제다.

    내가 ‘YES’를 누르자, 이내 눈앞으로 이스비브놉의 기억이 동영상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의 기억이었다.

    *       *       *

    [……고, 골리앗. 괜찮을까?]

    소년 이스비브놉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그러자 앞서 가던 골리앗이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어차피 여기 있다가는 죽어. 이판사판이지!]

    이스비브놉과 골리앗은 지금 지하감옥의 좁은 복도를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한창 혈기왕성하던 시절, 둘이서 모험을 떠나자며 무작정 출발한 항해.

    하지만 바람을 잘못 타는 바람에 악마들이 지배하는 무서운 땅으로 표류했고 감옥에 갇혔다가 지금 야음을 틈타 몰래 탈옥 중인 것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끊임없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골리앗…나 속이 이상해…….]

    [창밖을 보니까 그렇지. 여기가 무슨 섬인지 몰라? 그냥 나만 잘 따라와!]

    골리앗의 다그침에 이스비브놉은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호수 위에 떠 있는 가랑잎이 이리저리 기울어지듯 묘하게 출렁이는 섬.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면 하늘멀미를 한다는 소문의 섬.

    [자꾸 무슨 소리가 들려.]

    […그냥 악마들이 술 마시고 노는 소리야. 이스비브놉.]

    악마섬.

    동대륙 깊은 곳에 있는 악마들의 본거지.

    이곳에 갇힌 포로들은 절대로 살아나갈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때 모험을 떠나는 게 아니었어. 표류를 해도 하필이면 이런 무서운 곳으로…….]

    이스비브놉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책했다.

    그때.

    […잠깐!]

    골리앗이 이스비브놉의 어깨를 꾹 누르며 멈췄다.

    [왜? 무슨……]

    [쉿!]

    골리앗은 이스비브놉을 향해 검지를 세워 보였다.

    이윽고, 귀를 기울이자 벽 너머에서 악마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Confirma terminus transitus ad sinistram.]

    [Sinistram? Illud arguere.]

    이스비브놉은 불안한 듯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해서인지 이제는 악마들의 웃음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려온다.

    아직 몸도 마음도 어린 이스비브놉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상황.

    하지만 그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골리앗은 침착했다.

    [잘 들어 이스비브놉. 저놈들이 왼쪽 경계를 강화할 모양이야. 그러니 우리는 오른쪽 경계를 넘어가자.]

    [어엇? 골리앗, 악마어를 할 줄 아는 거야?]

    골리앗은 잠시 이스비브놉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이스비브놉의 두 눈은 빛나고 있었다.

    […….]

    무언가를 말하려던 골리앗은 침과 함께 꿀꺽 말을 삼켰다.

    그리곤 한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은. 그러니까 걱정 마.]

    골리앗은 눈치를 보며 앞으로 살금살금 기어갔다.

    다행히 감옥 입구를 지키고 있는 악마병은 눈이 하나밖에 없었고 그것이 정수리 위에 달려 있는지라 바닥에 납작 엎드리면 사각지대를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시투성이의 바닥을 엎드려 기며, 골리앗은 말했다.

    [잘 들어 이스비브놉. 이건 아마도 마지막 기회야. 경비병들의 말을 엿들어 보니 내일 이곳을 지배하는 고위악마가 방문하는가 봐. 그때부터는 탈옥이 아예 불가능해.]

    [……고위악마? 누구?]

    [아몬 후작. 아주 끔찍한 녀석이지. 그놈에게 잡히면 하늘에 있는 구름 감옥에 갇혀 영원히 나올 수 없다고 해. 그곳은 여기 악마섬보다도 훨씬 더 무시무시한 곳이야.]

    골리앗의 말을 들은 이스비브놉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골리앗은 씨익 웃으며 이스비브놉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걱정 마. 내가 널 지켜 줄 테니까.]

    [진짜?]

    [그럼. 너는 나중에 거인족의 왕이 될 녀석이잖아.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줄게.]

    하지만 이스비브놉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다.

    그러자 골리앗이 말했다.

    [만약 도망가다가 어느 한 쪽이라도 잡히면 그때는 죽음을 각오하고 같이 싸우자.]

    [응!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같을 거야!]

    비로소 이스비브놉의 얼굴이 조금 펴진다.

    서로 시선을 교환한 둘은 씩 웃어보이고는 계속해서 가시밭길을 기어나갔다.

    이윽고, 지하감옥이 있는 굴을 나온 그 둘은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 정글 끝까지 가면 배가 있으니 도망칠 수 있어!]

    골리앗이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스비브놉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바로 그 순간.

    [……!?]

    저 뒤의 덤불숲 너머가 시끄러워진다.

    아무래도 골리앗과 이스비브놉이 탈옥한 사실을 악마병들이 눈치 챈 모양이었다.

    [골리…….]

    [이 멍청이!]

    골리앗은 듣지도 않고 이스비브놉의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동시에,

    구웅-

    하는 기묘한 소리와 함께 붉은 빛이 그들 쪽으로 쏟아졌다.

    [……웁!]

    [소리 내지 마. 더 이상 소리 내면 들킬 거야!]

    감옥의 높은 탑에서 내리쬐는 붉은 빛은 한동안 숲 근처를 더듬더니,

    구우웅-

    하늘을 향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진 두 거인 모두 잘 아는 일이었다.

    악마성의 탐조등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갈 때는 거인이 꼭 하나씩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골리앗의 판단은 빨랐다.

    [안 되겠다! 달려! 이스비브놉! 더 빨리! 잡히면 죽는다!]

    [으윽!]

    골리앗과 이스비브놉은 사력을 다해 뛰었다.

    이윽고 저 멀리 절벽가가 보인다.

    그 아래 해안에는 분명 자신들이 타고 온 배가 그대로 숨겨져 있겠지.

    하지만 골리앗과 이스비브놉은 바다를 코앞에 두고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후후후후… 이게 다 뭔가?]

    둘의 눈앞으로 무언가 알 수 없는 거대한 것이 나타난 것이다.

    먹구름과도 같은 검은 기류에 휘감겨 있는 이 불길한 존재는 웃음기 진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유창한 거인어로!

    [반가워 친구들. 나는 아몬이라고 해. 이곳 악마의 섬에는 무슨 일로 왔지?]

    아몬 후작(Marquis Amon)!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골리앗과 이스비브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부, 분명 내일 온다고 들었는데…….]

    골리앗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아몬 후작은 그저 진득한 웃음으로 골리앗과 이스비브놉을 내려다볼 뿐이다.

    [으… 으아, 으아아아아……]

    이스비브놉은 아몬 후작이 내뿜는 무시무시한 마기에 짓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오줌을 지려 축축해진 다리를 달달 떨기만 할 뿐.

    바로 그때.

    아몬 후작이 낄낄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을 잡을 생각은 없어. 도망치려면 내가 변덕을 부리고 있는 지금이 유일한 기회일 것이다.]

    그 말에 골리앗과 이스비브놉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몬 후작은 선심이나 쓰듯 말을 계속했다.

    [나는 원래 내일 새벽에나 이곳에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조금 일찍 왔거든. 너희들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바로 그때.

    [……!]

    저 뒤편이 소란스럽다.

    악마 추격병들이 몰려오고 있는 소리였다.

    다급해진 표정의 골리앗과 이스비브놉에게 아몬 후작은 계속해서 말을 건다.

    [단. 너희는 같은 방향으로 도망칠 수 없어. 나를 기점으로 왼쪽, 오른쪽을 선택해라.]

    그 말에 골리앗과 이스비브놉의 시선이 한데 마주쳤다.

    [……이스비브놉.]

    [……골리앗.]

    그 둘은 서로를 눈동자에 담은 상태로 서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이내 무언의 신호가 오갔다.

    [해안 절벽에서 만나자!]

    동시에. 골리앗은 왼쪽으로, 이스비브놉은 오른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몬 후작은 그저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중앙에 멀거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스비브놉은 정신없이 달렸다.

    가시와 바위조각들이 살을 마구 할퀴었지만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잡히면 무조건 죽는다. 아니,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욱 더 끔찍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온몸에 긁힌 자국이 남는다.

    폐와 근육이 터질 것 같았고 전신의 모든 뼈가 부러질 듯 욱신거렸다.

    절로 뜨거운 눈물이 솟아나온다.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

    극한까지 몰렸을 때 드는 원초적인 생각이 이스비브놉의 몸을 한계 너머까지 밀어주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저 멀리.

    아주 멀리 떨어진 곳.

    그러니까 건너편 숲길에서 작게 들려오는 외침이 있었다.

    [Hic. sordidum diaboli! Quia adversarius vester sit a me!]

    점점 멀어지는 목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악마어.

    왼쪽으로 도망친 골리앗이 지르는 것이 분명한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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