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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02화 (802/1,000)
  • 802화 심록용(深綠龍) 브라키오 (7)

    …콰쾅!

    수천 년은 족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굵은 나무와 바위들이 송두리째 뽑혀나온다.

    [오-오오오오오오!]

    원시림의 제왕, 분노한 황제!

    녹색 비늘 일족의 군주 브라키오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지면을 휩쓸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냐! 어디로 숨었느냐!]

    날카롭게 핏발 선 시선이 숲 곳곳을 훑는다.

    평소 온화한 성격의 녹색용 일족답지 않은 기세.

    평소에는 영역을 활개치고 다녔던 그린헬의 대형 포식자들은 브라키오의 등장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땅거죽 밑에 머리를 파묻고 덜덜 떨고 있었다.

    하지만 브라키오는 다른 잡스러운 몬스터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목적은 오직 하나. 자신의 백년대계를 망쳐놓은 삼인방을 찾아내 짓밟아 죽이는 것 뿐.

    [가만두지 않으리라!]

    앞으로 백 년. 딱 백 년만 더 세계수의 수액을 빨아먹었다면 모든 용들의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여섯 용군주보다도 더욱 높은 왕좌에 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골드 족의 ‘그 놈’보다도 더욱 더 강해질 수 있었거늘……! 원통하도다!]

    그래서 더더욱 아까의 그 인간 세 마리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어차피 이곳 그린헬의 숲 안은 손바닥의 손금 보듯이 꿰고 있다.

    절대로 도망칠 수는 없을 것이다. 브라키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브라키오는 도망자들의 흔적을 금세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린헬의 중심부.

    그곳에 쉘터로 보이는 커다란 목재 건물이 솟아나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못 보던 건축물이었다.

    [후후후후- 기껏 숨은 곳이 그따위 너절한 쉘터인가. 하찮고 가련하도다, 벌레들이여.]

    브라키오는 긴 목을 앞으로 빼어 건물의 문을 부수고 안쪽을 향해 머리를 집어넣었다.

    [이 안에 숨어 있느냐, 벌레 같은 것들!]

    집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은 브라키오.

    하지만.

    놈이 문을 부수고 머리를 집어넣은 즉시.

    …콰쾅!

    이변이 일어난다.

    쿠르르르릉!

    목재 건물이 별안간 와르르 무너져 버린 것이다.

    건물에 깔린 브라키오는 약간 당황했다.

    건물의 꼭대기 부근 층에 마름쇠와 바위들이 잔뜩 올라가 있었기에 낙석 데미지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퍼퍼퍼퍼펑!

    화약까지 적재되어 있었는지 요란한 폭발마저 일어난다.

    […으윽!]

    꽤나 큼지막한 규모의 붕괴였기에 천하의 브라키오조차도 약간의 데미지를 입었다.

    그리고 그때쯤 해서.

    “오, 잘 무너트렸는데?”

    자욱한 물안개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삼인조가 있었다.

    뿌듯한 표정으로 가슴을 펴고 있는 드레이크.

    그런 드레이크를 칭찬하는 나.

    그리고 자기 차례를 기대하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윤솔이었다.

    *       *       *

    불과 몇 분 전.

    나는 브라키오에게서 도망치는 동안 살인자들의 탑 5층을 공략하던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벨페골의 거울에서 나온 전성기 시절의 앙신 조디악.

    놈을 상대하는 동안 나는 맵에 구덩이를 파거나 나무 건축물을 짓거나 거대한 미궁을 만들거나 하며 자유도 높고 변칙적인 플레이를 선보였었다.

    그리고 이곳 그린헬에서는 그때와 비슷한 플레이가 가능하다.

    “자, 잘 들어. 그린헬 맵의 높은 자유도는 너희들도 오면서 경험해 봤지?”

    내 말을 들은 윤솔과 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면서 채찍 같은 공격용 아이템이나 도토리 목마, 솔사람, 목재 조각상 같은 아이템도 직접 제작했었잖아.”

    “그러고 보니 과거 네가 살인자들의 탑 5층의 맵을 마음대로 디자인하던 것이 떠오르긴 하는군.”

    윤솔과 드레이크의 말에 나는 검지를 펴며 설명했다.

    “이 맵 그린헬은 두 가지 게임을 오마쥬했어.”

    첫 번째는 물론 원작 ‘그X헬’이다.

    울창한 밀림 속에서 사냥과 수렵, 원주민들과의 대립을 거치며 살아남는 생존게임.

    두 번째는 바로 아는 사람은 안다는 고전게임 ‘비X즈’.

    “이 비시X라는 게임은 말이야. 각종 부품들을 이용해서 공성병기를 만들어 스테이지 별로 목표를 달성하는 게임이야. 구조물 일정 비율 이상 파괴, 적군 일정 수 이상 제거, 특정 오브젝트를 운반하기 등의 미션을 클리어하는 거지. 물론 자유도 높은 샌드박스 모드도 있고.”

    예를 들어 나무 판자와 작대기, 바위, 화약, 가죽 등을 이용해서 집을 짓거나 망루를 짓거나 수레를 만들거나 해서 주변의 요새를 무너트리거나 혹은 단단한 요새를 증축하거나 하는 식.

    빠르게 움직이는 수레를 만들거나 적들을 대량 학살할 수 있는 공성병기를 만들며 놀 수도 있다.

    살인자들의 탑이 오마쥬한 ‘포X나이트’ 시스템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 뿐이다.

    살인자들의 탑에서는 재료나 파츠들을 상점에서 돈을 주고 살 수 있지만 이곳 그린헬에서는 하나하나 다 직접 구해야 한다는 점 정도?

    “……그리고 우리에게는 마침 충분한 재료들이 있지.”

    나는 벨제붑의 폭식 창자 속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아이템들을 들여다보았다.

    <아이템>

    -나무 수액 (깨끗함)

    -나무 수액 (오염됨: 독 감염)

    -커다란 코코넛 껍질

    -목탄

    -숯

    -정체불명의 꽃

    -정체불명의 뿌리

    -정체불명의 잎사귀

    -단단한 목재

    -무른 목재

    -무른 목재 (썩음)

    -커다란 활엽수 잎사귀

    -뾰족한 침엽수 잎사귀

    -질긴 넝쿨줄기

    -끈적한 수액

    -굳은 꿀

    .

    .

    그린헬의 잡몹들을 잡는 동안 어느새 수북하게 쌓여 버린 잡템들.

    이것들 하나하나가 다양하게 활용될 여지가 있는 건축 재료들이다.

    “손만 빠르면 이것들을 이용한 아이템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어. 예전에 마몬의 만마전 공략 당시 벨럿이 트로이 목마를 만들던 것처럼.”

    회귀하기 전, 그린헬로 모여든 고인물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끔찍한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냈다.

    맵 개발자가 의도한 것은 기껏해야 투석기나 바퀴 달린 대포, 굳건한 요새나 망루 등의 제작물이었지만 고인물들은 온갖 창의력과 잉여력을 발휘해 기상천외한 것들을 만들어 냈는데 나는 그것들의 도면과 제작 방법들을 모조리 꿰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바로 지금.

    [크-워어어어억!]

    나는 무너진 집 아래 깔려 괴성을 지르는 브라키오를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 했어, 드레이크.”

    나는 드레이크의 등을 팡팡 쳐 주었다.

    드레이크는 내 칭찬을 들은 게 뿌듯한지 코끝을 쓱쓱 문지른다.

    “후후, 어진. 역시 알아봐 주는군. 나의 ‘1초 만에 무너지는 집’을. 크랭크 축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고민 많이 했다고.”

    “음, 이건 인정. 정말 대단해.”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윤솔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드레이크 씨. 근데 집은 튼튼해야 의미가 있는 거 아니에요?”

    “모르는 소리! 자체 개발한 기어와 버튼, 지렛대와 버팀목의 배치를 통해 자의로 무너트렸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다. 솔.”

    드레이크는 샐쭉한 표정으로 윤솔에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나 역시도 그런 드레이크를 도와 추가 설명을 했다.

    “요컨대 그냥 무너트리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무너트릴 수 있다는 점에 의의를 둔달까?”

    이곳 그린헬의 높은 자유도는 물리 엔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당연히 하중이나 무게중심 등을 아주 중요한 요소로 취급한다.

    부품 하나하나에 키를 따로 적용하거나 각종 부품들을 연계 동력으로 삼아 아주 복잡하고 세밀한 메커니즘까지 구현 가능한 것이다.

    “……?”

    윤솔은 아직 ‘하우징’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뭐… 그게 당연한 일이다.

    드레이크의 자의적 부실공사 기법은 아직 3년은 이른 기법이니까.

    물론 회귀 전의 고인물들에 비하면 걸음마 옹알이 수준이지만 현세의 게이머들에게는 거의 시대를 선도하는 격이겠지.

    “뭐, 아무튼 데미지를 입혔으니 된 거지.”

    나는 다시 무너진 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놈들!]

    그때쯤 해서 브라키오가 물안개 너머의 우리를 발견했다.

    콰콰콰콰쾅!

    주변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며 돌진해 오는 브라키오.

    하지만!

    물안개 너머에는 이미 윤솔이 건축한 거대 요새가 있었다.

    “발사!”

    윤솔이 하린마루와 쟈쿰의 힘을 이용해 주변의 로프를 끊자 커다란 나무 판자들이 확 솟구쳐 오르며 그 위에 올려져 있던 바위와 화약들을 하늘로 쏘아보낸다.

    펑! 퍼펑! 콰콰콰쾅!

    요새에 설치된 수많은 공성병기들이 브라키오를 강타한다.

    하지만 브라키오는 그저 가소롭다는 듯 미소지을 뿐.

    [트르르르… 감히 나를 상대로 공성전을 걸어오는가.]

    놈은 전신의 나무껍질 같은 비늘을 더욱 더 두텁게 일으켰다.

    떨어져 내리는 바위나 가시, 화약들은 결국 놈의 몸을 뚫지 못했다.

    윤솔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던 오즈가 혀를 끌끌 찼다.

    [브라키오는 과거 용마전쟁에서 수많은 악마족의 요새들을 함락시켰던 전적이 있지. 공성전만 벌어졌다 하면 선봉장으로 나섰던 놈이니만큼 요새를 상대하는 것에는 익숙할 거야.]

    오즈의 말대로였다.

    브라키오는 절대적인 자신감을 엿보이며 우리가 만든 거대한 요새 앞에 섰다.

    [지상에 박혀있는 요새 따위로는 나를 막을 수 없도다!]

    급하게 쌓아올린 이따위 너절한 요새 따위는 단숨에 함락시켜 버릴 수 있다는 듯한 태도.

    하지만.

    “요새가 너를 막는 게 아니라 네가 요새를 막아야 할걸?”

    [……?]

    브라키오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눈매를 구긴다.

    그리고 이윽고.

    [……!?]

    브라키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퍼엉!

    무언가가 쏘아져 하늘로 올라가는 소리.

    그것은 지금껏 쏘아졌던 바위나 포탄 따위의 단순한 것이 아니다.

    요새.

    요새 그 자체.

    그 거대한 존재가 바닥에서 불을 뿜으며 허공에 통째로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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