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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787화 (787/1,000)
  • 787화 화룡점정(畵龍點睛) (2)

    솔거(率居).

    통일신라 시절의 화가. 황룡사 벽에 그린 소나무 그림이 너무 진짜 같아서 새들이 앉으려다가 부딪쳐 떨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그 외에도 당대에 ‘신의 그림’이라고 칭송받던 관음보살상, 유마거사상 등의 그림이 있다고 하지만 후대에 전해지지는 않는다.

    *       *       *

    “오즈! 쥬딜로페!”

    내가 탑 밖을 향해 외치자 이내 우렁찬 대답이 돌아왔다.

    [하, 하고 있다 인간! 쪼지 마세요 주인님!]

    [어지인~! 후애앵!]

    나는 잽싸게 무너진 외벽을 타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온몸에 물감칠을 한 오즈와 쥬딜로페가 열심히 용자의 무덤 외곽에 도배를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솔과 풀을 가지고 용자의 무덤 외벽에 벽지를 새로 붙이고 있는 작고 꾸준한 두 도배공.

    녀석들이 외벽에 붙이고 있는 벽지들은 다음과 같았다.

    -<솔거의 광기어린 분홍색 도화지> / 재료 / S

    미친 노인 솔거가 평생에 걸쳐 색칠한 종이.

    ##1991-E 205, S 172, L 180, R 237, G 146, U 255의 색 배열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로지 하나의 색으로 빈틈없이 꽉 채워서 다른 색이 들어갈 여지는 전혀 없다.

    -<솔거의 광기 어린 빨간색 도화지> / 재료 / S

    미친 노인 솔거가 평생에 걸쳐 색칠한 종이.

    ##3021-E 0, S 240, L 185, R 248, G 128, U 128의 색 배열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로지 하나의 색으로 빈틈없이 꽉 채워서 다른 색이 들어갈 여지는 전혀 없다.

    -<솔거의 광기 어린 파란색 도화지> / 재료 / S

    미친 노인 솔거가 평생에 걸쳐 색칠한 종이.

    ##4885-E 159, S 212, L 30, R 3, G 4, U 615의 색 배열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로지 하나의 색으로 빈틈없이 꽉 채워서 다른 색이 들어갈 여지는 전혀 없다.

    -<솔거의 광기 어린 검은색 도화지> / 재료 / S

    미친 노인 솔거가 평생에 걸쳐 색칠한 종이.

    ##5968-E 0, S 240, L 30, R 64, G 0, U 0의 색 배열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로지 하나의 색으로 빈틈없이 꽉 채워서 다른 색이 들어갈 여지는 전혀 없다.

    .

    .

    미친 노인 솔거가 평생에 걸쳐 하나의 색으로만 칠해 왔던 도화지들.

    그리고 오즈와 쥬딜로페는 그것들을 벽에 하나하나 꼼꼼히 붙이고 있었다.

    내가 용자의 무덤에 입장하기 전 미리 내려뒀던 오더에 따라.

    [어디 보자. ##5968-E번 검은색은 중앙 기준 좌표값 가로 178881, 세로 122번 벽돌에 붙이고…… ##4885-E번 파란색은 가로 8756, 세로 2081번 벽돌에 붙어리다이고…… ##3021-E번 빨간색은 가로 103483, 세로 23번 벽돌에 붙이고…… ##1991-E번 분홍색은 가로 17881, 세로 19272번 벽돌에…… 에잇! 내가 이딴 단순 노가다 작업을 왜 하고 있어야 하는 거얏!]

    [뿌앵스! 뿌!]

    [아앗! 이 벌레 계집애야! 그 빨간색은 ##3021-E이 아니라 ##3027-E 잖아! 그건 저~ 옆에 있는 벽돌에 붙여야 한다고! 틀리면 그 변태가 길길이 날뛸 거란 말이야! 똑바로 다시 붙여! 아앗, 이미 붙였잖아! 떼! 어어, 찢어진다! 아우! 이거 어쩔 거야! 빈틈이 생겨 버렸잖아! 다 딱딱 자리가 있는 건데 이러면 어떡해! 여긴 뭘로 채우라고!]

    [뿌쁏!]

    [아, 알겠어. 주인님이 물어보면 내가 실수했다고 할게. 그러니까 그 나뭇가지 좀 내려 놔……]

    오즈와 쥬딜로페는 솔거가 평생에 걸쳐 색칠했던 수많은 도화지들을 하나하나 벽에 붙이고 있었다.

    철저하게 계산되고 기획된 배치, 기가 막힐 정도로 딱딱 떨어지는 배열.

    하나의 색으로만 채워진 하나의 도화지는 마치 하나의 픽셀처럼, 도트처럼 쭉 늘어 놓여진다.

    그리고 이내, 셀 수도 없이 많은 양의 이 픽셀들은 용자의 무덤 외벽에 붙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도트 장인. 마치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한 땀 한 땀 픽셀로 찍어내는 그래픽 디자이너처럼.

    솔거가 평생에 걸쳐 색칠해 온 도화지들은 지금 한곳에 모여 실로 거대하고 웅장한 그림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그림 속에 담겨 있는 모습은 바로 아스모데우스, 에스더였다!

    거대한 벽화 속의 아스모데우스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녀의 품에는 어린 시절의 솔거가 안겨 있다.

    나는 장장 수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의 이 벽화를 향해 찬사를 보냈다.

    “솔거 씨가 중얼거리던 도트의 색상값과 배치좌표를 하나하나 다 외운 보람이 있군.”

    뭐 대부분은 오즈와 쥬딜로페에게 암기하도록 시킨 것이지만 말이다.

    그때.

    나는 하늘에 찍힌 한 점을 보았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검은 도트 하나.

    아스모데우스!

    그녀는 지금 용자의 무덤의 외벽을 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벽화를 바라보던 아스모데우스의 선홍색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이렇게 대단한 색욕은 처음이로구나.]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가 작게 새어나온다.

    [천하의 나조차도 감당이 안 될 정도로다.]

    그리고 그녀의 두 볼 위로 나뉘어 흐르는 물방울이 하나, 둘, 셋…….

    이윽고, 아스모데우스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용자의 무덤 외벽으로 향했다.

    그리고 움직이던 그녀의 몸에는 점점 더 속도가 붙는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그리고 그려왔던 얼굴.

    정인(情人)의 그리운 얼굴을 향해 날아가는 여자의 표정이란.

    [……보고 싶었다.]

    이윽고, 두 팔을 활짝 벌린 아스모데우스가 벽화 앞까지 날아들었다.

    공교롭게도, 그 부분은 마침 오즈와 쥬딜로페가 실수하는 바람에 칠해져 있지 않았던 곳.

    바로 아스모데우스의 눈동자 부분이 있는 곳이었다.

    …퍽!

    아스모데우스는 넋을 잃고 날아오던 중 용자의 무덤 벽에 부딪쳤다.

    어찌나 세게 부딪쳤는지 그녀의 몸에서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왔을 정도였다.

    주르륵……

    하얗게 텅 비어 있던 벽화의 눈동자에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생겼다.

    그리고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주르륵 미끄러져 내린다.

    아래로. 아래로.

    한 방울의 눈물이 되어 떨어져 내리는 아스모데우스.

    나는 그것을 보며 생각했다.

    “……흠. 역시 인공지능은 인공지능일 뿐인가.”

    하지만 아스모데우스가 보여 주었던 정밀하고 정교한 패턴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녀가 그림을 실물로 착각해 벽을 들이받는 실수를 저지를 것 같지는 않다.

    이 경우에는 사랑이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고 하는 게 더욱 적절할지도.

    ……뭐 아무튼.

    아스모데우스가 용자의 무덤 외벽을 들이받고 떨어지자마자 내 귀에 예상했던 대로의 알림음이 떠오른다.

    -띠링!

    <용자궪 무궪 1궪7층 외벽 궩궪뷁궭훑>

    <시스템 이상이 감지 되었습니다>

    <오류코드 #127306219065899902……‘용자의 무덤’>

    <긴급 디버깅(debugging) 시스템 가동>

    <룰북(rule book)에 의거해 ‘용자의 무덤’의 히든 룰을 발굴합니다>

    <적절한 규칙 채굴 중……#107층 #외벽 #손상>

    <패치가 완료되었습니다!>

    <용자의 무덤 속에 등장하는 몬스터에 대한 특례 1-1) 용자의 무덤 속 몬스터는 호칭이나 아이템을 드랍하지 아니한다…… 1-2) 1-1 룰의 경우에 108층은 해당치 아니한다……  2) 용자의 무덤 속 몬스터는 해당 층 안에서만 이동 가능하다…… 3-1) 만약 용자의 무덤 속 몬스터가 해당 층을 벗어날 경우 체력의 50%를 잃는다…… 3-2) 만약 용자의 무덤 속 몬스터가 해당 층을 넘어 탑 자체를 벗어날 경우 체력의 100%를 잃는다…… 3-3) 이 경우 탑 자체를 벗어난 것에 대한 판정은 몬스터의 육체가 탑 외벽에 닿았을 경우로 한정……>

    .

    .

    107층의 주인 히드라 빅헤드가 소멸한 것과 같은 이치다.

    용자의 무덤 외벽에 닿은 아스모데우스는 예외 없이 100%의 체력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모든 힘을 잃어버린 그녀는 외벽에 부딪쳐 온몸이 으스러진 채로 108층 아래 지상을 향해 떨어지는 최후를 맞게 되었다.

    “…….”

    나는 별똥별처럼 떨어져 내리는 아스모데우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회귀 전 아스모데우스가 용자의 무덤 108층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왔었던 때가 딱 한 번 있었다.

    바로 화이트워싱 마을의 솔거가 사망했을 때이다.

    높은 탑 위에 평생을 갇혀 지냈던 솔거가 노환으로 죽자 화이트워싱 마을에서는 조촐한 장례식을 열어주었고 그곳에 초대받지 않은 조문객이 참석한 것이다.

    당시 아스모데우스는 솔거의 사망을 확인, 그가 평생토록 탑 안에서 자신을 그리워하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눈이 뒤집혔었다.

    격분한 그녀가 온 힘을 쏟아내 날뛰는 통에 북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이 전부 몰살당했고 튜더와 비앙카 등의 월드클래스급 하이랭커들이 총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폭주를 막을 수 없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힘. 고정 S+급 몬스터 둘을 단신으로 꺾어 버렸던 아스모데우스의 진짜 힘이 여지없이 드러나던 순간이었다.

    결국 아스모데우스는 화이트워싱 마을을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여 블랙아웃 마을로 만들어 버렸고 그 뒤로부터 자그마치 3년 동안 북대륙에는 검은 밤만이 지속되었다.

    ‘독거노인 솔거의 장례식’이라는, 참석만 하면 클리어인 하급 일일퀘스트를 무시하던 수많은 플레이어들은 영문 모를 고정 S+급 몬스터의 출현에 벌벌 떨었고 왜 아스모데우스가 이곳에 출현했는지는 결국 영원한 난제이자 미스터리로 남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떨어지고 있는 아스모데우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눈물과 미소.

    누가 저 존재를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라고 말할 것인가.

    그녀는 그저 사랑에 빠진 평범한 여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쓸쓸하고도 무거운 심경으로 발걸음을 돌려 1층으로 향했다.

    옆에서 홍영화가 슬프다며 찡찡거리지만 않아도 좀 더 분위기가 살 텐데.

    [너무… 너무 슬퍼요 뭔가.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사연이에요.”

    나는 솔거와 있었던 일들을 짤막짤막하게, 그러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일목요연하게 편집한 동영상들을 띄웠다.

    홍영화와 시청자들은 내가 편집한 솔거 에피소드를 동영상으로 실시간 감상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으아아아아아앙! 넘모 슬프잖아!]

    대성통곡. 심지어 홍영화는 나를 매도하기까지 한다.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사냥 도구로 쓰다니! 비인간적이에요! 냉혈한! 짐승! 변태! 노출광!]

    “노출이랑은 상관없잖아요. 그리고 이건 패션이라니깐. 놈코어 미니멀리즘 에코 프랜들리 패션.”

    그리고 애초에 홍영화랑 이렇게 툭닥거릴 시간이 없다.

    아직 레이드는 끝나지 않았다.

    나는 아이템 하나를 손아귀에 꽉 말아 쥔 채로 재빨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화가 솔거의 펜던트> / 목걸이 / S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탑 꼭대기에 홀로 갇힌 채 평생을 보냈다.

    그가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 남은 인생 전부를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은 단 하룻밤의 사랑이었다.

    -특성 ‘앙버팀’ 사용 가능 (특수)

    곧 체력을 전부 잃어버리게 될 아스모데우스.

    그녀에게 꼭 건네줘야 할 물건을 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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