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7화 거마전쟁(巨魔戰爭) (4)
“……피곤해 보이는데 좀 쉬는 게 어때?”
내가 등장하자 이스비브놉은 한쪽 눈을 크게 떴다.
[……인간? 이 작고 나약한 종족이 아직도 멸종하지 않았나?]
전쟁만 하느라 세상 물정을 잘 모르나 보군. 인간들이 거인들보다 훨씬 개체수가 많은데.
하기야, 악마들의 입장에서 인간은 먹잇감, 거인은 적이니 당연히 따지고 보면 인간들의 개체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이스비브놉이 알 리 없는 일.
그는 약간이나마 불쾌감을 느낀 듯 표정을 찌푸렸다.
[거인국에 인간이 오다니. 실로 오랜만이로군. 어디 보자…… 예전에 내 친구 가족들의 유물을 도둑질하려 왔던 해적들 이후로는 처음인가.]
아,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알 것도 같군.
나는 퀘스트창을 열어 기록되어 있는 모험일지를 불러왔다.
과거 천공섬으로 가는 비행로에서 만났던 유령선.
다 썩어 가던 배 하나가 무려 500년 동안이나 하늘을 날고 있었던 것이 떠오른다.
<벨페골력 30...(찢어져 있음)...>
...(찢어져 있음)...은 우리 배를 단단히 붙잡은 채 들어 올렸고 그대로 하늘을 향해 내던져...(찢어져 있음)... 결국 우리는 실패하되 성공한 것이다. 보물은 손에 넣었지만...(찢어져 있음)...라는 끔찍한 저주에 걸려...(찢어져 있음)...게 되었으니까…
.
.
유령선에 타고 있었던 구울과 미이라, 그리고 보스 몬스터였던 ‘목마른 검은수염’이 적었던 항해일기였다.
‘아마 저 찢어진 부분에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이스비브놉이겠지?’
물론 나는 그 이후에 만났던 뇌옥의 죄수 골리앗의 퀘스트 역시도 기억하고 있었다.
-<뇌옥 죄수의 답장> / 재료 / D
-구름 거인 골리앗이 보낸 답신.
‘거인국의 마지막 왕이자 나의 절친한 벗 이스비브놉에게’ 라고 적혀 있다.
나를 거인국 바산으로 이끈 핵심적인 퀘스트가 아니던가.
내가 막 인벤토리에서 편지를 꺼내려는 순간.
[쉬다니! 그럴 수는 없지!]
이스비브놉은 손바닥을 들어 나를 밀어내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저 멀리 지평선 위로 몰려드는 악마병 군단을 바라본다.
[곧 다시 악마들이 올 게야. 쉴 시간이 없어!]
“음? 편지 한 장 정도는 읽을 시간 있잖아. 여기 너에게 온 거라고.”
[나한테 편지를 보낼 만한 녀석은 다 죽었어. 저기 악마들 손에 말이야! 읽어 봤자 마음만 약해질 뿐!]
이스비브놉의 반응은 꽤나 날카롭다.
하기야 저 많은 악마들과 그토록 오랜 시간을 싸워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저 악마들은 잠시 나한테 맡기고, 편지나 읽어.”
일단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이스비브놉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앞으로 튀어나갔다.
“어진아! 저 악마 웨이브를 우리가 막는 거야?”
“이스비브놉이 편지를 읽을 시간을 벌어 주는 건가? 그 정도야 버틸 수 있지!”
윤솔과 드레이크가 내 옆을 보좌한다.
…파팟!
윤솔의 신성불가침 보호막이 광역을 뒤덮었다.
100%의 확률로 들어가는 1차 상태이상 ‘마비’
100%의 확률로 들어가는 2차 상태이상 ‘공포’
50%의 확률로 들어가는 3차 상태이상 ‘환각’
24%의 확률로 들어가는 4차 상태이상 ‘실명’
12%의 확률로 들어가는 5차 상태이상 ‘과부하’
6%의 확률로 들어가는 6차 상태이상 ‘영구저하’
2%의 확률로 들어가는 7차 상태이상 ‘즉사’
일곱 가지의 상태이상이 수많은 악마들의 발목을 잡아챘다.
[끼에에에엑!]
[…그윽! 오오옥!?]
[쉬익! 쉬이잇!]
달려들던 악마들이 보호막에 닿는 즉시 그 기세 그대로 고꾸라진다.
앞 열이 무너지자 뒷 열 역시도 무너져 서로의 병기에 찔려 죽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눈이 멀거나 공포에 질려 허둥거리는 악마병들, 개중에는 목을 움켜쥔 채 즉사하는 녀석들도 상당했다.
“확실히, 솔의 스킬은 대규모 적을 상대하는 데 있어 효과적이지.”
드레이크는 부럽다는 듯 중얼거리며 두 대의 쇠뇌를 들어 올렸다.
…퍽! …퍼억! …빠각!
거구의 악마병들의 머리통에 화살이 박힌다.
헤드샷, 원샷원킬. 드레이크는 악마병 군단 곳곳의 지휘관급 고위악마들을 일점사로 잡아내고 있었다.
오-오오오오오오!
하지만 악마들의 파도는 끊이지 않는다.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몰려오는 악마병들은 이번에야말로 이스비브놉을 끝장내 버리겠다는 듯 필사적이었다.
그때쯤 해서.
…콱!
나는 대지 위에 창 하나를 박아 넣었다.
-<창해룡 버뮤다의 창 ‘노틸러스’> / 양손무기 / S+
ᄉᆡ미 기픈 므른 ᄀᆞᄆᆞ래 아니 그츨ᄊᆡ 내히 이러 바ᄅᆞ래 가ᄂᆞ니.
-공격력 +1
-특성 ‘물의 근원’ 사용 가능 (특수)
-파괴불가 (특수)
창해룡 버뮤다를 잡고 얻은 S+급 아이템.
이 기묘한 삼지창이 지면에 박힌 뒤부터 모래가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윤솔과 드레이크가 악마병 군단을 막아내고 있는 동안.
콸콸콸콸콸콸콸콸……
검은 모래들을 밀어내고 물줄기가 쏟아져 나온다.
금세 물바다가 된 사막, 한정된 범위에서나마 대홍수가 재현되고 있었다.
부글부글부글부글……
뜨거운 모래 위에 쏟아지는 물인지라 금방 끓어오른다.
자욱한 수증기, 펄펄 끓는 물.
그리고 마동왕 모드로 변한 나의 힘이 더해졌다.
-<크툴루 크라켄의 촉수> / 완갑 / S
대풍랑을 부르는 해신(海神)의 위엄. 그 자체.
-방어력 +1,700
-민첩 +2,000
-특성 ‘풍랑(風浪)’ 사용 가능 (특수)
-특성 ‘완충(緩衝)’ 사용 가능 (특수)
나는 크툴루 크라켄의 힘을 빌어 폭풍을 일으켰다.
더군다나 왼손에 깃들어 있는 데스웜의 힘은 펄펄 끓는 홍수에 거대한 와류를 만들어 낸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끓는 물의 폭풍!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거대 규모의 와류 곳곳에서 달아오르다 못해 폭발하는 증기 기둥이 펑펑 솟구쳐 오른다.
[기-에에에에엑!]
악마병의 파도는 내가 만들어 낸 쓰나미에 먹혀 버렸다.
해골만 남은 대망자가 펄펄 끓는 소용돌이에 몸의 균형을 잃고 나자빠지는 것이 보였다.
[뿌앵쓰!]
어깨 위에 쥬딜로페가 대망자가 침몰한 곳에 대고 깊은 숲의 아기양파를 송송 썰어 넣는다.
해골병들이 펄펄 끓는 물에 빠지자 이내 수류가 뿌옇게 물들었고 그 위에 파와 양파까지 송송 들어가자 이내 고소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어진아! 사골 곰국 냄새 나!”
“음, 포크 스튜 스멜. 돼지뼈 국물 육수가 제대로 우러났군. 역시 국밥의 나라 코리아.”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 뽀얗고 구수한 국물의 소용돌이를 보며 입맛을 다신다.
그렇게 악마병 웨이브가 지나가고 있었다.
* * *
악마들이 모조리 쓸려나가고 난 뒤.
붉은 사막 곳곳에는 뿌연 국물이 고인 웅덩이들만이 남았다.
뼈에서 우러난 육수에 고기조각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오즈는 양파와 고기, 뼈들이 둥둥 떠다니는 웅덩이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다가 호록 하고 한 모금 마신다.
[……악마적인 맛이로군!]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소감이었다.
뭐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악마병 웨이브를 막아 낸 것도 잠시, 조금만 있으면 곧 다음 차례 웨이브가 닥쳐 올 것이다.
그 안에 이스비브놉에게 퀘스트 클리어 판정을 받아내야 했다.
“……어디. 지금쯤이면 편지를 다 읽었겠지?”
나는 구수한 냄새가 퍼지는 대지를 지나 이스비브놉에게 되돌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퀘스트는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드르렁!]
이스비브놉이 대지에 누워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에서는 열기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콧물방울이 불어지고 있었다.
오즈가 낄낄 웃는다.
[수천 년 동안이나 악마와 싸운 놈이니 저럴 수밖에. 어서 깨우지 않는다면 다음 악마병 웨이브까지 독박 쓸 수 있다구!]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이스비브놉에게 다가갔다.
덩치가 워낙에 큰지라 귓가에 가서 외치는 것도 고역이었다.
밧줄처럼 억센 놈의 수염을 잡고 옆구리 쪽부터 등반한다.
이후 배를 지나 가슴, 쇄골을 거쳐 다시 놈의 목 부근에서 꺾어 휘돌아가는 수십 분여의 여정 끝에야 겨우 귀를 향해 소리칠 수 있었다.
“이봐, 이스비브놉! 일어나! 악마병 웨이브는 우리가 잠시 막았어!”
[……드르렁!]
“야! 거인! 일어나라고!”
[……드르렁!]
“인마! 내 말 안 들리냐!? 확 마!”
[……드르렁!]
“이병장님. 근무투입 시간입니다. 이벼자임 금투입샤임다.”
[……드, 드르렁!]
“아빠, 자? 그러면 나 이거 바둑 채널 말고 다른 거 볼게.”
[……드…아빠브르르르…안잔드르르렁…드르렁…!]
잠시 움찔하던 이스비브놉은 꿋꿋하게 다시 돌아누워 잔다.
드레이크가 이스비브놉의 눈에다 대고 황금광의 혈안으로 빛을 폭사시켜 눈뽕으로 깨우자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안타깝게도 아이템을 챙겨 오지 않은지라 그것은 기각되었다.
“안되겠군. 기껏 편지 읽을 시간을 줬더니 잠이나 쳐 자고 말이야.”
별 수 없지. 깨우려면 힘을 좀 쓰는 수밖에.
마몬의 힘까지 쓰는 것은 조금 그럴 것 같아 이번에는 데스웜의 힘만 쓰기로 했다.
나는 왼손 주먹을 꽉 말아 쥔 뒤 온 힘을 다해 놈의 허리 부근을 후려갈겼다.
…콰쾅!
그러자 이스비브놉의 몸이 약간 떨린다.
하지만.
[……푸하! 커- 드르렁~]
놈의 코끝에 맺힌 거대한 콧물방울은 아직도 터지지 않았다.
이스비브놉은 허리를 몇 번 긁적이더니 다시 잠을 이어 갔다.
세상에 충왕종 몬스터들 중 최강으로 손꼽히는 데스웜의 일격을 모기가 문 것 취급하다니.
“……이 자식. 강적이군.”
내가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
“비켜봐 어진아. 내가 해 볼게.”
윤솔이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