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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12화 (812/1,000)

812화 선악과(善惡果) (3)

쉬익-

리자드맨들 특유의 숨소리.

2차 대격변 이후 언어는 통하게 되었지만 리자드맨들 사이에서 특유의 신호와 밈 역할을 하는 저 숨소리 패턴을 인간은 정확하게 분석할 수 없다.

안티 니에미는 다른 몇몇 덩치 큰 리자드맨들을 이끌고 와 우리를 포위했다.

“이 사냥터는 우리 ‘씬 클럽(club SIN)’이 접수했으니 다른 사냥터를 알아보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다른 시간에 접속하든가.”

대형 길드가 사냥터를 통제하고 자리를 맡는 것이야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별로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이 이벤트가 드레이크에게는 꽤나 색다른 자극을 주었던 모양이다.

“요즘 PK를 좀 뜸하게 하기는 했지. 그리고 무엇보다…… 옛날 생각나지 않나!”

과거 드레이크는 이곳 분쟁지대에서 십 수 마리의 리자드맨 유저들을 상대로 PVP를 벌였던 적이 있다.

당시 한 고렙 리자드맨 유저와 1:1 대전으로 꽤나 팽팽하게 겨루고 있었던 그는 적들이 합공을 펼치는 바람에 죽기 직전까지 몰렸었다.

내가 나서서 구해 주기 전까지 말이다.

“그때와 내가 달라졌다는 걸 보여 주지.”

드레이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출격했다.

나는 잔뜩 흥분해서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쥬딜로페를 안아들었다.

“자, 드레이크에게 한번 맡겨 보자고. 저렇게 의지가 충만한데.”

[호애앵! 뿌! 투(鬪)애앵!]

“그래, 그래. 너도 물론 의지가 대단하지만…… 어휴, 젤리를 얼마나 먹은 거야 얘. 무거워진 것 봐. 뱃살도 대단하네.”

나는 그새 꽤 많이 커져서 머리 위에 올려놓기 부담스러워진 쥬딜로페를 안아 준 채로 전투를 관람했다.

드레이크는 입에 단검을 문 채 마름쇠와 쇠뇌를 들고 뛰어나갔다.

…파팍!

제일 먼저 땅을 박찬 이는 의외로 드레이크였다.

니에미를 비롯한 리자드맨들은 코웃음을 치며 달려왔다.

“궁수 주제에 거리를 좁혀 와?”

“뒈지려고 작정했군.”

“죽여!”

순식간에 좁아지는 거리.

하지만 드레이크를 거리를 벌려가며 싸우는 일반적인 궁수하고 같게 생각하면 큰코다친다.

…퍼퍼펑!

드레이크의 양손에 들린 쇠뇌가 화살을 토해 냈다.

원래도 빠르지만 짧은 거리인지라 더 빠르게 느껴지는 화살.

“……!”

니에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궁수를 상대해 본 경험은 많았지만 이렇게 물소처럼 돌진해 오는 궁수는 처음, 전진하면서 화살을 쏘니 후진하면서 화살을 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도 강력하다.

“…큭!”

니에미는 두 팔의 완갑을 X자로 교차시켜 화살을 막아 냈다.

하지만.

터엉- 빠각!

완갑은 화살 한 방에 내구도가 0이 되어 부서져 버린다.

‘미친, 무슨 힘이…….’

니에미는 드레이크의 근력 스탯에 경악한다.

그도 그럴 것이.

“궁수의 힘이 약하다는 것은 편견이지.”

드레이크가 씩 웃었다.

굵고 큰 화살의 시위를 당기려면 엄청난 팔 힘이 필요하다.

양궁도 한두 번 쏘고 나면 손목이 시큰거리고 전완근, 이두근, 삼두근이 후들거리는 마당에 이렇게 크고 무거운 쇠뇌야 오죽하랴.

더군다나 땅에 뿌려야 하는 마름쇠들도 하나하나가 은근히 무게가 나가기 때문에 장거리를 꾸준히 던지다 보면 팔 힘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러나!”

니에미는 다른 유저들을 향해 외쳤다.

그리고 물러나는 순간 스스로도 아차 싶어 이를 악물었다.

세상에 궁수를 상대로 거리를 내주는 바보 같은 실수를 하다니!

상대방이 갑자기 워낙 저돌적으로 달려드는데다가 힘까지 세니 순간 무의식적으로 착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드레이크는 니에미가 벌려 놓은 거리를 옳다구나 하고 더욱더 멀리 벌린다.

“거리가 멀어지면 당연히 더 좋지.”

거리가 좁아도 잘 싸울 수 있는 것이지 거리가 좁아야만 잘 싸우는 것이 아니다.

본래 궁수는 원딜에서 빛을 발하는 포지션 아니겠나.

퍼퍼퍼퍼펑!

화살비가 쏟아져 내린다.

배드엔딩들의 단단한 외골격으로 만들어진 화살, 거기에 불카노스 촉까지 붙었다.

그것을 A+등급의 쇠뇌로 쏴 갈기는데 방어구가 멀쩡할 리가 없는 노릇.

퍼퍼퍼펑!

수많은 리자드맨들이 무릎을 꿇었다.

목숨을 잃을 만큼의 중상은 아니었지만 다리나 꼬리 등 기동력을 만들어 내는 기관들이 완파되었으니 더 이상 PVP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쉬익!”

니에미는 리자드맨 특유의 숨소리를 강하게 내뱉었다.

이내, 그는 땅 위로 툭툭 불거져 나온 바위 뒤로 숨었다.

당장 쏟아지는 화살비를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하지만.

“예전과는 조금 다를 거다.”

드레이크는 바위를 향해 그대로 화살을 쏘아 보낸다.

퍽! 퍼퍽! 쾅!

화살은 바위를 깨부수고 관통해 그 뒤에 있던 리자드맨들의 등팍에 그대로 박혀들었다.

“으어어어, 괴물이다!”

그제야 리자드맨들은 드레이크의 레벨과 장비가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챈 듯하다.

니에미는 이를 악물고 몸을 위로 솟구치게 했다.

바위 양편으로 뛰쳐나가지 않고 리자드맨 특유의 폭발적인 점프력을 이용해 위로 도약할 계획.

하지만 그 역시도 드레이크가 이미 간파한 뒤였다.

“리자드맨들은 역시나 피지컬이 좋군. 위로 올 것도 예상했지.”

바로 화살비가 몰아친다.

니에미가 허공에 뜬 채로 화살에 맞아 떨어지자 드레이크는 쇠뇌의 와이어를 푼 뒤 그것을 올가미처럼 던져 니에미의 목에 걸어 버렸다.

동시에 와이어를 끌어당긴 드레이크는 두 발 무릎으로 니에미의 어깨를 누르고 무게를 실어 목을 조른다.

“교수형 당하는 기분이 어때?”

귓가에 와 닿는 드레이크의 싸늘한 목소리. 고막이 얼어붙는 듯한 냉기에 니에미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열한 마리의 리자드맨들이 변변찮은 반격 한번 못 해 보고 전원 걸레짝이 되기까지는 불과 3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야, 드레이크 엄청 늘었네. 몰라보겠어 아주.”

나는 오즈가 만들어 온 나쵸와 팝콘을 먹으며 손뼉을 쳤다.

예전에 고르딕사를 잡으러 ‘황천의 유극’ 던전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드레이크는 이 정도 숫자, 이 정도 수준의 리자드맨들을 상대로 무척이나 고전했었다.

‘그때 드레이크의 레벨이 몇이었더라? 70대 초반이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레벨이 10 이상 올랐다.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진 힘과 속도!

“으흠, 어진. 그때도 이 정도는 했다. 나는 별로 달라진 것 잘 모르겠는데?”

그리고 능글맞음까지!

한편, 옆에서 드레이크의 전투를 지켜보는 윤솔 역시도 많이 변했다.

“와아- 드레이크 씨가 순간 화력이 있으시네, 리자드맨들의 경갑과 비늘들은 질기고 단단해서 뚫기 힘든데. 더군다나 이 근방의 바위들은 암석밀도가 높아서 관통 반감 특성이 있는데도 이 정도라니. 원딜 중에서는 정말 독보적이시다.”

예전에 드레이크와 리자드맨들의 싸움을 바라볼 때는 레벨 1의 뉴비여서 아무것도 몰랐었는데,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지나갔나 싶은 대목이었다.

바로 그때.

“……그만!”

싸움을 말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내 이목을 끄는 존재 하나가 저 멀리 굴 안에서 걸어 나왔다.

꽤나 낯익은 얼굴.

현재 러시아 통합 랭킹 2위인 플레이어.

바로 카렐린 강이다!

훗날 리자드맨 종족 랭킹 1위에 오르게 되는 존재.

러시아 국가대표 팀 선발에서 오크 종족의 트로츠키에게 밀려 간발의 차로 떨어진 은메달리스트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렐린 강은 드레이크가 리자드맨 전에 빠삭해질 수 있게끔 도움을 주었던 인물이다.

그와의 전투 경험 때문에 방금도 드레이크가 니에미 등등의 상위 티어 랭커들을 압살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움직임만 봐도 누군지 알겠군.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는데?”

카렐린 강은 후드를 눌러 쓴 드레이크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본 모양이다.

물론 그 뒤에 있는 나와 윤솔 역시도 말이다.

그는 바닥을 나뒹구는 리자드맨들을 향해 말했다.

“물러나. 우리가 한 트럭으로 덤벼들어도 못 이길 상대들이다.”

그러자 니에미를 비롯한 다른 리자드맨들이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오크 족의 트로츠키와 더불어 러시아 공식 랭킹 1위를 다투는 실력자가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장내의 분위기가 급격히 조용해졌다.

내가 알기로 카렐린 강은 씬 클럽 소속이 아니었지만 니에미를 비롯한 다른 길드원들은 그를 꽤 존중하고 있는 듯 보인다.

“카렐린 님의 말씀이라면야 따라야지.”

“국가의 언론자유를 위해 힘쓰시는 분이니.”

“우리를 두 번 구해 주시는군.”

카렐린 강이 현실에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살짝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모두가 주춤주춤 물러나자 카렐린 강은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저 친구들을 이대로 놔 준다면 보답을 하지. 당신에겐 지고 있는 빚도 많고.”

그렇다.

나와 그의 인연은 의외로 꽤 깊다.

황천의 유극에서 만나 싸웠었고 서로 불가침 조약을 맺어 조디악을 죽였다.

그리고 훗날 마몬 레이드를 뛰러 갔을 때, 싸이코패스 장로 스탄의 퀘스트 때문에 만마전에 갇혀 있던 그를 구해 준 적도 있었다.

‘물론 그때는 적을 교란시킬 미끼가 필요했었던 것뿐이지만.’

게다가 나는 뜻하지 않게 카렐린 강에게서 조디악에 대한, 그리고 1차 대격변에 대한 정보도 입수했던 적이 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손해 없이 일방적으로 이득만 얻었던 모양새.

하지만 그것을 카렐린 강은 조금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리자드맨들을 살려 보내 주자 카렐린 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따라와. 나는 은혜는 반드시 갚는다.”

그는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우리에게 손짓했다.

우리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저 아래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가리키며.

*       *       *

-띠링!

<죽음길 나락 3층 ‘불가해지대’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객: 고인물>

나는 죽음길 나락 3층을 지나 4층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섰다.

오즈가 떠난 이후 4층은 무너졌고 붕괴물 때문에 3층과 4층으로 가는 입구가 아예 꽉 막혀 버렸다고 한다.

카렐린 강이 말했다.

“길드 차원에서 인력을 투입해 4층으로 통하는 문을 뚫었지. 그래서 길드에서 어느 정도 소유권을 주장하는 거야. 다 점거할 수는 없으니 특정 시간대 동안만 말이야.”

그렇다면 카렐린 강의 주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애초에 4층을 무너트려 통로를 막은 존재가 나이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카렐린 강은 나에게 던전 열쇠를 건네주었다.

“3층 ‘불가해지대’에서 4층 ‘심계’로 가려면 이 열쇠가 필요하지. 지금은 길드 레이드가 끝나서 아무것도 없는 4층에서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아무튼 잘 해 보라고.”

오래 전, 내가 그에게 만마전 탈옥 열쇠를 건네주었던 것처럼 그 역시 내게 열쇠를 건네주었다.

일이 비교적 수월하게 풀려 다행이다.

나는 카렐린 강의 배웅을 뒤로하고 4층의 문을 열어 아래로 내려갔다.

-띠링!

<죽음길 나락 4층 ‘심계’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객: 고인물>

과거 오즈가 죽었던 곳에 도착했다.

[그으으윽! 나쁜 쓰애끼들! 나를 굳이 이곳에 데려와야 했느냐-아!]

PTSD가 도진 오즈가 머리의 비늘을 움켜쥔 채 바들바들 떤다.

하지만 지금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오즈의 심리상태 따위가 아니었다.

예전에도 언급했듯.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이 세계관 속 ‘선악과’ 특성을 가지고 있는 단 4마리의 몬스터 중 하나.

<‘선악과 앞에 선 자’ 잭 오 랜턴> -등급: S / 특성: 어둠, 백전노장, 할로윈, 선악과(善惡果)

바로 호박머리 ‘잭 오 랜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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