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4화 거마전쟁(巨魔戰爭) (1)
-띠링!
<히든 던전 ‘거인국(巨人國)’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영구히 기록됩니다>
<최초 방문자: 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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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멸망했다고 알려진 고대 문명.
한때 지배종으로 군림했었던 거인족의 나라 ‘바산(Bashan)’.
악마의 침공으로 인해 완전히 몰락해 끝내 전설의 뒷페이지에 파묻혀 버린 이 망국의 영토로 나는 첫 발을 디뎌 놓았다.
“삭막하구만.”
나를 뒤따라 이세계로 넘어온 드레이크의 짤막한 소감이었다.
설정 상 거인국은 본토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섬.
고대에 존재했던 거인들의 왕이 본토 동대륙에 있는 산을 바다로 집어던져 만들어졌다고 하는 거대한 오픈필드형 던전이다.
그래서일까, 거인국의 풍경은 전체적으로 동대륙의 사막과도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무도 풀도 없는 맨땅에 온통 붉으죽죽한 모래와 불타고 남은 잿가루, 뼈다귀 조각들만 널려 있을 뿐이라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지글지글지글……
작렬하는 태양은 저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언제나 낮이지.]
내 어깨 위에 있던 오즈가 불쾌하다는 듯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먼 옛날 이곳의 왕이었던 녀석이 해에 갈고리를 걸어 사슬에 묶어 두었거든. 그래서 이곳은 밤이 오지 않는다.]
꽤나 특이한 설정이다.
“와아- 거인의 왕은 참 대단한 존재인가 보네요. 산을 뽑아 던져서 섬을 만들고, 태양을 쇠사슬로 묶어서 잡아두고.”
쥬딜로페를 안은 채 포탈을 넘어온 윤솔은 하늘에서 지글지글 끓는 태양을 보며 감탄했다.
한편 드레이크는 지형을 대략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토질은 동대륙의 사막지대와 대략적으로 흡사한 느낌이군. 하지만 도처에 널려 있는 이 뼈다귀들은 뭐지? 이건 마치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에 쌓여 있던 것들과 비슷한걸.”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 오래 전 있었던 거인과 악마의 전쟁에 의한 잔해물이겠지.”
거마전쟁(巨魔戰爭). 기나긴 시간 동안 이루어진 두 지배종 간의 전쟁은 악마족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모든 거인들은 죽었고 행여나 살아남았다고 해도 악마의 기운에 의해 오염되어 덜떨어진 지능과 열화한 덩치를 가지고 있는 몬스터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이 땅에 널려 있는 뼈다귀들은 대부분 오래 전 전사했던 거인병이나 악마병들이 남긴 흔적들이리라.
“그럼 저 산맥도?”
윤솔이 검붉은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경악했다.
저 멀리 붉은 대지 위에 우뚝 솟아있는 허연 산맥.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뼈다귀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뼈로 만들어진 산과 산줄기, 구릉과 협곡, 전부 뼈다!
그것들은 붉은 흙에 버무려져 이 맵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었다.
“……이건 악마들의 것이군.”
드레이크가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해골을 집어 들며 말했다.
해골의 이마에는 두 개의 커다란 뿔이 달렸다.
거인의 뼈만큼이나 악마들의 뼈도 많았다.
발록부터 데모고르곤, 고위 악마들의 것으로 보이는 해골들이 무수히 쌓여 있었다.
오즈가 코웃음을 쳤다.
[거인과 악마들의 뼈가 한데 섞여 있을 것이다. 오랜 전쟁의 상흔이지. 그나저나 아직 이곳에 뼈를 묻지 못한 녀석들도 꽤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오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왈그락!
저편의 뼈 무더기가 들썩거렸다.
퍼펑!
뼛조각들이 수북하게 쌓인 곳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허연 분골을 날리며 몸을 일으킨 것.
그것은 붉은 몸에 커다란 뿔을 가진 괴물이었다.
머리에는 자기 머리통보다 더 큰 남의 두개골을 마치 투구처럼 뒤집어썼다.
<악마병 낙오자> -등급: A / 특성: 어둠, 하수인, 백전노장, 뺑소니
-서식지: 거인국 전역
-크기: 3m
-까마득히 오래 전 거인국을 침공했다가 모종의 사유로 낙오된 악마이다.
오랜 시간 이곳에 갇혀 지냈기에 대부분 미쳐 있다.
몸에는 불이 붙어 있었고 손에는 커다란 뼈다귀를 갈아 만든 칼을 들었다.
[히헤-헤헤헤헤헤!]
침을 질질 흘리며 웃어대는 그 모습은 광전사 그 자체.
나는 바로 전투 태세를 취했다.
“필드 배회형 잡몹치고는 위험등급이 높네. 모두 사주경계!”
하지만. 나보다 더 빨리 경계태세로 접어든 존재가 있었다.
[쉬이이이익!]
주변 배경색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었기에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몬스터.
온몸의 뼈다귀 비늘들을 빳빳하게 곤두세운 뱀 한 마리가 악마 낙오병을 향해 독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뼈비늘 뱀> -등급: A / 특성: 어둠, 야수, 싸움광, 맹독
-서식지: 거인국 전역
-크기: 8m
-뼈가 몸 내부가 아닌 외부로 돌출되어 있는 뱀.
굵은 몸통으로 조여 오는 뼈바늘 가시에 찔리면 압사 이전에 과다출혈로 죽게 된다.
악마와 뱀이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뱀은 악마를 휘감아 조였고 악마는 이빨과 손톱, 무기를 이용해 뱀을 난자한다.
필드 몬스터들 간에 벌어진 이 난데없는 싸움은 점점 규모가 커져 주변에 있던 다른 몬스터들까지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어그로에 이끌린 악마와 뱀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악마병 낙오자 정예> -등급: A+ / 특성: 어둠, 하수인, 백전노장, 혈액포식자, 뺑소니.
-서식지: 거인국 전역
-크기: 10m
-까마득히 오래 전 거인국을 침공했다가 모종의 사유로 낙오된 악마이다.
오랜 시간 이곳에 갇혀 지냈지만 아직 흐릿하게나마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
<기저의 뱀 ‘파이썬’> -등급: A+ / 특성: 야수, 어둠, 하수인, 백전노장, 과식, 독 면역, 마법 면역.
-서식지: 거인국.
-크기: 42m
-무저갱 밑바닥을 기어 다니며 사는 거구의 뱀.
배가 고프면 지상으로 올라와 마을을 습격해 수많은 사람들을 집어삼킨 뒤 다시 심연 밑바닥으로 기어들어간다.
점점 더 크고 강한 악마와 뱀들이 몰려든다.
종국에는.
<악마족 대망자> -등급: A+ / 특성: 악마, 어둠, 언데드, 하수인, 자연재해
-서식지: 칼바람 싸움터 좌파 진영, 거인국
-크기: 50m
-살아생전에는 위대한 마족 전사였다.
단신으로 천족의 5개 군단을 격파한 사건은 아직도 만마전의 벽화에 기록되어 있다.
<히드라 ‘유생체(幼生體)’> -등급: A / 특성: 무한성장, 백전노장, 과식, 맹독, 고속재생, 마법 면역
-서식지: 거인국, 똬리를 튼 사념(巳念)
-길이: 32m
-‘아홉 개의 머리’를 가졌다는 신화 속의 뱀.
성장폭이 무한대에 가깝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다.
꽤나 익숙한 얼굴들까지 보이고 있었다.
“휘말리면 골치 아플 것 같으니 빨리 뜨자.”
나는 어그로가 튀기 전에 잽싸게 자리를 떴다.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 황급히 나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요르문간드에 쌍뿔칠흑까지…… 여기는 정말 뱀 몬스터가 많구나.”
“거인형이나 악마형 몬스터가 있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뱀은 왜지?”
가뜩이나 뼈와 흙밖에 없는 필드에 몬스터가 이렇게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니 다소 의외였다.
게다가 돌아다니는 필드 잡몹들의 위험등급이 최소 A에서 A+까지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맵의 난이도가 극악이긴 극악인 모양.
“이곳에서는 소모품을 벌충할 수도 없어 보이니 최대한 쓸데없는 싸움은 피하자고.”
나는 윤솔과 드레이크에게 주의를 주었다.
우리는 대규모 원정대가 아니기 때문에 항상 최고의 효율을 추구해야 한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윤솔과 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여 내 말에 동의를 표했다.
바로 그때.
[……인간, 하늘을!]
어깨에 있던 오즈가 내 뺨을 툭툭 치며 외친다.
나는 뭔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이내 하늘 위를 가로지르는 불의 궤적이 보인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크고 화려한 마차 한 대가 하늘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시커먼 무언가가 끌고 가는 마차는 하늘을 훨훨 날아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필드를 향한다.
오즈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아몬 후작(Marquis Amon). 여태 이곳에 머물고 있었는가.]
아몬 후작이라 하면 악마들 사이에서도 특히나 서열이 높고 잔혹하기로 소문난 초고위 악마.
그 힘은 발록이나 데모고르곤 등의 고위악마를 아득히 능가할 정도라고.
[저놈은 일정 시간 간격으로 자기 영역을 순찰하는 습관이 있지.]
오즈는 하늘 저편으로 멀어지는 불의 궤적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역시 저 멀리 검붉은 점으로 변해 사라지는 마차를 빤히 바라보았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네. 만날 확률이 1%도 안 되는 네임드 몬스터인데.”
비록 멀리 떨어진 채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싸우진 않았지만 말이다.
예전에 저놈을 용자의 무덤에서 한번 맞닥트렸던 것이 떠올라 잠시 한숨이 나왔다.
“……포션을 아끼게 되어 다행이다.”
부디 세 번 만나게 되는 일은 없기를.
* * *
-띠링!
<‘뼈대만 남은 수도’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영구히 기록됩니다>
<최초 방문자: 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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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뿌려진 듯 온통 시뻘건 모래톱.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뼈가 쌓여 벽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긴 성벽처럼 수북하게 쌓여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악마들의 뼈로 이루어져 있었다.
뼛조각 때문에 뾰족뾰족한 성채 표면에는 미처 썩지 못한 붉은 살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악취를 풍긴다.
까 악
악 까
까 까 악
악 악 악 까
까 까 까 악
악 까... 악 까
까 악 까 악
악 까 악 까
까 악
악 까
눈알 하나 달린 까마귀들이 하늘에 불길한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다.
드레이크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쟁의 끝은 언제나 참혹하지.”
“정말 그러네요. 황폐하기도 해라.”
윤솔 역시도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끝이라고?]
오즈는 피식 웃을 뿐이다.
[거마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번 대사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다.
드레이크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거인과 악마의 전쟁은 악마의 승리로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큭큭큭, 인간들은 늘 제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직접 보지도 않고 말이야.]
오즈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쿵!
이변이 일어났다.
멀리서 요란한 굉음, 몸을 휘청거리게 만들 정도의 지진.
…쿵!
그것은 뼈의 성채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쿵! …쿵! …쿵!
나는 지진의 빈도와 규모가 심상치 않음을 판단했다.
재빨리 달려가 뼈의 성채를 오르자 이내 지진의 근원지가 밝혀진다.
폐허 너머.
언뜻 보기에도 수백 마리가 넘어 보이는 악마들이 뿔과 이빨, 손톱, 칼과 창을 앞세우고 돌진하고 있었다.
거마전쟁의 참전용사들. 수없이 오랜 시간을 싸움만 해 온 베테랑 악마병들이다.
그리고 그런 악마병들을 마치 개미떼처럼 짓밟는 존재가 있었다.
물소 뿔이 달린 거대한 투구 아래 늘어진 긴 수염.
굵은 뼈와 질긴 근육으로 꽉 들어찬 통짜 몸에 돌기둥 같은 다리, 그리고 다리보다도 더 두껍고 긴 두 팔.
사모아인, 마오리인, 슬라브인 등의 인종적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는 거인족 특유의 외형.
하지만 일반적인 거인보다 족히 10배는 더 큰 키.
…쿵! 콰콰콰쾅!
그가 주먹을 들어 악마병들을 우르르 쓸어버릴 때마다 대지에는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산의 왕 이스비브놉’
동대륙의 산을 뽑아 던져 바다에 섬을 만들고 그 위를 지나는 태양에 쇠사슬을 감아 당겨 영원한 낮을 드리웠다는 존재.
그리고 자그마치 3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홀로 악마족의 침공을 막아 내고 있는.
말 그대로 최후이자 최강의 거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