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797화 (797/1,000)
  • 797화 심록용(深綠龍) 브라키오 (2)

    -<질 낮은 거미줄> / 재료 / C

    바람에 나부끼는 거미줄.

    점도와 탄성이 높아 피부에 닿았을 시 불쾌감을 준다.

    -물리 공격력 +10

    거미계곡 점액지대를 통과해 나온 우리들의 몸은 온통 허옇고 끈적한 액체로 범벅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피부에 한 올 한 올 성가시게 달라붙던 거미줄은 어느새 우리 몸을 실패처럼 휘감은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커피 찌꺼기와 허브로 횃불을 만들어 태우면서 왔기에 거미들의 습격은 받지 않았다.

    “이것도 추가로 솥에 넣고 끓여야겠네.”

    나는 커다란 코코넛을 반으로 잘라 그 안에 거미줄을 모아 놓고 계속 끓이고 있었다.

    한데 모여 부글부글 끓는 거미줄은 차가운 공기에 닿아 단단하게 굳는다.

    -<질 좋은 거미줄> / 재료 / A

    불순물이 전부 타고 남은 순도 높은 거미줄.

    끈적함은 사라졌지만 특유의 탄성과 강도는 아직 남아 있다.

    -특성 ‘압궤’ 사용 가능 (특수)

    나는 코코넛 껍질들을 뒤집어 커다란 고무덩이처럼 된 거미줄 덩어리들을 수거했다.

    “아 참, 저번에 거미에 대해 설명을 하다가 지면이 부족해서 못 한 게 있는데…….”

    “에엑? 그렇게 설명을 많이 했는데 아직 남았어?”

    “어진. 벌레는 거미줄을 조심해야 한다. 설명충…….”

    친구들의 반응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설명을 시작한다.

    “거미는 뎀 생태계에 있어서 개미와 벌, 와두두와 함께 대체 불가능한 4종 중 하나이지.”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쥬딜로페가 손가락을 빨던 것을 멈추고 귀를 쫑긋한다.

    나는 쥬딜로페가 은근슬쩍 집으려는 5번째의 젤리를 빼앗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특히나 거미는 뎀 세계의 생태계 순환과 기능 유지를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해. 대다수 곤충형 몬스터들을 먹이로 삼으며 개체수를 조절하고 이를 통해 산림과 농작물의 병충해를 막지. 거미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2차 대격변과 같은 상황이 조금 더 빨리 왔을지도 몰라. 다들 2차 대격변 때 온 세상의 숲과 호수들이 다 황무지로 변해 버렸던 것 기억하지? 그뿐만이 아니라 거미들은 몸에 꽃가루를 묻히고 엄청난 거리를 돌아다님으로서 식물들의 번식에도 기여하지. 거미들은 대부분 거미줄을 치고 안 움직이거나 땅굴 속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 새끼 거미들은 거미줄을 바람에 날려 보내는 동시에 자기의 몸도 실어 먼 거리를 이동하거든. 또 따로 거미줄로 둥지를 만들지 않는 떠돌이 거미들은 그야말로 방랑자야. 아주 먼 거리를 돌아다니며 먹이활동을 하고 그 도중에 수많은 식물들을 수분시켜. 즉 해충조절, 화분매개, 종자분산에 기여함으로서 이 땅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삼림을 유지시키고 있는…….”

    바로 그때.

    “앗! 어진아! 저기!”

    숲에 자욱하게 끼어 있던 물안개가 바람에 걷히자 덤불 너머로 놀라운 광경이 보인다.

    우리가 현재 서 있던 곳은 이끼와 덤불로 수북하게 뒤덮인 절벽가.

    그리고 그 끝 너머에는 또 하나의 광대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숲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하다.

    위에서 보면 녹색의 초원처럼 보일 정도로 울창하게 퍼진 잎사귀들의 바다.

    그리고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기둥이었다.

    세계수!

    우리는 지금 단일 개체의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윤솔과 드레이크는 입을 딱 벌리고 탄성을 내질렀다.

    “나무 한 그루가 혼자 숲을 이루고 있네.”

    “말 그대로 일인군단(一人軍團)의 규모로군.”

    세계수는 서대륙에 존재하는 가장 큰 나무로 그린헬의 거대한 삼림에 필적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나뭇가지 수와 잎사귀 규모를 자랑한다.

    애초에 서대륙의 절반이 비스듬하게 휘어진 세계수의 줄기 위에 먼지가 쌓여 만들어진 것이니만큼 그 아득한 면적과 부피를 한 눈에 짐작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신화 속 궁전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우뚝 선 메인 줄기, 하늘의 대들보처럼 뻗어나간 수많은 서브 줄기들.

    스스스스스스스……

    바람이 불어와 세계수가 흔들릴 때면 녹색의 바다와 하늘이 출렁거리며 신비로운 물결이 인다.

    이 녹색의 풍랑에 실려 날아가는 수많은 반딧불들과 야광 포자들은 과연 판타지 세계관이구나 하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게끔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띠링!

    <‘그린헬 세계수해(世界樹海)’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영구히 기록됩니다>

    <최초 방문자: 고인물>

    으레 뜨곤 하던 최초 방문자를 알리는 알림음 뒤에 다소 낯선 것이 따라붙었다.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세계수의 뿌리’>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세계수 발견’>

    <히든 퀘스트 수행 제한: ‘2차 대격변에서 기여도 0.1%이상을 세운 자’>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세계수의 뿌리에 돋아난 악성 종양’ 처치>

    <※이 퀘스트는 그린헬 외부로 벗어날 시 자동으로 소멸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히든 퀘스트.

    ‘히든’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퀘스트치고는 꽤나 설명이 친절하다.

    “…….”

    우리는 세계수의 뿌리 부근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계수의 하단 부분을 보기 위해서는 한참 동안 절벽가를 타 내려가야 했다.

    잔가지들만 해도 거의 숲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다가 물안개까지 몇 겹으로 짙게 껴 있었기 때문이다.

    어비스 터미널 때처럼 한참을 밑으로 내려가자 이내 목적지가 보인다.

    세계수의 첫 번째 뿌리.

    산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뿌리 하나가 바다와 지면을 가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퀘스트의 내용을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바다와 숲이 맞닿는 부분의 잔가지 숲에 커다란 구체 하나가 솟구쳐 있는 것이 보인다.

    아주 짙은 녹색.

    이 심록(深綠)의 구체는 나무뿌리인지 넝쿨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복잡하게 뒤덮여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알 위에 힘줄이 덮인 것 같아서 징그러웠다.

    그것들이 가끔 심장 박동에 맞추어 약동하듯 펄떡거리는 바람에 불길함은 더욱 짙어진다.

    드레이크가 화살을 꺼내 구체를 톡톡 두드렸다.

    “이게 그 종양인가?”

    세계수의 뿌리에 기생해 영양분을 빨아먹는 존재.

    이것을 퇴치하는 것이 히든 퀘스트의 오더.

    “일단 한번 시험해 볼까?”

    “깨트려 보자구요!”

    드레이크와 윤솔이 온 힘을 다해 종양을 두드렸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화살과 가장 강력한 주먹으로도 이 종양을 부술 수는 없었다.

    …퍼퍼펑!

    오히려 반탄 데미지 때문에 주변만 초토화되었을 뿐이다.

    “허억… 허억… 이거 잘못하다간 우리가 죽었겠는데?”

    “으으, 반사 데미지가 너무 쎄다. 이걸 무슨 수로 파괴하지?”

    친구들은 난감한 기색. 하지만 나는 그저 비죽 미소 지을 뿐이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이걸 챙겨온 거지.”

    내가 친구들의 앞으로 꺼내 놓은 것은 바로 지금껏 모아온 거미줄 뭉치였다.

    나는 인벤토리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거미줄들을 풀며 종양으로 다가갔다.

    “너희들. 고무줄로 수박 부수는 거 본 적 있어?”

    내 말에 윤솔도 드레이크고 의아한 기색.

    아무래도 조금 더 친절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질문했다.

    “수박에 고무줄 하나를 감으면 어떻게 될까?”

    윤솔과 드레이크는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야 고무줄이 늘어나서 수박에 착 감기겠지?”

    “그럼 고무줄 두 개를 감으면?”

    “으음. 수박 옆구리에 고무줄 두 개가 감기겠지. 벨트를 찬 것처럼 말이야.”

    “그럼 세 개는?”

    “……?”

    “네 개는? 다섯 개는? 여섯 개는? 백 개, 천 개, 만 개는?”

    “……!”

    그러자 윤솔과 드레이크는 뭔가 깨달은 듯하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고 계란이 바위를 깨는 법이다.

    반복적으로 꾸준히만 감는다면 고무줄 역시도 수박을 쪼갤 수 있다.

    “나 이런 거 본 것 같아!”

    윤솔이 재빨리 유튜뷰에 고무줄로 수박 뽀개는 영상을 검색한다.

    그러자 수많은 스트리머들이 수박에 고무줄을 감는 콘텐츠로 방송을 한 흔적이 보인다.

    나는 씩 웃었다.

    “수박 옆구리에 고무줄이 200개 이상 감기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검색해 보라고.”

    나는 말을 마친 뒤 정제를 마쳐 강력한 탄성을 가지게 된 거미줄 고무줄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거대한 종양의 주위를 빙글빙글 돈다.

    …착! …착! …착!

    거대한 종양에 휘감기는 거미줄.

    그것은 강철 와이어만큼이나 질기고 강력할 뿐만 아니라 고무보다도 더한 탄력을 가진다.

    “내가 괜히 점액 범벅이 되어 가면서까지 이것들을 모은 게 아니라니깐.”

    부유섬에서 겪어 봤기에 뼈저리게 알고 있다.

    비록 한 올 한 올은 별 볼일 없는 이 거미줄들이 이렇게 대량으로 모일 경우 얼마나 무시무시해지는지 말이다.

    이윽고, 윤솔과 드레이크, 오즈, 쥬딜로페까지 거미줄을 쥐고 종양의 주위를 빙글빙글 돈다.

    그렇게 몇 백 번 정도 돌았을까.

    종양의 모습은 처음과 많이 달라졌다.

    천천히 허리 부근이 좁아지는 종양.

    맨 처음에 발견했을 때는 0자 모양이었던 종양이 어느새 거미줄들에 의해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 8자 모양에 가깝게 되었다.

    그리고 이내.

    O

    .

    .

    8

    .

    .

    %

    .

    .

    …뿌지지지지지직!

    종양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마치 여드름이 터지듯 윗부분에서 액체들이 울컥울컥 뿜어져 나온다.

    수백 개의 고무줄에 감긴 수박처럼 폭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한 변화였다.

    나는 종양에서 터져 나온 끈적하고 누런 액체를 손가락으로 쓸어 핥아 보았다.

    “……이 맛은!?”

    나는 그것이 세계수의 뿌리에서 뽑혀 올라온 수액임을 직감했다.

    이렇게 꿀처럼 달콤한 맛이 나는 수액은 세계수의 수액뿐이다.

    그것도 방금 뽑혀 나와 아주 싱싱한 생 수액.

    이 악성 종양은 지금껏 세계수의 양분을 가로채고 있었던 것이다.

    윤솔과 드레이크는 비위가 상한다며 먹지 않았지만 쥬딜로페는 꽤나 좋아하는 기색.

    그리고 그때.

    세계수의 뿌리에 기생해 수액을 빨아먹고 있던 존재가 종양 속 배양액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다.

    [WARNING]

    [WARNING]

    [WARNING]

    [WARNING]

    [WARNING]

    [그린헬 ‘세계수해(世界樹海)’의 최종 보스가 몸을 일으킵니다!]

    [심록의 왕이 세계수에서 시선을 거두고 침입자들을 향합니다]

    .

    .

    이 세상 모든 목본(木本)과 초본(草本)의 지배자.

    고정 S+급 몬스터, ‘심록의 브라키오’가 내 앞에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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