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5화 채식주의자 (5)
[오-오오오오!]
거대한 고목(枯木)이 울부짖는다.
겉보기에는 나무 같지만 기실은 오래된 나무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인 정체불명의 생물.
바로 ‘쟈쿰’이다.
놈은 쩍쩍 갈라진 목피 사이로 시뻘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눈앞의 먹잇감을 향해 식욕 가득한 시선을 보낸다.
1차 대격변 이전까지만 해도 이 그린헬 전체를 통틀어 지배하던 쟈쿰인지라 그 시선을 맞받고도 당당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하지만 2차 대격변 이후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온 세상 천지에 범람하던 벌과 개미들의 시체는 토양에 막대한 영양분을 공급했고 이는 식물형 몬스터들의 폭발적인 성장을 야기했다.
쟈쿰은 식물의 외형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본래 악귀나 거인에 더 가까운 몬스터.
상대적으로 2차 대격변으로 인한 반등 수혜를 덜 입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린헬의 토종 보스인 쟈쿰이 제자리 답보를 하고 있는 동안 그 밑에서 근소한 차이로 보스 자리에 앉지 못했던 다른 식물계열 몬스터들에게 기회가 돌아왔다.
수많은 ‘은메달리스트’들이 이제 왕좌를 향해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슈르르륵…!]
쟈쿰의 영역에서 날뛰고 있는 몬스터 하나가 경계음을 내며 전투태세를 취한다.
늙은 마귀굴 게.
밀림에 서식하는 게 중에서도 특히나 덩치가 크고 갑각이 단단한 선주생물이다.
놈들은 기본적으로 쟈쿰을 제외하고는 천적이 없었으며 썩은 고기나 식물의 과육을 먹고 사는 몬스터이니만큼 이번 2차 대격변의 덕을 크게 봤다.
벌과 개미들의 시체를 먹이 삼아, 혹은 벌과 개미들의 시체로 인해 자라난 풍부한 과일들을 먹이 삼아 성장한 이 마귀굴 게들은 전보다 부쩍 더 덩치가 커졌으며 간혹 개체들 중에는 상위종에 필적할 만큼 거대한 덩치와 집게발을 갖게 된 녀석들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중 하나가 쟈쿰의 영역에 침입한 것이다.
영토가 침공당한 데다가 자신이 직접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도망가지 않고 맞서오는 침입자.
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상황에 쟈쿰은 당황하면서도 격노한다.
마치 ‘먹잇감 주제에!’라고 외치는 듯한 기세로.
콰쾅! 우지지지직!
쟈쿰이 네 개나 되는 주먹을 들어 마귀굴 게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전노장(百戰老將), 수많은 도전을 받고 때론 도전을 걸기도 하며 살아온 마귀굴 게의 갑피는 쟈쿰의 주먹조차 단숨에 부수지 못할 정도로 단단하다.
굵은 통짜 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힘도 그보다 더 크고 굵은 마귀굴 게의 오른쪽 집게발보다는 위력이 덜했다.
콰쾅!
집게발에 몸을 찍힌 쟈쿰이 비틀거린다.
쟈쿰은 식물형 몬스터답지 않게 체력이나 재생력이 낮다.
대신 그 부족한 스탯을 힘으로 커버하는 타입이다만… 안타깝게도 그조차 마귀굴 게에게 밀리고 있었다.
[…그윽! …그르르륵! 오오옥!]
체액을 토해 내며 으르렁거리던 쟈쿰은 결국 비장의 수를 꺼내들었다.
우지지지지지지직!
땅거죽 밑에 파묻어둔 무수히 많은 잔뿌리들을 끄집어내 마귀굴 게를 휘감아 버린 것이다.
잔뿌리들의 숫자대로 스탯이 분산되기는 했지만 갑각류형 몬스터를 상대하기에는 이만한 전략이 없다.
마귀굴 게는 쟈쿰의 잔뿌리들에 칭칭 휘감겼다.
잔뿌리들이 마귀굴 게의 외골격을 뚫거나 부수지는 못했지만 관절과 관절의 마디 부분에 칭칭 휘감기는 섬유질들은 이동속도를 거의 0에 가깝게 떨어트리는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이 잔뿌리들을 컨트롤하는 것은 쟈쿰으로서도 도박수이다.
체력이 크게 소모되는 기술일 뿐만 아니라 잔뿌리들이 너무 큰 용적을 차지하게 되어 패턴이 극히 단순화되기 때문이다.
두 거대 몬스터의 덩치 싸움, 힘겨루기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결국.
……쿵!
먼저 두 손을 든 것은 마귀굴 게 쪽이다.
으레 게들이 그렇듯, 위험에 처한 마귀굴 게는 거대한 집게발과 그보다 더 거대한 반대 쪽 집게발을 자의로 떼어 냈다.
그리고 두 손이 땅에 떨어지는 즉시 몸을 둘려 사사삭 도망간다.
쟈쿰은 마귀굴 게를 격퇴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끝까지 추격하지는 않았다.
여실한 증오를 미진한 체력이 미처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쿵! 스슥!…쿵! 스슥! …쿵! 스슥!
쟈쿰은 너덜너덜해진 몸을 질질 끌며 깊은 숲 속,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나타날 때와 비교해 현저히 느려진 이동 속도였다.
“싱겁게 끝났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나와 윤솔 드레이크는 짧게 감상평을 남겼다.
물론 이건 나만의 의견이고, 윤솔과 드레이크는 꽤나 흥미진진했던 모양.
“와아, 결국 쟈쿰이 이겼구나. 역시 대형 몬스터들끼리의 영역싸움은 박진감 넘친다.”
“역시 1차 대격변 전까지만 해도 보스였던 몬스터답군. 앞으로도 계속 보스로 군림하겠어.”
윤솔과 드레이크는 쟈쿰을 상당히 고평가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글쎄, 다음에는 어떨까?”
챔피언의 성공적인 방어전.
쟈쿰은 그린헬 최강 최악의 ‘불가살(不可殺)’로서의 위명을 지켜냈다.
……어디까지나 이번에는 말이다.
다음에는 어떨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마귀굴 게는 패배했지만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게의 특성 상 떨어진 집게발은 다시 자란다.
다만 관절 부분에 휘감긴 넝쿨 때문에 다음 허물을 벗는 것에 성공할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점은… 저 정도 체급의 마귀굴 게가 저놈 하나만은 아닐 것이라는 점.
이 울창한 밀림, 그린헬 곳곳에 저만한 스펙의 몬스터가 또 없을까?
2차 대격변이 일어났으니 플레이어들의 손길이 아직 닿지 않은 곳에는 이제 더욱 더 커다란 몬스터들이 출몰하겠지.
그렇다면 저 만신창이가 된 쟈쿰이 얼마나 오래 그린헬의 터주대감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내가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큭큭큭. ‘그 녀석’이 돌봐 주는 한 계속 보스로 군림할 수 있을 거다. 저 쟈쿰 녀석 말이야.]
내 어깨 위의 오즈가 참견을 한다.
그렇다.
쟈쿰의 뒤를 봐 주는 몬스터가 있다는 것은 나 역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실 그린헬의 보스 쟈쿰은 페이크 보스, 이곳 그린헬의 진짜 보스는 역시 심록의 용군주 브라키오이다.
“네가 아는 건 나도 알아.”
[쿡쿡쿡, 자존심 세우는 건가 인간? 나약하구나. 지금이라도 내게 무릎 꿇고 부탁한다면 ‘그 녀석’의 존재를 알려 줄 수도……]
나는 오즈의 말에 별다른 대꾸 없이 움직였다.
그저 쥬딜로페를 시켜 오즈의 머리통에 나뭇가지 어택을 날리게 했을 뿐.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마귀굴 게랑 쟈쿰이 싸우면서 아이템들이 엄청 떨어졌네.”
둘 중 하나가 죽는 싸움이 아니었던지라 기대했던 좋은 드랍템은 얻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꽤나 많은 부산물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저주받은 통나무, 앙상한 나뭇가지, 넓은 잎사귀, 말라빠진 뿌리, 끈적끈적한 즙, 딱딱한 조각 등등의 잡템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전부 주워 모았다.
드레이크와 윤솔은 그린헬의 자유도를 이용해 잡템들로 무언가를 만들며 장난을 친다.
“쨘. 이것 봐라 솔. 어떤가 나의 솜씨가.”
드레이크는 도토리와 나무 가시, 끈적끈적한 즙 등을 이용해 도토리 목마를 만들었다.
-<‘대충 만든’ 도토리 목마> / 재료 / D
조악한 목마. 애들 장난감 같다.
-민첩 +3
※이 아이템은 그린헬 외부로 나가는 순간 파괴됩니다.
그것을 본 윤솔이 해맑게 웃는다.
“저도 만들어 봤어요.”
윤솔이 내민 것은 솔방울로 만든 눈사람 모양의 인형이다.
-<‘대충 만든’ 솔사람> / 재료 / D
솔방울 두 개를 이어 붙여 만든 조악한 인형. 애들 장난감 같다.
-공격력 +3
※이 아이템은 그린헬 외부로 나가는 순간 파괴됩니다.
드레이크와 윤솔은 서로를 향해 아이템을 보여 주며 꺄르르 웃는다.
그 아기 같은 모습들을 보자 내 입가에도 절로 흐뭇한 아빠 미소가 지어진다.
“얘들아. 내 것도 봐 주겠어?”
나 역시도 친구들에게 공예품을 자랑했다.
-<‘쓸데없이 잘 만든’ 목재 밀로의 비너스> / 재료 / A+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휴먼?
-방어력 +1300
※이 아이템은 그린헬 외부로 나가는 순간 파괴됩니다.
두 팔이 없는 비너스 조각상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
“…….”
윤솔과 드레이크는 내가 만든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도토리 목마와 솔사람을 슬쩍 뒤로 감추었다.
……뭐 아무튼.
우리는 그린헬의 높은 자유도를 즐기면서 계속 밀림 깊숙이 들어간다.
* * *
이윽고. 게임 속에서 밤이 깊었다.
북대륙에 치는 눈보라와 같이, 밀림의 습하고 더운 대기는 계속해서 체력을 갉아먹는다.
숲 깊숙이 들어갈수록 나무들은 점점 커지고 잎사귀들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의 덩치와 흉폭성 역시도 눈에 띄게 증가했고 또 그런 녀석들끼리만 모여 있어서 그런가 사냥이 쉽지 않아 항상 굶주려 있다.
아무리 우리가 레벨이 높다고 해도 이런 상황 속에서 쉬지 않고 진군하는 것은 무리였다.
적절할 때에 쉬고 식료품을 섭취하지 않는다면 가만히 선 채로 리타이어 당할 수 있기에 나는 풀이 별로 없는 바위 위에 자리를 잡은 뒤 유난히 크고 넓은 잎사귀들을 모아 텐트를 쳤다.
그리고 캠핑 온 것처럼 들떠있는 윤솔과 드레이크에게 이 정글에서의 생존 팁을 전수해 주기 시작했다.
“그린헬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맵의 오마쥬 대상이 된 진짜 ‘그린헬’에 대해서 알아야 해.”
그렌헬이란 원래 따로 원작 게임이 존재한다.
그리고 뎀 속의 그린헬은 그와 상당 부분 유사했다.
“먼저 체력과 정신력을 구분하는 것이 좋지.”
이 점은 여느 맵과는 조금 다른 점이다.
체력은 일반적으로 캐릭터의 생명력, 스테미너, 영양, 부상, 질병 등의 상태이상을 뜻한다.
숲에서 사냥하다 보면 얻을 수 있는 썩은 고기, 독버섯, 오염된 물, 각종 질병이나 합병증 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신선한 과일이나 육류, 물 등으로 회복 가능하다.
정신력은 식사의 질에 대한 불만, 무덥고 습한 대기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감소하게 된다.
현실에서도 게임 속에서도 육류를 먹기 힘드니 플레이어는 점점 인내심이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 맵은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
내 말을 들은 윤솔과 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류의 맵에는 이미 익숙하다.
천하의 고정 S+급 몬스터가 사는 곳인데 어련하겠나.
까마득한 심해나 지저로 가라앉을 때, 좁디좁은 동굴을 통과할 때, 드넓은 망망대해 위를 표류하거나 무시무시한 소용돌이 속으로 삼켜지거나…… 우리는 그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극한의 오지를 겪어 봤다.
그린헬은 분명히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에게는 가혹한 환경이었지만 우리들 같이 고인물화 된 플레이어들에게는 글쎄?
“자. 가자고. 내가 이 밀림에서도 알뜰살뜰하게 살아남는 법을 알려 주지.”
잘 찾아보면 의외로 맛있고 영양소도 풍부한 먹거리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것들이 이 울창한 밀림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