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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13화 (813/1,000)
  • 813화 선악과(善惡果) (4)

    나는 기억 속 그의 모습을 상기했다.

    시뻘건 불빛이 새어나오는 두 눈, 기괴하게 웃는 입가의 미소.

    까끌까끌하게 깎여나간 호박머리에 검은 넝마를 뒤집어쓰고 있던 장신의 남자.

    <‘좀도둑’ 잭 오 랜턴> -등급: A+ / 특성: 어둠, 백전노장, 할로윈, 선악과(善惡果)

    이 껑충 키 큰 허수아비는 손에 거대한 대낫을 든 채로 이곳 죽음길 나락에서 최후를 맞이했었다.

    그 상대는 바로 분노한 오즈!

    그리고 그 ‘분노’는 잭 오 랜턴을 진화시킬 수 있는 열쇠가 되었었다.

    <‘선악과 앞에 선 자’ 잭 오 랜턴> -등급: S / 특성: 어둠, 백전노장, 할로윈, 선악과(善惡果)

    상위종으로 진화하며 위험등급이 한 단계 오른 잭 오 랜턴. 그에게서 주목해 볼 특성은 다음과 같다.

    ‘선악과(善惡果)’

    밴시 퀸이 만들어 낸 평범한 잭 오 랜턴들에게는 없던 특성으로 용사 도로시를 따르는 잭 오 랜턴만이 보유하고 있던 이상한 특성.

    ‘내가 알기로 이 특성을 보유하고 있는 존재는 뎀 세계관 안에 딱 넷뿐이지.’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마주칠 수 있는 첫 번째가 바로 이 잭 오 랜턴이다.

    그 다음은 바로 천공섬의 식인황제 보카사 바리새인.

    그리고 다른 둘은 누구일지 얼추 짐작이 간다.

    [……재수 없는 것들.]

    선악과 특성을 보유한 존재들에 대한 오즈의 평가는 짤막했다.

    [그놈들은 이간질을 통해 상대방을 분노하게 만들지. 일단 한번 휘말려들어 분노하게 되면 그 뒤에는 방법이 없다. 그저 부글부글 끓고 타는 속을 꾹꾹 눌러 참는 수밖에는.]

    이간질이라?

    내가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자 오즈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인간의 마을과 숲, 수인들의 성채를 습격해 몰살시킨 이유를 아는가?]

    “마몬과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수탈하기 위해서겠지.”

    오즈는 설정 상 아주 오래 전에 도로시가 살던 인간의 마을, 양철 나무꾼이 지키던 숲, 겁쟁이 사자가 다스리던 수인족의 마을을 멸망시킨 전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오즈의 입에서는 그 사건에 대한 비화가 흘러나온다.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원래 그 모든 것들은 나의 영역 안에 있었던 것인지라 굳이 수탈할 필요도 없었지. 다만 나는 거짓 정보에 속아 그들을 내쳤던 것이야. 반란, 내지 역적 모의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거든.]

    “누가 그런 제보를 했는데?”

    [누구겠나. 이간질과 분노의 악마이지.]

    결국 도로시 원정대를 만들어 낸 원흉(元兇)은 오즈가 아니라 다른 존재였다.

    에덴에 살던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권한 불경한 짐승. 이간질에 도가 튼 괴물.

    ‘사탄(Satan)’

    나는 지금 그놈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윽고.

    죽음길 나락 몰이해지대 깊은 곳으로 접근하자 낯익은 장소가 보인다.

    푹 패여 있는 구덩이, 아직도 피어오르고 있는 포연.

    잭 오 랜턴이 용맹하게 싸우다 죽은 곳이었다.

    “어진아, 여기는 예전에 불카노스 대낫이 떨어져 있던 자리 아니야?”

    “아, 현재 세희가 쓰는 그것 말이로군. 흐음. 뭔가가 더 남아 있나?”

    윤솔과 드레이크는 잭 오 랜턴의 사망장소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이내,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 그들은 무언가를 목격했다.

    “……!”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역시 있군.”

    나는 손으로 턱을 쓸었다.

    회귀 전 한 파이오니아의 증언대로였다.

    ‘잭 오 랜턴이 사망한 곳에서 이변이 일어난다.’

    그 말 그대로, 잭 오 랜턴의 대낫이 꽂혀 있던 균열에서는 기이한 빛무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검붉은 색.

    대기보다 무거운지 포연과 함께 피어오르지 못하고 구덩이 바닥에 고여 흐르기만 할 뿐인 아득한 증오.

    나는 그것을 보며 오즈에게 물었다.

    “이봐, 오즈.”

    [무엇이냐.]

    “예전에 네가 도로시 원정대와 싸울 때 말이야.”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

    “첫 번째. 그때 잭 오 랜턴만 살아남았다고 했었지?”

    [그러하다.]

    나는 퀘스트 내용을 복기했다.

    오즈와 싸웠던 양철 나뭇꾼과 겁쟁이 사자, 허수아비. 그리고 도로시.

    이 어마어마한 대격전에서 살아남은 이는 오로지 잭 오 랜턴 하나뿐이었다.

    이후 정신을 잃은 채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잭 오 랜턴은 던전 ‘악의 고성’의 지하에 갇히게 되고 이후 퀘스트를 진행하는 플레이어의 도움을 받아 탈옥한다.

    그 다음으로 플레이어가 잭 오 랜턴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지하던전 ‘얼어붙은 부패’.

    퀘스트를 진행하던 플레이어는 지하 깊숙한 곳 구석에서 하린마루에게 패한 채 얼어붙어 있는 잭 오 랜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일련의 과정 뒤에 마침내 잭 오 랜턴은 플레이어의 파티에 합류해 죽음룡 오즈와 겨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모든 설정들 이전, 맨 처음의 대격돌 당시 천하의 죽음룡 오즈를 상대로 잭 오 랜턴이 어떻게 홀로 살아남아 도주할 수 있었을까?

    제아무리 모든 멤버들이 목숨을 도외시한 채 잭 오 랜턴만을 도주시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소 아이러니한 일이다.

    윤솔과 드레이크, 쥬딜로페도 아리송한 듯 고개를 갸웃한다.

    심지어 이 이야기의 당사자인 오즈마저도.

    “으음. 그냥 설정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따지고 보니까 조금 이상하네.”

    “고정 S+등급의 오즈를 상대로 목숨을 건져 도망친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호앵?]

    [으음, 그러고 보니 그렇군. 나 역시도 그 호박머리 놈을 왜 놓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왜 잭 오 랜턴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그 말인즉슨…….

    “누군가가 개입했다는 거지.”

    나는 잭 오 랜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붉은 기운, 선악과의 아우라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기운이 이 구덩이 속 균열에서부터 옹달샘처럼 퐁퐁 솟아오르고 있다.

    그르륵……

    나는 땅에 떨어져 있던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거인족 대망자의 8번척추 마쿠아휘틀> / 양손무기 / A+

    거인의 척추는 부러지지 않는다.

    같은 거인의 공격이나 세월, 이 두 가지를 제외하면.

    -물리 공격력 +6,000

    -특성 ‘거인국으로 가는 길’ 사용 가능

    저주받은 유빙의 대망자를 잡고 얻은 뼈다귀 열쇠.

    나는 이것을 잭 오 랜턴이 소멸한 곳의 균열에 끼워 넣고 힘차게 돌렸다.

    그러자.

    쿠구구구구구구!

    균열에서 검붉은 빛이 폭사되는가 싶더니 이내 거대한 차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죽음길 나락. 죽음룡 오즈가 지배하던 공간은 그의 영원한 숙적(宿敵)을 향해 길을 열어 준다.

    -띠링!

    <히든 던전 ‘거인국(巨人國)’ 입구를 발견하셨습니다>

    <최초 발견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영구히 기록됩니다>

    <최초 발견자: 고인물>

    거인국 ‘바산(Bashan)’, 오래 전에 멸망했다고 알려진, 지금은 전설 상에나 회자되는 거인들의 영토.

    “이런 게 진짜 있을 줄은 몰랐군.”

    회귀자인 나조차도 이 맵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른다.

    다만 회귀 후 최대한 정보를 긁어모으며 조사했을 뿐.

    ‘……천공섬의 비행로에서 단서를 얻은 게 컸다.’

    나는 오래 전 1차 대격변을 일으키기 위해 천공섬으로 가던 때를 떠올렸다.

    당시 그곳에서 얻었던 히든 퀘스트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히든 퀘스트 ‘500년 전에 부친 편지’> / <(완수)>

    <히든 퀘스트 ‘영원한 상봉(相逢)’> / <(완수)>

    <히든 퀘스트 ‘거인국으로 가는 길’> / <(미완수)>

    이 중 아직 완수하지 못한 히든 퀘스트는 마지막 목록의 ‘거인국으로 가는 길’ 뿐.

    나는 퀘스트 정보를 확대해 보았다.

    <히든 퀘스트 ‘거인국으로 가는 길’>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영원한 상봉’ 퀘스트를 선행한 자>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거인 왕 이스비브놉에게 구름 거인 골리앗의 편지를 전해 주자>

    <※거인국 입장 시 거인의 몸 조각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거인국으로 가는 차원의 균열이 코앞에 있다.

    동시에 인벤토리 속의 아이템들이 웅웅 울린다.

    <나의 오랜 벗 골리앗에게>

    -골리앗, 자네가 악마 놈들의 간교한 계략에 빠져 하늘에 갇힌 지도 어느덧 수백 년이 지났군.

    나는 오늘도 악마와 싸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어. 이제는 모두 죽고 나 혼자만이 남았다네.

    모든 죽음은 애석한 것이지만, 특히나 자네의 부인과 딸의 죽음은 각별히 더 애석했다네.

    그 누구보다 용맹스럽던 자네의 가족들도 쏜살같은 시간만은 이겨내지 못했어.

    그리하여 나는 그 둘의 영혼을 접시에 담아 자네에게로 보내려 하니 그곳에서라도 일가족 상봉을 하도록 하게.

    부디 하늘에 갇혀 있을 자네에게 이 편지가 닿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

    P·S-

    더러운 인간 놈들이 제수씨와 조카의 영혼을 담은 그릇을 노리기에 혼을 좀 내 줬지.

    놈들의 배 편에 제수씨와 조카의 영혼을 담아 자네가 갇혀 있는 곳으로 보내겠네.

    -거인국의 마지막 왕 이스비브놉-

    이것은 자그마치 500년 동안이나 하늘을 날아가는 중이던 유령선 안에 보관되어 있던 편지로 구울이 된 해적들이 지키고 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이 아이템을 입수해 하늘 감옥 ‘뇌옥(雷獄)’에 수감되어 있던 거인 ‘골리앗’의 영혼에게 전달했었고 그에게서 답장을 받았던 바 있다.

    -<뇌옥 죄수의 답장> / 재료 / D

    -구름 거인 골리앗이 보낸 답신.

    ‘거인국의 마지막 왕이자 나의 절친한 벗 이스비브놉에게’ 라고 적혀 있다.

    아이템 설명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 ‘거인국’이라는 말.

    그리고 눈앞에는 그 미지의 맵으로 통하는 차원 균열이 보인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편지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나 갈 수 없는 숨겨진 맵의 결계를 열어젖힌다.

    그때.

    [조심해라 인간.]

    오즈의 묵직한 저음이 내 발길을 잡아 세운다.

    녀석은 전과 같지 않은 진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안에 있는 놈은 위험하다.]

    한때 고정 S+급 몬스터였던 존재의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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