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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07화 (807/1,000)
  • 807화 Help yourself (2)

    어느덧 무더위가 간다.

    슬슬 찬바람이 불어오는 2026년의 9월.

    회귀 전 나이 마흔한 살, 회귀 후 나이 스물일곱 살.

    나는 세계의 정상에 섰다.

    거대한 홀의 중앙 광장, 그 중에서도 가장 센터에 마련된 왕좌.

    여섯 개의 대검과 수없이 많은 작은 칼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 높디 높은 왕좌로 나는 걸어간다.

    월드 얼티메이트 올림피아드(World Ultimate Olympiad)의 우승국,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MVP 선수에게만 허락되는 자리.

    왕좌를 떠받치고 있는 여섯 개의 대검은 6대주 리그에 참가한 각 챔피언스 빅리그의 우승국들을 상징하며 그 밑을 받쳐 주고 있는 수많은 칼들은 리틀리그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신 세계 각국의 전통적인 칼 모양을 띄고 있다.

    즉, 이곳은 수많은 전사들이 피 흘려가며 앉고자 했던 궁극의 장소, 명예의 전당 한복판에 있는 성지(聖地).

    게이머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망상 속에서 꿈꿔 보았을 영역인 것이다.

    “…….”

    나는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이 자리, 즉 세계의 넘버원을 뜻하는 자리에 앉아 MVP트로피를 높게 들어 보였다.

    나를 향해 쏠리는 온 세상의 시선들을 모두 담아 보이겠다는 듯이.

    “축하합니다. 당신은 현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에요.”

    “사진 한번 부탁드리죠.”

    “다음에 우리나라에도 한번 방문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것은 사적인 부탁인데… 혹시 캡슐에 사인 한번 받을 수 있을까요? 제 아들 녀석이 열혈팬인지라…….”

    영국의 여왕마저 먼저 악수를 건네는 자리.

    이후 세계 각국 고위 정치인들의 축하가 이어진다.

    절차 상 거쳐야 할 사람들의 축하가 모두 끝난 뒤, 이제부터가 진짜 축하 시간이었다.

    제일 먼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축하였다.

    “축하한다 대장.”

    “축하해요. 결국 이 자리에 서셨네요.”

    드레이크와 윤솔이 나와 악수를 나누었다.

    둘 다 브라키오 레이드가 끝난 직후부터 고기를 많이 먹어서 그런가 그새 볼살이 약간 통통해진 것이 참 알기 쉬운 친구들이다.

    눈시울이 붉어진 두 친구들과 한번 포옹까지 끝낸 뒤, 다음으로는 유세희와 마태강이 다가와 안겼다.

    “사부! 으아앙-”

    “형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정말 형님이 넘버원입니다.”

    같은 팀원들 간의 해후. 가슴 벅찬 표정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식구들을 보니 이제야 정말 우승했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우리는 바야흐로 세계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때.

    “형님! 축하드립니다!”

    “세상에. 진짜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야 싶었는데, 설마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

    “나는 알았는데? 마왕에게 어울리는 옥좌는 이거 하나뿐이라는 걸 말야.”

    떠들썩한 분위기.

    단상 아래에서 한국 선수들이 올라온다.

    그렇다. 나는 세계 정점 급 선수들의 축하에 앞서 한국 게이머들의 축하를 먼저 받았다.

    임요셉, 류요원, 이준호, 이연호, 송병건, 그리고 금은동 자매 등등등.

    녀석들은 원래 이곳에 등장하는 것을 약간 부담스러워 했지만 나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나와서 나와 포옹을 했다.

    이런 높은 곳을 밟아 보는 것 자체가 신선한 자극,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이 자식아! 형은 임마! 으응? 형은 말이야! 으으응!?”

    엄재영 감독은 펑펑 울고 있다.

    내 허리를 끌어안고 높게 들어 올린 채 뱅글뱅글 도는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인마 응!? 오늘 돌아가면 난 와이프한테 죽었다고!”

    “왜요?”

    “내가 결혼식 날에도 이렇게 누구를 껴안고 들어 올려 준 적이 없거든!”

    ……이거 어쩌면 형수님 눈치 좀 봐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뭐 아무튼.

    한국 선수들과 해후를 나눈 뒤, 그 다음은 리틀리그 경합에서 만났던 중국과 일본 팀 선수들을 다시 만났다.

    “아시아에서 이런 선수가 나왔다는 사실에 몇 번이고 놀랐다.”

    “……하지만 이제는 슬슬 받아들여지네요. 당신이란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중국의 장마오 쉰과 일본의 아키사다 아야카.

    그 둘은 각각 중국 팀과 일본 팀 대표로 나와 내게 꽃다발을 건네고 포옹을 한다.

    우리는 아시아 챔피언스 리틀리그에서 온갖 사건 사고를 함께 겪고 처리한 사이인지라 우호적인 감정으로 얽혀 있었다.

    그리고 이내 빅리그에서 만났던 인연들.

    대만의 저우쯔위와 러시아의 트로츠키가 단상 위로 올라와 꽃다발을 건넨다.

    “축하합니다 마동왕 씨. 오면서 피반창 그 녀석이 자꾸 꽃다발을 자기가 주겠다고 해서 곤욕이었어요. 하하하-”

    “……대단한 결승전이었어. 나였더라면 관객들을 그렇게 즐겁게 해 주지 못했을 거야. 멋졌다.”

    둘은 나와 악수 한 번, 포옹 한 번을 하고 내려갔다.

    그 무뚝뚝한 트로츠키가 굳이 포옹까지 하고 간 것은 상당히 의외였다.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세계리그의 주축들이 모였다.

    에티오피아의 페이사 릴레사는 나를 보며 씩 웃어 보인다.

    “못 본 사이에 홀쭉해졌군. 요즘 채식만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오늘 여기 있는 고기반찬 내가 다 먹고 갈 거야.”

    어차피 같은 건물 연습실을 쓰는지라 거의 매일 보는 그이다.

    우리는 가벼운 악수와 포옹을 나누고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다음은 미국의 비앙카.

    그녀는 누가 봐도 대놓고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자세를 삐딱하게 꼰다.

    “우리 회사 핵폭탄 탄두에 네 얼굴 좀 넣자.”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

    얘는 왜 만날 때마다 핵 얘기야.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마지막 선수를 바라보았다.

    영국의 에드워드 튜더 프랜시스.

    한때 세계랭킹 1위였던 남자. 그러나 이제는 파손된 엑스칼리버를 물어 주느라 정신없는 가엾은 녀석.

    그래도 녀석은 세계의 영웅답게 친절한 미소, 밝은 성정으로 나의 우승을 축하한다.

    “존경스럽습니다. 마동왕과 고인물, 그리고 한국의 게이머들.”

    그는 나와 내 주변에 모인 모든 한국 게이머들에게 하나하나 머리 숙여 인사한 뒤 악수를 나눴다.

    한국 게이머들 역시 세계통합랭킹 1위를 만났다는 것에 기뻐하며 악수를 나눈다.

    서울 대표 리그부터 시작해 국내 리그를 두 번 거쳐 아시아 리그, 그리고 세계리그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코스였다.

    나는 온 세상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마이크에 대고 짧게 말했다.

    “짧은 밤의 긴 꿈 같습니다. 모두들 감사합니다.”

    *       *       *

    그리고 모든 시상식이 끝난 뒤.

    나는 시상식을 위해 체크인한 호텔과는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곳, 런던 화이트채플의 새벽 거리로 나왔다.

    같이 온 친구들, 구단 식구들은 모두 연회의 샴페인과 분위기에 취해 잠들어 있는 지금.

    저 멀리 보이는 시계탑의 바늘이 둥근 보름달을 비스듬히 세워 찌른다.

    나는 쓰레기 뒹구는 뒷골목을 한참이나 걸었다.

    어스푸레한 달빛 아래 자욱한 물안개가 뿌옇다.

    죽은 고양이에게 달라붙어 있던 쥐 몇 마리가 반쯤 열린 맨홀 뚜껑 밑으로 황급히 사라진다.

    빈 술병과 물에 젖은 신문지, 꽁초들을 피해 더욱 더 깊이 들어가자 이내 거미줄 같은 전선과 빨랫줄 아래로 허름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폐건물의 깨진 유리창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내가 골목 안쪽으로 막 발걸음을 옮겨 놓으려는 순간.

    “진짜 왔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밝은 목소리.

    골목의 어두운 그림자 밑에서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지독하게도 흰 얼굴, 그래서 더욱 더 퀭해 보이는 눈매.

    조디악 번디베일.

    그가 나를 보며 눈웃음을 치고 있다.

    “저번보다 한국말이 더 늘었구만?”

    “원어민이랑 붙어 있다 보니 말이지.”

    “요태까지 날 미행한 고야?”

    “물논.”

    조디악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손에 든 편지를 팔랑거리며 물었다.

    “근데 왜 불렀어?”

    “푸스스스…… 친구가 친구 부르는 데 이유가 있나? 보고 싶으니까 부른 거지.”

    조디악은 막상 만나니 딴청으로만 임한다.

    나는 짧게 말했다.

    “바쁘니까 용건만 나누지.”

    “오우, 겁도 없어라.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새침하게 굴기 있어?”

    조디악의 여유는 이해가 되는 것이다.

    게임 속이었다면 모를까, 현실에서 만난 녀석은 정말로 위험해 보였다.

    온몸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광기(狂氣).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느껴지는 사이코 특유의 기운.

    마치 회귀하기 전, 전성기 시절의 조디악을 보는 듯하다.

    이제야 피부로 실감이 되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눈앞에 두고 있는지 말이다.

    “나한테 그렇게 차갑고 딱딱하게 굴다가는 진짜로 차갑고 딱딱하게 될 수 있어, 친구.”

    윙크를 날리는 조디악. 놈이 내밀어 보이는 피 묻은 송곳에는 경찰 배지들이 몇 개나 걸려 있었다.

    하지만.

    “글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 런던 시내가 대낮처럼 환해질걸?”

    나 역시도 바보가 아니다.

    요즘은 경찰에 신고하는 어플들이 잘 되어 있고 그에 따른 연계 장치들도 많다.

    나는 아까부터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였는데 사실 엄지손가락으로 리모콘의 버튼을 꾹 누르고 있는 상태이다.

    내가 손을 떼는 그 즉시 경찰들에게 연락이 가겠지.

    ……게다가.

    “어디 그 주둥이 어떻게 터나 한번 보자. 이 사이코 새끼.”

    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그림자.

    호위로 따라온 유창이 이마에 핏줄을 세운 채 조디악을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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