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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15화 (815/1,000)
  • 815화 거마전쟁(巨魔戰爭) (2)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는 법!]

    하늘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목소리.

    거인족의 왕 이스비브놉은 입에서 벼락을 토해 내며 일갈했다.

    그의 폐부 깊숙한 곳에서 폭발한 음파는 그 파동만으로도 정면에 있던 악마병들을 피떡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진 동료의 시체를 밟고 전진하는 악마병들의 수는 좀체 줄지 않고 있었다.

    …기긱 …기기기긱!

    인간형, 벌레형, 갑각형, 용각류형, 수인형, 조류형, 맹수형 등등…… 기괴한 외형의 악마들이 성터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흡사 콜로세움과도 같은 광경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 있는 관중들이 모두 적, 중앙에 홀로 서 있는 검투사 하나를 꺾기 위해 전원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이스비브놉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얼마든지 오너라! 내가 살아 있는 한 거인국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가 한번 주먹을 휘두르고 발을 구를 때마다 악마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간다.

    …쿵! …쿵! …쿵! …쿵!

    수많은 악마들이 이빨과 손톱, 칼과 창으로 찔러댔지만 이스비브놉의 강철 같은 근육을 뚫지 못했다.

    그것을 본 오즈가 침음성을 삼켰다.

    [……과연 거인류 역사상 최강의 전사로 꼽힐 만하군.]

    한때 고정 S+급 몬스터였던 오즈조차 강함을 인정했다.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도 상황을 그럭저럭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거인국의 모든 거인들이 죽고 나라가 함락 직전인 상황에서…… 저 거인이 혼자서 수천 년 동안 항전 중이라는 거죠?”

    “전략과 병법은 모르겠지만 단신의 무력 하나는 최강급인가 보군.”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산을 뽑아 바다에 던져 섬을 만들고 그 위를 지나는 태양에 갈고리와 사슬을 감아 낮을 붙잡아 놓을 정도라면 확실히 그 강함은 신화적인 영역일 것이다.

    비록 국가를 이루는 영토, 국민, 주권 중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거인국은 아직 멸망하지 않았고 거마전쟁 역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절대로 쓰러트릴 수 없는, 불가살의 육신을 가진 거인대왕 이스비브놉이 아직 살아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 버러지 자식들. 참으로 지긋지긋하게도 몰려오는구나. 안 되겠다!]

    이스비브놉은 지평선 너머로 끝없이 몰려오는 악마 대군을 향해 이를 뿌득 갈았다.

    그러더니.

    쿠-구구구구구구구……

    난데없이 옆으로 뛰어가 자기 키만 한 높이의 성벽에 달라붙었다.

    ‘뭘 하려는 거지?’

    내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눈을 가늘게 좁히는 순간.

    [……끄으으응!]

    이스비브놉은 하박을 성벽에 단단히 댄 채 허리를 일으켰다.

    선언한 그대로. 저 거대한 성벽을 뽑아 버릴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우지지지직-

    성벽은 이스비브놉을 덮칠 듯 흔들거린다.

    아무래도 거인이 쌓은 성채인 만큼 하늘 높이 뻗어 있는 성벽은 이스비브놉의 등조차 초라하게 느껴지게 만들 정도로 컸다.

    제아무리 거인대왕이라도 무리는 무리.

    “에이, 아무리 그래도 저건 아니지.”

    나는 실소를 머금었다.

    잡을 곳도 거의 없는 저 성벽을 힘으로 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부분을 어떤 각도로 쥐느냐, 어떤 자세에서 시작하느냐, 손의 마찰력은 어느 정도인가. 파워리프팅 경기를 보면 그러한 부분들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저 성채는 파괴불가 오브젝트로 지정되어 있는 맵의 일부, 아카식 레코드 관리자의 힘이 아니고서야 변경이 불가능할 터이다.

    하지만.

    [헛다리를 짚을 줄도 아는군, 인간.]

    오즈는 나를 비웃는다.

    그리고는 작은 날개를 파닥파닥 휘저어 내 뒤로 한참을 날아갔다.

    [……먼지바람이나 조심하라고.]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지지지지지직!

    높이 수십 미터, 길이 수백 미터, 무게 측정불가능.

    이 길고 거대한 규모의 성벽이 이스비브놉의 두 손에 의해 땅에서 뽑혀 나온 것이다!

    성벽 사이사이에 들어찼던 모래들이 비처럼 쏟아진다.

    전장은 성벽이 하늘 높이 들린 것만으로도 아수라장이 되었다.

    자욱한 먼지구름이 주변을 휩쓸었다.

    그러자 오즈가 나를 향해 이죽거린다.

    [……안 된다고?]

    “…….”

    [아까 저건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뭐가 아니라는 것이지? 으응?]

    “…….”

    근데 이 자식, 한번 맞췄다고 되게 깐족거리네.

    하지만 원래 틀린 사람은 잠자코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내가 입을 꾹 다물자 오즈는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나는 이스비브놉 저 녀석이 아직 약하고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 그래서 저 규격 외의 힘에 대해서도 잘 안다!]

    “그렇군…….”

    하기야 살아서 거인들의 신화에 등장할 정도이니 그 힘이 오죽하랴? 산도 뽑아 던지는데 성벽이라고 해서 뽑지 못할 것도 없다.

    오즈는 내가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즐거운 듯 계속해서 깐족거렸다.

    [하하하! 인간이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구만! 미개한 종족 같으니라구!]

    “…….”

    [평소의 여유 있던 모습은 어디 있나, 인간! 어? 하하하! 그동안 용족의 현명함을 무시하느라 아주 고생했다! 하지만 이걸 봐라! 나의 지혜는 세상을…….]

    “……ㅈ.”

    말을 끝까지 할 필요도 없었다.

    딱!

    내가 입을 떼기 무섭게 쥬딜로페의 나무 막대기가 오즈의 이마를 직격했다.

    (쥬딜로페도 내가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뽀엥!]

    쥬딜로페가 눈을 부릅뜨자 오즈가 이마에 난 혹을 감싸 쥔 채 바둥거리며 도망친다.

    ‘자식, 꼭 한 마디를 더 해서 맞네…….’

    그래도 오즈는 거인국을 여행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길잡이이다.

    오래 산 녀석이니만큼 이곳 지리나 생태에 대해서도 잘 아는 모양.

    한편.

    [우오오오-오오오오오!]

    거대한 성벽을 들어 올린 이스비브놉은 그것을 마치 양손대검처럼 휘둘러 버렸다.

    높고 긴 성벽의 위치가 바뀌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몰려들고 있던 악마병들이 가로로 휘둘러지는 성벽에 맞아 모래알갱이처럼 박살나 흩어진다.

    그토록 많던 악마들이 일거에 추수당하는 광경, 마치 빗자루에 의해 쓸려나가는 먼지들을 보는 듯했다.

    파스스스스……

    지면에 내리꽂힌 성벽 역시도 자리를 옮긴 채, 언제 움직였냐는 듯 대지 위에 우뚝 서 있다.

    그토록 살기등등하던 악마병들이 기세에 짓눌려 뒷걸음질 칠 정도로 이스비브놉의 박력은 엄청났다.

    반경 수백 미터의 둥근 원이 생겼고 그 안의 악마들은 죄다 쓸려나갔다.

    작은 키 덕분에 성벽에 강타당하지 않은 잔챙이 악마 몇 마리가 충격파에 휘말려 멀리 날아갔다가 다시 달려들었고 이스비브놉은 마치 빈대를 잡듯 그런 낙오병들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죽인다.

    영원히 끊길 것 같지 않던 악마의 파도가 잠시 멎었다.

    윤솔과 드레이크가 입을 딱 벌린다.

    “으아아. 저, 저 정도 힘이면 확실히…… 죽이긴 어려울지도.”

    “혼자서 수천 년 동안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가…… 설마 단순히 개인의 무력이 강해서였다니.”

    악마들의 고충이 이해될 것도 같다.

    국경선을 넘어 나라 전체를 초토화시키고 모든 백성들을 다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왕 하나를 못 죽여서 전쟁을 끝낼 수 없다니.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쩌겠어. 진짜 규격 외적으로 강한 놈 하나가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계속 싸우면서 버티면.”

    만약 이스비브놉이 NPC로 분류되지 않고 몬스터로 분류되었다면?

    아마 그때는 모든 몬스터들의 서열이 출렁거릴 것이다.

    ‘……그나저나, 거인왕이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게이머로서의 순수한 호기심이 고개를 든다.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도 같은 심경인지 저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이스비브놉의 거대한 육체를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쥬딜로페를 업고 있던 오즈가 전에 없던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 놈들도 강수를 두는군.]

    나는 오즈의 시선이 가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보인다.

    저 멀리 피에 젖은 모래톱 너머로 수없이 많은 악마병들이 보인다.

    놈들은 하나같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끙끙거리며 손에 쥔 쇠사슬과 밧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쉬익-

    모래톱 위로 무겁게 깔리는 독안개에 몇몇 악마병들이 거품을 물고 나자빠졌다.

    그러면 뒤에 있던 악마병들이 동료의 시체를 밟고 지나가며 손에 쥔 사슬과 밧줄을 계속 힘주어 끌어당긴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온몸이 녹아내린다.

    사슬과 밧줄에는 그렇게 몸뚱이를 잃어버린 손과 손목들만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웨에에엑-!

    이번에는 덩치 큰 악마병들이 등으로 독안개를 막고 작은 악마병들이 그 틈에 밧줄을 힘껏 당긴다.

    다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갑자기 다들 웬 줄다리기지?”

    “뭘 끌어오고 있는 것 같은데.”

    윤솔과 드레이크는 의아한 표정으로 모래톱 저편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수의 악마들이 낑낑거리며 잡아당기고 있는 밧줄과 쇠사슬.

    그리고 이내 그것들의 끝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본인이 뿜어낸 것이 틀림없을 독안개를 날카로운 이빨로 부욱 찢으며 대가리를 내보였다.

    …오오오오오!

    “저, 저건!?”

    윤솔과 드레이크가 경악한다.

    심지어 나조차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정도.

    오-오오오오오!

    악마병들이 수없이 죽어나가는 동료들의 시체를 밟아 가면서까지 이곳까지 끌고 온 괴물.

    그것은 목과 몸통, 꼬리를 구속하고 있는 수갑과 사슬, 밧줄들을 떨쳐내며 사납게 포효한다.

    거대한 몸뚱이를 빈틈없이 휘감고 있는 칠흑의 비늘.

    신화에나 등장할 법한 굵은 몸뚱이.

    머리만으로도 시야가 꽉 차며 꼬리는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긴 몸.

    시뻘건 아가리 속, 군단의 창검과도 같은 이빨.

    전신에서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독기.

    그것은 아홉 개나 되는 머리를 모조리 드러내고 있는 거대한 뱀.

    <히드라 ‘성체(成體)’> -등급: S / 특성: 무한성장, 백전노장, 과식, 맹독, 고속재생, 마법 면역, 살금살금, 압궤, 만근추, 구두룡(九頭龍)

    -서식지: 거인국, 용자의 무덤 107층

    -길이: ?

    -‘아홉 개의 머리’를 가졌다는 신화 속의 뱀.

    성장폭이 무한대에 가깝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다.

    ……바로 야생의 ‘히드라 빅헤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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