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785화 (785/1,000)
  • 785화 팜므파탈(Femme fatale) (4)

    이윽고, 난이도 극악의 미연시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소녀 연예 시뮬레이션, 가상의 미소녀가 던지는 질문에 적절한 선택지를 골라 대답을 해 주며 호감도를 쌓아 연인관계로 발전시켜 나가는 게임.

    반대로 적절한 대답을 고르지 못하면 호감도가 떨어져 연애에 실패하게 된다.

    “지금부터 아스모데우스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HP가 %단위로 깎여나가 죽게 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 혹은 남자의 변덕스러운 심리에 그때그때 잘 대응하지 않으면 연애는 요원한 일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극악의 공격패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이 공격에는 앙버팀도, 여벌의 심장도 소용이 없다.

    틀리면 죽음뿐.

    그러니 그저 잘 대답하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띠링!

    이내 아스모데우스가 내 눈앞에 몇 가지의 상태창을 띄워 왔다.

    Q. 오빠 나 이전에 몇 명이랑 사귀어 봤어? 내가 몇 번째 여자야? 솔직하게.

    <1. 0명>

    <2. 1명>

    <3. 2명>

    <4. 3명>

    <5. 4명>

    .

    .

    <106.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미래를 대처할 수 있다지만 서로를 만나기 전 ‘대과거’에 존재하는 연애경험들은 두 사람이 필수적으로 알아야만 하는 과거가 아니……>

    <107. A와 B가 만난다면 그 순간부터 C라는 새로운 개념이 태어난 거야. C는 이제 막 1살이겠지? 우리가 만난 시점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거니 그 이전의 경험들을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108. 기억이 안 나. 너 이전에 사귀었던 것들은 다 애들 장난 같을 정도로 지금 널 사랑해>

    타임어택이 시작되었다.

    제한 시간 안에 이 108개의 선택지 중 올바른 답을 골라내지 못한다면 내 HP의 1%가 바로 깎여나간다.

    “……빡세군.”

    나는 집단지성에 의한 텍스트로만 알던 것을 직접 눈앞으로 보게 되자 약간 당황했다.

    그래서일까? 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말았다.

    “대충 4번이 적당하려나? 아니면 108번?”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옆에 있던 홍영화가 답답하다는 듯 대신 답을 골라 주었다.

    [어휴 이 쑥맥! 당연히 108번을 골라야죠! 여자 맘을 1도 모르네!]

    나는 엉겁결에 홍영화의 말대로 108번을 눌렀다.

    ……그러자.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분노로 바뀐다.

    A. 아니 그래서 몇 명이냐구. 굳이 대답 회피해 가면서 말 돌리는 거 보니까 수상한데? 왜? 엄청 많이 만나 봤나 봐? 나랑 헤어져도 다음 여자한테 또 이 말 하겠네? 그럼 지금 우리 연애도 나중 가면 애들 장난이 되는 건가? 나는 기억도 안 나는 사람이 되는 거고? 그리고 은근슬쩍 대답 안 하고 넘어가려는 게 너무 젠틀하고 능숙한데? 이런 질문 받았던 경험이 많은가 봐? 이거 완전 선수네!

    -띠링!

    <아스모데우스와의 호감도가 -1% 하락합니다>

    .

    .

    열받네. 아니 킹받네.

    이렇게 해서 떨어진 1%의 HP는 회복도 잘 안 된단 말이다.

    지나간 전여친이나 전남친을 다시 잡기 어려운 것처럼!

    내가 옆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자 홍영화가 주눅 든 태도로 중얼거렸다.

    [……아, 아니.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봐도 모른다잖아요. 쨰송해요오-]

    이윽고, 아스모데우스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Q. 누나 프로필 사진이랑은 좀 다르게 생기신 것 같은데요? ㅎㅎ;;

    그러자 홍영화가 괜시리 뜨끔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왜! 뭐가! 뭐 어떻다는 건데! 무슨 대답을 원해 이 자식아!]

    “진정하세요. 선택지 뜨잖아요.”

    어떤 대답을 골라야 할까? 나는 침착하게 선택지를 살폈다.

    <1. 아하~ 실물보다 예쁘다는 거지?>

    <2. 요즘 포토샵이 잘 되어 있어서ㅎㅎ>

    <3. 내가 원래 조명빨이랑 각도빨을 좀 심하게 받아>

    <4. 어쩌라구 X새야>

    <5. 내가 원래 셀기꾼 소리 많이 들어ㅋㅋ>

    .

    .

    <106.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107. 이게 좀 옛날 사진이라……>

    <108. 렌즈 화각에 따라 얼굴이 다르게 찍히기 때문이지. 인간의 눈이나 카메라의 렌즈로 타인의 얼굴을 정확히 보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렌즈는 화각과 mm스펙에 따라서 왜곡현상이 심해질 뿐만 아니라 빛의 각도의 영향도 많이 받거든. 물론 인간의 눈 역시 타인의 얼굴 전체를 한 번에 바라볼 수 없기에 네가 지금 직접 육안으로 보고 있는 내 얼굴 역시도 정확한 나의 얼굴이 아니야. 그러니 카메라렌즈로 촬영한 나의 프로필 사진과 너의 육안으로 관측한 내 얼굴이 상이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오히려 표준줌렌즈로 촬영한 내 프로필 사진 쪽이 네가 육안으로 본 내 얼굴보다 조금 더 내 실제 얼굴에 가까울 수 있다는 얘기지……

    옆에 있던 홍영화가 빽 소리쳤다.

    [4달라! 아니 4번! 4번!]

    “4번은 너무 좀 그렇고. 1번쯤 합시다.”

    [4번!]

    “어허. 그러면 2번쯤 하죠.”

    [4번!]

    무슨 야인시대의 김두한도 아니고…….

    나는 감정에 치우쳐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홍영화를 대신해 고민했다.

    “1번은 적당히 센스 있게 넘어가는 분위기지만 남자가 진짜 황당해서 물어본 것일 경우에는 오히려 더욱 황당하게 될 수도 있고. 2번. 3번은 조금 자신 없어 보이고. 4번은 그냥 대놓고 맞짱 함 뜨자는 거고…… 108번은 너무 설명충인데.”

    뭐 하나 마음에 드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시간만 흘러간다.

    1초가 촉박한 상황 속에서, 나는 1번을 골랐다.

    그러자.

    A. …….

    -띠링!

    <아스모데우스와의 호감도가 -1% 하락합니다>

    .

    .

    “무슨 말이라도 좀 해라 이 새끼야!”

    남자도 남자의 마음을 모른다.

    어쩌면 그냥 타인의 마음 자체가 알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이렇게 해서 또다시 HP의 1%를 잃게 되었다.

    ‘……침착하자.’

    나는 눈을 감고 회귀 전 고인물들이 무수한 희생을 토대로 쌓아왔던 데이터를 떠올렸다.

    실전으로는 처음 겪어 보는 상황이라 잠시 당황했을 뿐, 이윽고 서서히 감이 잡힌다.

    “좋아. 이제부터는 단 1%의 HP도 내주지 않는다.”

    나는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아스모데우스의 질문공세에 하나하나 답변해 나갔다.

    Q. 지금까지 연애 몇 번 해 보셨어요?

    A. 두세 번 정도요. 한번 만나면 오래 만나는 스타일이라서요.

    Q. 부모님은 어떤 일 하세요?

    A. 그냥 평범하신 회사원, 주부세요.

    Q. 이렇게 괜찮으신 분인데 왜 애인이 없으세요?

    A. 오늘 여기 나오려고 그랬나 봐요(웃음)

    Q. 소개팅 경험이 많이 있으세요?

    A. 아뇨. 많지는 않은데 이번에는 우연히 시간이 잘 맞아서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오늘 ㅇㅇ씨를 보니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한 치의 밀림도 없는 질의응답 공방전.

    가면 갈수록 아스모데우스의 질문과 반응도 무시무시해진다.

    -지금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나 이러려고 만나?

    -뭐가 미안한데?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나 집에 갈래.

    -화났어?

    -것 봐 화난 거 맞네. 왜 아닌척해?

    -나는 화 안 났는데?

    -일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지?

    -솔직하게 말해.

    -또 뭐? 또. 또. 또.

    -나 살찌지 않았어?

    -그런 걸 왜 사?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준비했다는 게 이거야?

    -이거 하나 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그 자식 이야기를 왜 꺼내 여기서?

    -내 이럴 줄 알았다.

    -핸드폰 좀 보여 줘.

    -네가 그렇지 뭐.

    -변했네.

    -너 왜 자꾸 지각하냐?

    -누가 그렇게 빨리 나오래?

    -관리 좀 해.

    -외롭게 만든 사람 책임 아니야?

    -듣고 있어?

    -뭐라고 말 좀 해.

    -나 뭐 바뀐 거 없어?

    -네가 뭘 그리 잘났는데?

    -됐어, 이 얘기 그만하자.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데?

    -결론만 얘기하자.

    -그러는 너는?

    -스케쥴 안 짜 왔어?

    -내일 무슨 날인지 알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어제가 무슨 날이었는지 알아?

    -내가 이쁜 거 봐뒀는데 보러가자.

    -(두리번두리번)내가 이런 걸 어떻게 해?

    -좋아?

    -좋았어?

    -좋댄다.

    -그래서, 걔야 나야?

    -다 봤어. 가져와.

    -데려다줘.

    -그 친구들 만나지 마.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남자가 쪼잔하게.

    -나라서 너 만나준다.

    -솔직히 나는 개념 있는 편이지.

    -뭐 먹고 싶냐고? 아무거나.

    -이벤트 뭐 없어?

    -연락하지 마.

    -연락하지 말랬다고 진짜 안 해?

    -핸드폰 왜 꺼놔?

    -이거 비밀번호 뭐야.

    -사 주고나 말해~

    -얘기 좀 해.

    -얘 번호 지우고 차단해.

    -ㅇㅇ한테 들었어. 어젯밤에 어디 있었어?

    -그딴 거 살 돈 있으면 나한테 뭐라도 더 해 줘라.

    -나한테 잘해.

    -이해가 안 돼.

    -나 원래 그래~

    -요즘 아무도 안 그래.

    -그럼 걔 만나든가.

    -놔. 말도 하기 싫으니까.

    -난 엄마랑 같이 살 거야.

    -내가 걔보다 못한 게 뭔데?

    -너 변태야?

    -내가 쉬워 보여?

    -너네 부모님은 왜 그러냐?

    -중요한 건 팩트가 아니라 내 기분이지.

    -웃기고 있네.

    -그 얘기 한번만 더 꺼내면 나 너 다신 안 본다?

    -……지금 욕했어?

    .

    .

    남녀를 불문하고 치명적인 멘트들이 이어진다.

    나는 눈 깜짝 할 사이에 피로도가 쌓이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난다긴다 하는 공격대들이 죄다 박살난 이유가 있네.’

    초반부에 ‘궁합’ 특성에 이어 이 ‘여심남심’ 특성에 피격당한다면 모든 체력을 잃고 정신이 혼미해져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회귀 전 미리 공부해 두었던 모범답안들을 잘 골랐기에 체력을 상당량 보존한 상태로 아스모데우스의 미연시 패턴을 돌파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허억, 허억.]

    나도 아스모데우스도 땀에 젖은 상태로 서로를 노려본다.

    서로 간의 맹렬한 공방전이 지나간 지금, 아주 약간의 전우애 같은 것이 그녀와 나 사이에 싹튼다.

    하지만 결국 플레이어는 플레이어, 몬스터는 몬스터인 법!

    나는 또다시 깎단을 움켜쥔 채 아스모데우스의 아스마다이에 맞서 싸운다.

    …챙!

    냉병기가 내뱉는 뜨거운 비명.

    깎단을 X자로 교체해 방어태세에 들어간 나에게 아스모데우스의 손길이 와 닿는다.

    퍼억!

    또다시 주변의 색을 뭉텅이로 빼앗아 가는 아스모데우스.

    ……그 순간.

    “!”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기묘한 위화감이 108층에 맴돈다.

    아스모데우스는 아까부터 색을 빼앗기만 하지 방출하지 않고 있었다.

    색을 빼앗긴 곳은 가벼워지고 색이 주입된 곳이 무거워진다면 이 둘을 적절히 섞어 써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초반부 내 다리를 잠깐 더듬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전혀 색 주입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왜 아스모데우스는 색을 빨아먹기만 하고 뱉지 않는가?

    왜 힘의 50%만을 사용해 나를 상대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연시 질문에 답하면서도 계속 그것을 고민했다.

    ……그리고 이내, 나는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색(色)을 빼앗는 건 몰라도…… 주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는 모양이지?”

    내 일침에 찔린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진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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