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6화 화룡점정(畵龍點睛) (1)
“그렇게 열심히 색을 빨아들여 모으는 이유가 뭘까~?”
[…….]
“혹시 누구 줄 사람 있는 거 아니지~?”
[…….]
“이야~ 누군진 몰라도 좋겠다~ 보니까 꽤 정성들여 모으는 것 같은데~ 의리로 주는 것도 아닐 거고~”
나는 마치 발렌타인데이에 남자친구를 위해 초콜릿을 만드는 소녀를 놀리듯 아스모데우스를 떠봤다.
이윽고, 아스모데우스가 분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감히 나를 능멸하려 들다니!]
“어허, 명색이 색의 악마가 이런 색드립에 정색을 하면 쓰나.”
이건 뭐 너무 수위가 낮아서 색드립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그냥 좋아하는 사람 있는지 없는지 떠보는 건데.
하지만 의외로 아스모데우스는 이런 낮은 수위에 약한지 펄펄 뛰기 시작했다.
[닥쳐라! 나는 좋아하는 사람 없다!]
“남한테는 뭐 무슨 궁합이니 오늘 밤 가능성이니 수위 높은 드립 엄청 쳐 놓고선 자기가 당할 때는 엄청 정색하시네요.”
[내, 내가 언제!]
원래 섹드립 잘 치는 애는 정작 진짜로 진지한 분위기에 약한 법.
나는 아스모데우스를 압박해 나갔다.
일전에 내가 받았던 질문 공세를 그대로 되갚아 줄 차례였다.
“걔지?”
[무, 무슨 소리를!]
“에이~ 걔 맞잖아~”
[걔가 누구냐!? 나는 모른다!]
“걔 어디가 좋아?”
[좋다고 한 적 없다!]
“아무래도 순수한 성격이려나? 귀여운 연하이기도 하고~”
[은근슬쩍 나이 언급하면서 범위 좁히지 마라! 어디서 유도신문을……!]
“아무것도 모르는 애 하나하나 알려 주면서 키워 가는 재미가 있지 또~”
[닥쳐라! 이 천박한 것이 감히 나를 넘겨짚으려 하다니!]
넘겨짚는다니? 어디서 그런 야한 말을! ……아, 색욕의 악마이니 당연한가?
하지만 내가 대충 때려 맞춘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나는 상대를 정확히 특정하고 있으니까.
“이봐 ‘색을 빠는 에스더’ 씨. 그 상대가 화이트워싱 마을의 솔거 맞지?”
[……!]
내가 날린 일침은 아스마다이보다도 날카로운 창이 되어 아스모데우스의 심장을 관통한다.
쿵-
이것은 아스모데우스의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
[……무슨 소리냐? 나는 모, 모르는 이름이다만?]
“모모르는?”
[모, 모르는! 모르는 이름이라고!]
“모모르느~은?”
나는 얄밉게 깐족거리며 깎단을 놀린다.
그것은 마치 짝사랑에 빠진 소녀를 괴롭히는 동네 짓궂은…….
[똥양아치네요. 미연시 게임에 등장하는 조연 1, 2 정도의 역할]
홍영화가 왠지 싸늘해진 어조로 내게 말했다.
“뭔가 적대감이 느껴지는데 기분 탓인가?”
[아뇨. 몬스터는 몬스터 편, 플레이어는 플레이어 편인데 그럴 리가요.]
“그 전에 여자는 여자 편이다, 라는 느낌인데요.”
[기분 탓이에요. 저질.]
나는 홍영화를 잠시 채팅금지 시켜 놓을까 하다가 관뒀다.
왠지 이 여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잠깐 든다.
“홍영화 씨.”
[……네?]
새초롬한 표정으로 내 시선을 피하는 홍영화.
나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혹시 나 좋아해요?”
그러자 홍영화가 순간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고, 고소할 거야!]
갑자기?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도깨비불.
나는 필요 이상으로 격하게 반응하는 그녀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그거 아니라면 나 좀 도와줘요.”
[경찰 불러! 시청자님들 신고 좀 해 주세요! 에? 뭐라구요? 혼인신고? 하! 나 증말 기막히……네? 아차, 방금 뭐라고 하셨죠 고인물 씨?]
“나 좀 도와달라고요.”
내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홍영화의 표정도 이내 진지해졌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무래도 아스모데우스는 님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봐.”
[……그, 그, 그것 참 큰 오판이군요.]
“그래. 그러니까 그 오판을 한번 이용해 보자고.”
나는 홍영화의 귀에 무언가를 소근거렸다.
홍영화는 빨개진 얼굴로도 곧잘 끄덕거리며 추임새를 넣었다.
[아하. 오. 흐으음. 그게 될까요?]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죠. 어차피 도깨비불 상태에서는 죽을 일도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인물 씨에게 도움이 된다면야!]
이윽고, 홍영화는 결심이라도 한 양 내 반대편으로 뽈뽈뽈 이동한다.
워낙 느려서 멀어지는 속도도 느렸지만 말이다.
뭐 아무튼.
나는 비로소 아스모데우스와 1:1로 마주보게 되었다.
“솔거를 위해 색을 모으고 있지? 나중에 만나게 되면 보여 주려고 말이야.”
[닥쳐라! 그런 일 없다!]
“그렇다면 왜 그리 색을 빨아들이는 거지? 딱히 방출하지도 않으면서.”
말 그대로다.
아스모데우스가 색을 빨아먹기만 할 뿐 방출을 하지 않으니 체감 난이도가 50% 정도 줄어들었다.
원래 설정 상 그녀의 전투력은 레비아탄과 무투룡을 동시에 거꾸러트릴 정도.
그러니 나와 이렇게 팽팽하게 맞붙고 있다는 것은 아스모데우스가 현재 꽤 많은 패널티를 감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근데 그래도 무지 세잖아. 저걸 어떻게 쓰러트린담…….’
내가 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스모데우스의 입이 열렸다.
[나를 버린 놈 따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오잉? 이건 또 뭔 소리래?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자 아스모데우스가 한 번 더 외쳤다.
[나를 까맣게 잊어버린 놈 따위에게 내가 왜 색을 주겠느냐! 어림도 없는 소리!]
“까맣게 잊어버렸다기보다는 하얗게 잊어버린 게 아닐까요? 거기는 하얀 마을이니까.”
[닥쳐라 이 백치 놈아! 지금 그딴 게 중요하냐!]
나는 아스모데우스의 살벌한 기세에 눌려 입을 조개처럼 합 다물었다.
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는 씩씩거린다.
벌겋게 물든 얼굴, 벌써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색욕의 화신, 색정의 악마는 간 곳이 없다.
이곳에는 그저 사랑에 빠진 순수한 소녀 한 명만이 서 있을 뿐.
아스모데우스는 말했다.
[그놈은 분명 나를 다시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내 초상화를 그려서 들고 오겠다고도 했었는데…….]
“…….”
[하지만 그놈은 그날 이후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지. 그저 가벼운 상대였던 거야. 하룻밤 어치의 색욕만을 충족시킬.]
마치 어린아이 같은 태도였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보면 그 뒤로 수도원을 불태우러 찾아온 마을 사람들의 태도로 솔거의 상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을 텐데.
‘뭐, 그날 밤 아스모데우스를 찾아온 마을 사람들이 뭐라고 거짓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날 이후로 솔거와 아스모데우스는 서로 떨어져 평생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서로의 상태조차 모른 채로.
아스모데우스는 촉촉해진 눈을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니 이따위 질 낮은 거짓말로 나를 뒤흔들지 말아라.]
흐음. 색욕의 화신이 색정에 관련된 것으로 빈틈을 보일 줄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랑에 눈 먼 자는 쉽게 속기 마련이지. 저기 저 여자처럼 말이야.”
내가 손가락을 뻗자 아스모데우스는 드물게도 내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나의 반대편 정면에는 도깨비불 모드인 홍영화가 불안한 표정으로 둥실둥실 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저 여자, 나를 너무 좋아해서 탈이야. 귀찮아 죽겠다고. 나는 그냥 한번 놀아 주었을 뿐인데 사랑이니 뭐니 구질구질하게…….”
그러자 내 말을 들은 아스모데우스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튄다.
동시에 홍영화를 향해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그녀, 아마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리라.
뿌득-
홍영화는 내 대사를 듣고 이를 한번 갈았다.
그리고는 뚝뚝 끊어지는 대사로 말했다.
[와. 정말. 진짜. 너무 좋아. 고인물 씨. 발.]
“……발 뭐요?”
[발 조심하라고요. 발. 아까 공격에 맞았던 발.]
그러자 아스모데우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 홍영화에게 말을 걸었다.
[호오. 저놈의 대체 어떤 점이 좋은 게냐?]
[……전부 다요.]
[저 천박한 덜렁덜렁도?]
[……으으으, 네.]
그러자 아스모데우스는 진심으로 홍영화가 가엾다는 듯 측은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면 너는 내 심경을 이해할 수 있겠구나. 어쩌다 저따위 녀석을 좋아하게 되어 버린 것일까 싶고.]
[……어, 그, 뭐냐. 그렇게까지는 잘.]
[이해한다. 네 마음. 점점 커져 가는 그 마음을 혼자서는 감당하기 버겁지. 108개의 번뇌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무거운 마음이야.]
[아뇨. 뭐, 음, 너무 나가는 것 같은데요? 우리는 그냥 아직 서로 알아 가는 단계고……]
[핥짝, 음. 이 맛은 거짓말을 하는 맛이구나.]
[으, 으악! 놔주세요!]
나는 홍영화와 그런 홍영화를 핥고 있는 아스모데우스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뭐 하는 거야.’
적당히 휘말리는 척만 하랬지 진짜 휘말리면 어떻게 한담.
……뭐 아무튼.
홍영화가 시선을 끌어 줬으니 됐다.
아스모데우스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이 보는 캠의 각도도 홍영화를 향하고 있다.
즉 나는 완벽한 사각지대에 놓였단 말씀.
…철커덕!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마동왕의 전매특허인 마몬의 건틀릿을 착용한다.
그리고 누가 볼 새라, 잽싸게 주먹으로 지면을 강타했다.
콰콰콰콰쾅!
난데없는 폭음에 아스모데우스와 홍영화, 시청자들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지만 이미 나는 휘몰아치는 토사와 붕괴물의 잔해에 가려 보이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히드라의 아홉 번째 머리 ‘빅헤드’ 때문에 약해져 있던 핵심 돌기둥에 금이 간다.
…쿠르르릉!
용자의 탑 108층의 끄트머리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파아아앗-
저 멀리서 강렬한 태양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바깥의 공기가 내부에 고여 있던 먼지와 돌 부스러기들을 싹 쓸어내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목놓아 외쳤다.
“쥬딜로페! 오즈!”
* * *
[……쳇. 미꾸라지 같은 녀석. 도망쳤나?]
아스모데우스는 흙먼지를 걷어내며 이를 갈았다.
간만에 쳐들어온 침입자인지라 약간은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놈은 절대 꺼내서는 안 될 이름으로 자신을 도발했다.
이 끓어오르는 격정과 분노는 놈을 찢어 죽이고 모든 색을 남김없이 빨아들여야만 해소될 것 같았다.
[그놈 때문에 괜히 애써 잊어버렸던 얼굴만 떠올랐잖은가! 이 분노를 어이한단 말이냐!]
한참이나 씩씩거리던 아스모데우스는 이내 심호흡을 거듭해 몸의 열기를 추스렸다.
[……진정하자. 분노에 잡아먹힐 수는 없지. 그렇다면 거인국에 처박혀 있을 ‘그놈’과 다를 바가 없게 되지 않는가.]
이내, 아스모데우스는 차갑게 가라앉은 아스마다이의 창날을 거꾸로 쥔 채 자리를 박찼다.
여섯 장의 날개가 그녀의 몸을 허공으로 띄운다.
용자의 무덤의 탑 외벽에만 닿지 않으면 얼마든지 바깥으로도 나갈 수 있다.
그녀의 시선이 탑의 귀퉁이, 무너져 내린 구멍을 향했다.
[구멍을 찾아 도망치는 꼴이 역겨웁구나. 수컷들이란, 색욕에 이끌려 찾아왔다가도 결국엔 이렇게 배신하고 도망쳐 버리지.]
아스모데우스는 창을 꼬나쥐고 탑 밖의 하늘로 날아올랐다.
솔거와의 이별 후 처음 나오는 바깥이었다.
휘이이이잉-
찬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때린다.
그리고 그 순간.
[……!]
벼락과도 같은 충격이 아스모데우스의 뇌리를 때렸다.
그것은 어떠한 외부로부터의 공격이나 자연재해 때문이 아니었다.
아스모데우스 스스로가 그렇게 느낀 것이다.
무려 고정 S+급 몬스터씩이나 되는 그녀를 상공에 얼어붙게 만든 탑 밖의 풍경.
……그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