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792화 (792/1,000)
  • 792화 채식주의자 (2)

    지금까지의 지구 역사를 24시간으로 친다면 오후 11시 59분 56초에 등장한 인류가 지구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꼴이다.

    -리처드 파워스, 『오버스토리』 中-

    *       *       *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

    .

    나는 로그인을 알리는 환한 빛무리와 함께 게임에 접속했다.

    그러자 역시나 약속시간보다 10분 일찍 와 있는 드레이크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역시 노빠꾸 상남자 게이머로군. 용자의 무덤 올클리어 이후 바로 접속이라니.”

    “바로는 아니지. 일주일 정도는 쉬었으니까.”

    말 그대로다. 나는 용자의 무덤 레이드 이후 일주일 동안을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에 있는 동안 계속해서 게임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했던 점.

    그리고 용자의 무덤이라는 초 거대 던전을 올클리어 한 뒤 곧바로 또다시 대규모 레이드를 기획했다는 점을 본다면 일주일이라는 휴식 시간은 정말로 터무니없이 짧은 것이다.

    “이번 레이드 역시 사이즈가 장난 아닐 거야.”

    메가 급 레이드.

    내가 이번에 노리고 있는 대상 역시도 용자의 무덤 때와 같은 고정 S+급 몬스터이다.

    바로 일곱 용군주 중 하나인 녹색 용, 심록의 군주 브라키오가 그 작업 대상.

    드레이크가 씩 웃었다.

    “이번에는 나도 좀 끼워 달라고. 네가 없는 동안 PVP만 줄창 했더니 실력이 더 좋아진 느낌이야. 발목은 안 잡을 거다.”

    “좋지. 한번 보겠어.”

    드레이크와 잡담을 나누고 있는 사이, 둘 사이에 환한 빛무리가 생기더니 윤솔이 접속했다.

    “어머? 일찍들 왔네? 기껏 5분 일찍 왔더니 말야.”

    “이걸로 모두 모였구만 그래.”

    간만에 원래 하던 3인 팟 레이드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예전에 2차 대격변을 일으키기 위해 찾았던 서대륙 밀림 깊숙한 곳.

    2차대격변의 두 전쟁군주들이 봉인되어 있었던 ‘대군락지대’의 맞은편 ‘그린헬(Green Hell)’.

    이른 바 ‘녹색 지옥’이라 불리는 거대한 오픈필드형 던전이다.

    나는 윤솔을 돌아보며 물었다.

    “예전에 쟈쿰 잡으러 왔을 때 한번 왔었지?”

    “아아 맞아! ‘고대 신앙’ 특전 얻으러 말야!”

    나와 윤솔은 상태창을 열어 호칭을 확인했다.

    ‘저주받은 고목 쟈쿰 벌목자’ (특전: 고대 신앙)

    ↳총 신성력이 20% 증가합니다.

    (※버프로 인한 증가량은 반영되지 않습니다)

    2차 대격변 이전까지만 해도 이 거대한 숲의 보스 몬스터로 군림하고 있었던 쟈쿰을 잡고 얻은 특전이다.

    그리고 윤솔의 몸을 휘감고 있는 나무뿌리 형태의 갑옷 역시도 쟈쿰이 첫 공략 보상으로 떨군 히든 피스.

    -<저주받은 뿌리 목갑(木甲)> / 갑옷 / S

    네 개의 말라비틀어진 뿌리로 만들어진 갑옷.

    한때 고대신으로 숭배 받았던 존재가 남긴 것으로 지금은 모두가 꺼리는 저주받은 물건 취급이다.

    -방어력 15,000

    -특성 ‘만근추’ 사용 가능

    -특성 ‘앙버팀’ 사용 가능

    -특성 ‘압궤’ 사용 가능

    -특성 ‘팔씨름’ 사용 가능

    깡 방어력 만 오천에 근력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네 개의 특성.

    숨을 참았을 시 자기의 몸무게를 근력 스탯에 비례하여 폭발적으로 늘려주는 ‘만근추’ 특성.

    최대 체력을 넘어설 정도의 데미지를 받았을 때 무조건 HP가 1남은 상태로 한 번은 버티게 해 주는 ‘앙버팀’ 특성.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데미지를 최대 두 배까지 늘려 주는 ‘압궤’ 특성.

    비슷한 방어력이나 공격력 수치를 가진 적과 힘겨루기를 할 때 데미지를 최대 두 배까지 늘려 주는 ‘팔씨름’ 특성.

    기생목(寄生木)에서 나온 아이템답게 본인 자체의 능력치는 특별히 높게 설정되어 있지 않지만 숙주의 힘에 따라 그 효과는 천차만별이다.

    윤솔은 이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30만에 육박하는 데미지를 낼 수 있게 되니 힐러라기보다는 근접 딜러라는 포지션이 더욱 걸맞았다.

    드레이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3류 힐러는 아군이 다쳤을 때 치료한다. 2류 힐러는 아군이 다치기 전에 치료한다. 1류 힐러는 아군을 다치게 할 적 자체를 죽여 없애 버린다. 역시 솔, 자네는 1류 힐러일세.”

    “뭐예요, 놀리지 마세요~”

    드레이크의 팔을 가볍게 툭 치는 윤솔이다.

    “워우. 피가 20%나 빠졌는걸.”

    “……솔아. 나에게는 스킨쉽 자제해 줘.”

    드레이크와 나는 윤솔에게서 한 발자국씩 멀어져 걷기로 했다.

    뭐 아무튼.

    우리는 그린헬 심층부로 깊숙하게 진입했다.

    그린헬은 녹색 지옥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빽빽하고 울창한 밀림이었다.

    무더운 대기, 흐르는 땀은 100%에 가까운 습도 때문에 전혀 마르지 않는다.

    마치 찜통 속에서 삶아지고 있는 수육이 된 듯한 기분.

    바닥은 굵고 단단한 뿌리에 뒤덮여 발 내딛기가 힘들었고 허공에는 온통 거미줄과 풀씨 때문에 자꾸만 무언가가 달라붙어 간질거린다.

    간간히 저 높은 잎사귀들 사이로 내리쬐는 태양빛은 실로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확실히 2차 대격변 이후 숲의 위세가 더욱 강해지긴 강해졌군.”

    드레이크의 평가대로였다.

    그린헬은 세계수 한 그루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숲으로 5개 대륙 중에서 가장 거대한 서대륙 면적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2차 대격변 이후 벌과 개미들의 시체를 토양분으로 삼아 자라난 나무들은 숲의 규모를 부쩍부쩍 키워 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린헬 맵을 디자인한 게임 개발자가 꽤나 열렬한 환경운동가이자 채식주의자인 거 알고 있어?”

    “호오. 그런 비화가 있었던가?”

    “나는 몰랐어 어진아.”

    친구들이 관심을 보이니 설명을 할 맛이 나는군.

    나는 간략하게 첨언했다.

    “이 맵을 개발한 개발자는 ‘아무도 나무를 보지 않는 시대’에 대해 늘 우려를 하고 있었지. 지금까지의 지구 역사를 24시간으로 치면 23시간 59분 56초 동안 지구를 지배했던 것은 식물이라 이거야. 인간은 고작 등장한 지 4초 밖에는 되지 않았고. 그런데 인간이 나무를 마구 베고 불태우고 하고 있으니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참 아이러니 했나 봐.”

    “그래서 만든 것이 이 그린헬인가. 어쩐지 돌아다니는 식물 계열 몬스터들이 지나치게 강하게 설정되어 있다 했어.”

    “뭐, 숲 초입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이 세긴 세지. 하지만 숲 안쪽으로 들어가면 좀 약한 몬스터들이 나와.”

    그러자 내 말을 들은 윤솔과 드레이크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진아. 숲 안쪽으로 들어가면 더 강한 몬스터가 나와야 하는 거 아냐?”

    “솔의 말이 맞다 어진. 어째서 안쪽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들이 더 약한 것이지?”

    그들의 의문은 합당했다.

    그린헬 초입에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은 하나하나가 흉악한 생태계에서 단련된 최악의 몬스터들.

    가시넝쿨, 식충식물, 대형 충왕종, 늙은 파충류, 교활한 맹금류, 작지만 맹독을 가진 균류, 그 외에 각종 군락형, 기생형, 폭발형 괴수들이 드글드글하다.

    하나하나가 까다롭고 성가신 개체들이었기에 내심 안쪽에는 얼마나 더 무시무시한 것들이 돌아다닐까 긴장해 있던 차였다.

    그런데 오히려 심층부로 갈수록 몬스터들이 약해진다니?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몬스터가 약해진다고 난이도가 쉬워지는 건 아니지.”

    내 말에 윤솔도 드레이크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다.

    그러나.

    파수병 몬스터들의 끈질긴 추격을 뿌리치고 그린헬 심층부에 진입한 순간, 그들은 내 말 뜻을 비로소 이해한 듯하다.

    -띠링!

    <‘그린헬 심층부’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 고인물>

    과거 쟈쿰을 잡기 위해 방문했었던 곳.

    그보다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2차 대격변 이후 생겨난 것이 분명한 새로운 구역과 룰이 해금된다.

    -띠링!

    <‘그린헬 비건랜드(VeganLand)’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영구히 기록됩니다>

    <최초 방문자: 고인물>

    귓가에 뜨는 아카식 레코드의 알림음 뒤에 새로운 상태창들이 떠올랐다.

    -띠링!

    <‘그린헬 비건랜드(VeganLand)’의 룰이 적용됩니다>

    <심록의 기운이 이방인들의 몸을 훑습니다>

    <몸의 오염된 기운들이 정화됩니다>

    <땅의 오랜 친구들이 가진 의지가 깃듭니다>

    <대자연이 불러일으키는 마나의 흐름에 몸을 맡깁니다>

    <더 이상 피를 가진 존재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도 됩니다>

    <햇살이 몸속에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작은 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거대한 숲의 의지가 함께합니다>

    .

    .

    제일 먼저 상태창을 본 드레이크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다.

    “응? 어엇!? 이, 이게 뭐야!”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전체 스탯이 눈에 띄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띠링!

    <‘그린헬 비건랜드(VeganLand)’의 관리자가 이방인들의 몸을 규제합니다>

    <수치에 따라 스탯 폭이 크게 변화할 수 있습니다>

    윤솔과 드레이크의 표정이 의아함과 황당함으로 물든다.

    “VMI? 그게 뭔가?”

    “BMI는 아는데. VMI라는 용어는 처음 듣는걸.”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VMI는 BMI, 즉 신체질량지수(body mass index)와 비슷한 말이야. 일명 ‘채식질량지수’랄까?”

    그린헬의 룰은 단순하다.

    ‘지금까지 섭취했던 육류의 양만큼 스탯을 너프한다.’

    이것에 대해 알게 된 윤솔과 드레이크는 황당하다는 듯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먹었던 고기가 얼마나 되는지 어떻게 알아?”

    “어진. 너는 지금까지 먹었던 빵의 개수를 기억할 수 있는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나에게 항의를 해 오는 두 친구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개발자가 그리 만들어 놓은 것을.

    나는 채식에 대해 딱히 호불호가 없었기에 그저 무심히 대답할 뿐이다.

    “고정 S+급 몬스터 중에는 사람이 지금까지 인터넷에 쓴 글을 모조리 까발리거나 아니면 남녀가 서로에게 품고 있는 호감도를 분석해 주는 존재들도 있었는데 뭐. 지금까지 먹은 육류가 얼마나 되는지 알려 주는 녀석이 있다고 한들 새삼 이상할 것도 없잖아?”

    나는 이어서 잡지식들을 줄줄이 말해 주었다.

    “인간 수명을 약 80세로 가정할 경우에 일반적인 사람이 평생 먹는 고기의 양은 약 11마리의 소, 27마리의 돼지, 2400마리의 닭, 4500마리의 생선, 80마리의 칠면조, 30마리의 양……. 여기에 토끼와 오리, 거위, 염소, 새우와 오징어 등을 포함하면 섭취한 모든 동물의 개체 수는 평균 7천 마리 정도라네. 뭐 당연히 개인차가 있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이 모든 육류들을 카운팅한 결과, 그린헬에 입장한 플레이어들은 그만큼의 디버프를 짊어지게 된다.

    윤솔과 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겠군. 왜 그린헬 심층부로 갈수록 약한 몬스터들이 나오는 것인지.”

    몬스터들이 약해지는 것 이상으로 우리들 역시 약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녹색 지옥 그린헬의 두 번째 별명.

    일명 ‘디버프의 땅’에 진입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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