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화 Help yourself (4)
나는 얼마 전에 봤던 게임 커뮤니티의 댓글 몇 개를 떠올렸다.
-요즘 유토러스? 쪽에 엄청난 부자 하나가 떴더라
-ㅇㄱㄹㅇ진짜 돈 많아 보이는 사람이든데;;;
-스크루지 공작 말하는거 아님? 그 NPC 원래 돈 많음ㅋㅋ
-ㄴㄴ아님. 엄청 젊어 보였고...NPC도 아닌 것 같던데?
-ㅇㅇ유저 같았음. 근데 한낱 유저가 돈을 그렇게 많이 벌 수 있나?
-돈이라면 우리 돈지랄 축제 연 고인물 백작님 따라갈 사람이 읎제~
-ㅋㅋ그건 그럼. 근데 그 신흥부자 플레이어도 장난 아니게 돈 많아 보이던데...
.
.
그때는 말도 안 되는 뜬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스크루지 공작은 세계관 최고의 대부호라는 설정의 NPC, 그보다 더 돈이 많은 존재는 있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스크루지 공작보다도 돈이 많은 플레이어 본 적 있어?”
조디악의 입가에 걸려 있는 불길한 미소.
거기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달러들을 보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디악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그게 너였냐?”
내가 묻자 조디악은 함박웃음으로 답한다.
바로 그때.
“꺄아아아악! 저게 다 뭐야아!”
지하수로에 날카롭게 울려퍼지는 비명.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지하수로 저 끝 쪽의 구석진 코너에서 여자 한 명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게 보였다.
바로 김정은이었다.
못 본 사이 살이 많이 찐 그녀.
김정은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나를 바라보며 외쳤다.
“저, 저, 저 새끼들이 왜 여기에 있어?”
“내가 초대했는데?”
조디악이 태연하게 대꾸한다.
김정은은 입을 딱 벌리고 나와 조디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자기들끼리도 합의가 안 된 것 같은데.
이윽고, 김정은은 기가 막히다는 듯 조디악을 다그쳤다.
“저놈을 왜 불렀어! 저놈은 윌슨의 끄나풀이잖아!”
“푸스스스- 끄나풀이라니. 내 친구에게 실례잖아.”
“친구는 무슨 지랄! 당장 쫓아내! 아지트도 옮길 거야!”
김정은이 짜증스럽게 외치자 그녀의 뒤에서 두 명의 덩치가 걸어 나온다.
방철우, 방철해였다.
그러자 그 앞으로 유창과 유다희가 나선다.
“후후, 더러운 오크 놈들.”
“오늘 지하수로에서 줄초상 나겠네.”
유창, 유다희 남매와 방철우, 방철해 형제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막은 이는.
“아 내가 알아서 한다고!”
드물게도 짜증을 내는 조디악이다.
마치 게임 삼매경에 빠진 아들마냥 투정을 부리는 조디악을 김정은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어휴, 앓느니 죽지. 증말!”
김정은은 결국 방씨 형제를 뒤로 물렸다.
조디악은 그제야 다시 실실 웃으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이거 손님들에게 실례를 했구만. 집안 꼴이 말이 아니야.”
그는 구석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고 이내 방씨 형제가 조디악과 내 사이로 탁자 하나를 가져다 놓았다.
나무 탁자 위에는 사과 한 알이 놓였다.
‘Help yourself’
탁자 바닥에는 칼로 새긴 듯한 글귀가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네.”
조디악은 뱀처럼 혀를 내밀어 입술을 몇 번 핥았다.
나는 눈앞에 놓인 사과를 빤히 바라본다.
“뭐야 이건?”
“사과.”
“그걸 물어봤겠냐?”
“아, 영어를 못 하나? Help yourself, 좋을 대로 해라. 알아서 먹으라는 거지.”
Help yourself. 좋을 대로 해라. 이는 스스로를 도우라는 뜻도 된다.
나는 음울한 빛을 뿌리는 전등 아래 빛나는 빨간 사과 한 알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때.
조디악이 말했다.
“혹시 게임머니 쌓아둔 거 있으면 빨리빨리 처분하는 게 좋을 거야. 주식이나 기타 게임 관련 재산들도 전부 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내가 의구심 가득한 표정을 짓자 조디악은 덧붙여 말했다.
“조만간 윌슨한테 칼을 꽂을 생각이거든.”
동시에, 그는 휴대용 캡슐을 열어 홀로그램 상태창을 띄워 보였다.
그것을 본 나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조디악 번디베일(‘J’)>
LV: ?
소지금: 99999999999999999…… G
조디악의 인벤토리에 쌓여 있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
그것은 정말로 스크루지 공작의 부를 아득히 초월하는 액수의 것이었다.
정상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라면 절대로 쌓을 수 없는 아득한 부(富).
나는 조디악의 옆에 삐딱하게 서서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정은을 돌아보았다.
“너네 돈 복사했냐?”
정확히 핵심을 찌르는 질문.
하기야 뭐, 이 정도 되는 돈을 들고 있는 것을 본다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의문이긴 했다.
김정은은 썩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고 조디악은 낄낄 웃으며 그런 김정은의 손을 잡아끈다.
“푸스스스- 이른바, 메자닌 채권 같은 거지.”
메자닌이라는 단어는 본래 건물의 1층과 2층 사이에 있는 라운지를 뜻한다.
다만 뎀을 즐기는 유저들 사이에서는 그 용례가 조금 다른데 이때는 길드거래소에서 발행하는, 길드의 주식과 채권 사이에 존재하는 금융 상품을 말하는 것이다.
“푸스스스… 중소형 길드 급 이상의 길드에서 발행하는 전환 사채나 신주인수권부 사채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군.”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표정을 구겼다.
“메자닌이 왜 돈 복사 버그에 이용되는 거지? 무슨 꿍꿍이야?”
“푸스스스- 그걸 다 말해 주려고 너를 부른 거잖아 친구. 너 피해 입지 말라고.”
“네가 왜 나를 생각해 주지?”
“나는 네가 쫌 마음에 들거든. 우린 벨페골의 악몽 속도 함께 헤쳐 나온 사이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온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조디악이 눈웃음을 치며 내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
고인물과 마동왕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들킨 모양이다.
하지만 심증만 가지고 있는 것일 수 있으니 무대응이 상책.
내 태도를 본 조디악은 그저 기분 나쁘게 미소 지을 뿐이다.
“뭐, 돈 복사 버그 자체는 별 것 아니지. 사실 이걸 이용해서 하려는 것이 대단한 것이고.”
그러자 옆에 있던 김정은이 발끈했다.
“뭐가 별 거 아니야! 이 버그 찾아내려고 그간 죽을 똥을 쌌는데! 스트레스 좀 받게 하지 마라! 아우, 배 아퍼.”
“푸스스스. 길드의 메자닌 채권을 샀다가 곧바로 되팔면 소지금이 두 배가 되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해?”
나는 둘의 대화를 듣고 입을 딱 벌렸다.
회귀 전에도 김정은은 루트 불명의 돈 복사 버그를 풀어서 게임 내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했었다.
‘그것이 바로 이 버그였었나. 길드를 이용한 것인 줄은 몰랐네.’
뎀 유니버스 본사가 생각보다 빠르게 대응해서 조기에 진압되기는 했지만 그 시즌 뎀의 경제는 완전히 엉망이 되었고 심지어 현실의 주가와 물가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흐름에 조디악까지 개입한다?
‘……대격변이라고 부를 만하군.’
조디악이 왜 2.5차 대격변이라는 말을 썼는지 알 것 같았다.
이들은 아마 뎀 세계에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올 것이다.
게임 속 은행들의 연계 도산, 화폐의 휴지화, 아이템들의 끔찍한 인플레이션, NPC들의 혼란, 현실 주가의 폭락과 정부 개입, 규제, 세금…….
경제가 초토화 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온다.
조디악은 그런 내 심경을 들여다보듯 실실 웃고 있었다.
“페이퍼 길드 몇 개를 만든 뒤 채권을 발행하고 그것들을 서로 매입하며 돌려막기, 돌려 갚기를 하다 보면 돈 불리는 거야 쉽지. 지금도 쌓여 가고 있는 게 보여?”
그의 말대로, 유령 길드 창고에 쌓여 가고 있는 조디악의 돈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불어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유다희가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길드라는 게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닌데, 어떻게 유령 길드들을 저렇게 많이 만들었지?”
원래대로라면 길드를 창설하고 운영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특히나 마교라는 대형 길드와 그레이 시티의 시청까지 이끌고 있는 그녀이기에 조디악의 간 큰 행보는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지는 것이었다.
“아니, 길드 창설을 위해서는 평판도와 길드 거래소와의 거래 기간, 길드 간의 신용거래 내역과 현재의 신용거래 상태, 신용등급, 연체정도, 신용형태, 부채수준, 보증인 숫자와 그들의 신용등급까지 다 따져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조작한 거야?”
그러자 김정은이 픽 웃는다.
“그걸 자동으로 맞춰서 해킹하는 게 내 프로그램이지. 이제 알겠어? 부채수준 35퍼센트, 신용형태 25퍼센트, 연체정보 25퍼센트, 거래기간 15퍼센트를 딱 맞춰서 조작하는 게 쉬운 게 아니라구. 거기에 16진법이기 때문에 숫자 배열이랑 자릿수를 조금만 이상하게 해도 신용도랑 돈이 다 삭제되어 버린단 말이야.”
그녀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있는 조디악을 흘겨본다.
아마도 김정은은 어떠한 불법 프로그램들을 자동으로 돌려 놓고 있는 모양.
그러니까, 이 지하수로는 일종의 ‘작업장’이었던 것이다!
“푸스스스- 나는 뎀 유니버스 본사에 핵폭탄을 터트릴 거야.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위력적일… 화폐 폭탄을 말이야!”
“……미친. 무슨 재벌강점기도 아니고.”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조디악의 돈 복사 버그는 가히 핵폭탄급 위험도를 가지고 있음에 분명하다.
벨제붑의 오염된 피는 플레이어를 죽이지만 사실 이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도전 정신을 불러 일으키기에 게임을 오히려 흥하게 만든다.
하지만 조디악의 화폐 폭탄, 디플레이션 창궐은 조금 다르다.
경제에 풀어진 독은 플레이어의 도전 정신을 꺾고 게임 의욕을 저하시키며 종국에는 아예 게임을 접게 만들어 버리기에 훨씬 더 무섭다.
조디악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웃는다.
“제아무리 윌슨이라고 해도 이번 것에는 타격을 입겠지. 무고한 이들을 납치해 만든 이따위 게임은 망해야 해.”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바로 백섭이 일어날 거고 버그들이 대대적으로 수정되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뎀 유니버스 본사의 직원들이 바보도 아니고, 겨우 돈 복사 버그 하나 때문에 게임을 망하게 내버려 둘 리가.
아마 바로 모든 게이머들의 접속을 정지시킨 뒤 백섭으로 서버의 시간대를 뒤로 돌릴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조디악이 일으킨 버그들을 모조리 삭제해 버리겠지.
하지만.
“푸스스스… 그렇게 되면 또 나름대로의 대비책이 있지.”
조디악은 이미 그 후의 단계까지 전부 계획해 놓은 듯했다.
“원래 덫은 이중 삼중으로 깔아두어야 하는 법이지. 짐승이라는 게 의외로 힘이 좋아서, 목숨 내놓고 발버둥 치면 덫 하나쯤은 쉽게 망가지거든.”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주는 거지?”
“친구니까. 짐승이 아니라.”
조디악은 내 앞으로 빠알간 사과 한 알을 슥 밀어놓았다.
“잘 판단하라고.”
뱀처럼 혀를 낼름거리는 조디악.
놈은 사기꾼 특유의 토벤머리와 쳐진 눈꼬리, 슬픈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했다.
“…….”
눈앞의 빨간 사과를 먹을 것인가. 아니면 먹지 않을 것인가.
지금껏 나의 신과도 같았던 뎀, 그 뎀을 만든 윌슨, 뱀처럼 혀를 낼름거리고 있는 조디악.
그리고 탁자에 새겨져 있는 글귀 ‘Help yourself’.
누구를 믿고 누구를 따를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
그것이 스스로를 돕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