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782화 (782/1,000)
  • 782화 팜므파탈(Femme fatale) (1)

    용자의 무덤.

    총 108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던전.

    ‘거인국’, ‘그린헬’, ‘하해’ 등의 던전과 더불어 데우스 엑스 마키나 세계관 안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던전들 중 하나.

    내가 107층 솔로 클리어로 기록을 갈아치우기 전만 해도 솔로 플레이 최고 기록은 러시아의 트로츠키가 세웠던 ‘88’층, 파티 플레이 최고 기록은 영국의 튜더가 세웠던 ‘99’층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곳 ‘불가침의 108 번뇌층’의 문을 두드림으로서 그 전의 모든 공식 레코드를 싹 다 갈아엎고 있는 중이다.

    …저벅! …저벅! …저벅!

    검은 복도 끝, 흰 방으로 향하는 길.

    솔로든 파티든 지금껏 이곳을 밟아본 이는 없었다. 회귀 전이든 후이든 말이다.

    ‘하지만 분명 공략은 있지.’

    나는 머리를 굴렸다.

    회귀 전, 이곳 108층의 주인이 용자의 무덤을 벗어나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었던 때가 딱 한 번 있었다.

    수많은 고인물들은 그 한순간을 놓치지 않고 무수한 촬영 자료와 분석 기록들을 남겼고 나는 간접 경험을 통해 그것들을 학습한 바 있다.

    ‘그때가 언제인지, 어떤 자료들을 남겼는지는 차차 복습하도록 하고…….’

    우선 지금 중요한 것은 이곳 108층의 문을 여는 것이다.

    [아아, 마이크 테스크, 원투원투. 시청자 여러분! 저는 지금 고인물 씨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용자의 무덤 108층의 문을 두드리는 파이오니아! 아마 오늘 그의 한 발자국은 게임계에 길이 남을 한 발자취가 될 겁니다! 다른 분들에게는 모르겠지만 제게는 이 한 발자국이 닐 암스트롱 씨의 한 발자국만큼이나 의미가 있다구요!]

    옆에서는 홍영화가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연신 외치고 있는 게 들린다.

    전 세계 최초로 용자의 무덤 올클리어에 도전!

    나는 눈앞에 있는 흰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띠링!

    <용자의 무덤 ‘제 108번뇌층’에 입장 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영구히 기록됩니다>

    <고인물>

    드디어 나는 이곳에 도달했다.

    108층의 내부는 꽤나 심플했다.

    주변은 온통 크림색 휘장과 커튼, 안이 보일 듯 말 듯한 망사 가림막들이 늘어져 있는 아래로 보기만 해도 푹신하고 보드라운 것을 알 수 있는 쿠션과 매트, 시트, 소파, 침대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무슨 고급 가구점 침구류 코너에 온 것 같네.’

    당장이라도 드러눕고 싶은 심경이 들었다.

    나야 이곳까지 비교적 쉽게 올라왔으니 망정이지 온갖 험난한 여정을 거치고 여기까지 온 역전의 용사들이라면 휴식에 대한 욕구가 훨씬 더 강렬할 것이다.

    더군다나.

    [용사님~ 어딜 그렇게 급히 가셔요~]

    [우리 여기서 조금만 쉬어요.]

    [라면 먹고 갈래요?]

    [오빠, 나 이렇게 두고 그냥 갈 거야?]

    휘장 너머 쿠션이나 침대에서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들이 들려온다1

    서큐버스, 그리고 서큐버스 퀸.

    세계 각국 미녀들의 얼굴을 딥러닝으로 조합해 만들어진 미녀형 몬스터.

    <서큐버스> -등급: B+ / 특성: 어둠, 이상성욕, 레이디 퍼스트, 양자택일, 융합

    -어지간한 남자는 서큐버스들로 이루어진 하렘에 들어가는 즉시 몸이 녹아내린다.

    <서큐버스 퀸> -등급: A+ / 특성: 어둠, 이상성욕, 레이디 퍼스트, 양자택일, 침어낙안

    -100마리의 서큐버스들을 교육하는 엘리트 서큐버스.

    그 미모와 매력은 가히 몽마의 수장이라 불릴 만하다.

    수없이 많은 미녀들이 반라의 몸을 가릴 듯 말 듯, 보여 줄 듯 말 듯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와! 오빠! 정말! 너무! 좋아!]

    [저랑.놀다.가면.안.돼요.?]

    [와.정말.같이.놀고.싶다.]

    하지만 어째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게 아니라 굉장히 사무적이고 의무적인 태도로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예전에 드레이크를 유혹하던 때랑은 어조가 사뭇 다른데?’

    이래서 서큐버스들이 싫다니까. 외모로 사람 차별하잖아!

    그나마 서큐버스들보다는 서큐버스 퀸들이 조금 덜 사무적이다. 참 직업의식 투철한 몽마였다.

    한편.

    홍영화는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아우, 낯 뜨거워라. 왜 여자들만 이렇게 많아? 여자 플레이어는 배려 안 해 주나?]

    하지만 그런 그녀의 불만은 이내 사그라든다.

    [용사님~ 어딜 그렇게 급히 가셔요~]

    [우리 여기서 조금만 쉬다 갈까 자기야?]

    [라면 먹고 갈래요?]

    [누나, 나 이렇게 두고 그냥 갈 거야?]

    이윽고 조각 같은 외모의 남자 몽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큐버스, 세계 각국 미남들의 얼굴을 딥러닝으로 조합해 만들어진 미남형 몬스터.

    [어우, 어우 참.]

    홍영화는 도깨비불 주제에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내 주변만 뱅글뱅글 돈다.

    “뎀은 참 남녀평등한 게임 같네요.”

    [어우, 그러게요. 저, 저, 저, 식스팩 봐, 앗 에잇팩이네!]

    언니도 오빠도, 몽마들은 다들 대흉근 파티다.

    ……한데?

    여성 플레이어들을 겨냥하기 위해 리젠되는 것이 분명한 이 인큐버스들이 왠지 나를 향해 끈적한 시선을 보내오기 시작한다.

    [이봐, 너 귀여운데? 운동해? 몸 어디서 만들었어?]

    [어서와. 이런 데는 처음이지?]

    [횽아, 라면 먹고 갈래?]

    [이리로 들어오도록 해.]

    인큐버스들의 외모는 참으로 다양하다.

    뚱뚱한 근육형, 슬림한 미남형, 선 굵은 마초형, 어린 소년형, 동네 이상한 형…….

    [뭐래? 저 오빠는 우리랑 놀 거거든?]

    [흥! 횽아는 우리를 더 예뻐해 주실 거야!]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이 나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수많은 남녀들이 반라의 몸으로 서로 뒤엉켜 싸우는 것을 보자 정신이 혼란해진다.

    “잠시 방송 끌게요. 애들 교육상 안 좋겠다 이건.”

    나는 홍영화의 접속까지 잠시 차단시킨 뒤 마몬의 건틀릿을 들었다.

    그리고 서로 다투기에 여념이 없는 몽마들을 향해 한 마디 했다.

    “혼자 있고 싶으니 다들 나가 주세요.”

    그리고 이내, 내 주먹이 바닥을 때린다.

    …콰쾅!

    내가 만들어 낸 지진은 근처에 있는 침대나 쿠션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파스스스스……

    서큐버스, 서큐버스 퀸, 인큐버스, 인큐버스 킹들은 특기인 마법 공격이나 검술 한번 펼쳐보지 못하고 지진파 한 방에 모조리 가루가 되어 부서져 버렸다.

    “고인물 방송은 전체연령가, 언제나 심의를 준수합니다.”

    나는 다시 방송을 켰다.

    팟-

    홍영화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그 많던 몽마들이 싹 사라져 버린 뒤였다.

    [와! 그 새 잡몹들을 싹 정리하셨네요!?]

    “한결 깔끔하죠?”

    [네…….]

    “약간 아쉬워 보이는데? 대흉근파티가 끝나서 그래요?”

    [아, 아니에요! 그, 그, 그나저나 108층에는 몬스터들이 여러 마리 나오네요? 한 층에 한 마리의 몬스터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홍영화는 황급히 말을 돌린다.

    나는 알면서도 적당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108층의 주인은 서큐버스 같은 잡몹들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을 정도로 규격 외의 존재니까요.”

    예전에 서큐버스를 잡을 때 썼던 핑크색 젤리 같은 아이템은 먹히지도 않을 것이다.

    “자, 지금부터가 진짜입니다.”

    내가 진지한 표정을 짓자 홍영화가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탑의 분위기가 변했다.

    나는 흰 방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신병에 걸릴 것만 같은 순백의 벽과 바닥, 천장만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커다란 방.

    한참을 걸어가자 이윽고 저 방 끝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

    흰 방에 나 있는 한 점의 얼룩.

    그것은 빨간색인 것 같다가도 파란색이었고 녹색인가 싶으면서도 노란색이었으며 때때로는 갈색인가 싶었지만 사실은 주황색, 아니 보라색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얼룩의 색은 점점 진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모든 색들을 죄다 빨아먹은 듯 지독한 흑빛을 띄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츠츠츠……

    얼룩이 나의 접근에 반응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번지던 얼룩은 이윽고 바닥 위로 뭉근하게 솟아오른다.

    내가 발걸음을 멈추는 것과 동시에.

    -띠링!

    <용자의 무덤 ‘제 108번뇌층’의 층주가 몸을 일으킵니다>

    <이색적(異色的)인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원색적(原色的)인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뇌색적(惱色的)인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

    .

    귓가에 알림음이 빗발친다.

    이 던전의 최종보스가 등장했다.

    고정 S+급 몬스터, 이 세계관을 17등분으로 나누어 지배하는 존재, 일곱 악마성좌 중 일좌(一座), 몽마(夢魔)의 왕, 용자의 무덤 제 108 번뇌층의 층주.

    <아스모데우스> -등급: S+ / 특성: ?

    -서식지: ?

    -크기: 1.7m

    -이 세상의 모든 악마를 지배하는 일곱 성좌 중 하나.

    색과 섹을 지배하는 위대한 마왕.

    “이렇게 대단한 색욕은 처음이로구나.”

    -아스모데우스- <구약(舊約); 토빗기>

    경국지색(傾國之色). 일고경성(一顧傾城). 침어낙안(侵漁落雁). 절세대미(絶世代美). 천금매소(千金買笑). 화용월태(花容月態). 단순호치(丹脣皓齒). 절대가인(絶代佳人)…….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그 어떠한 형용구로도 나타낼 수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가인(佳人)의 등장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 하는 미녀들의 데이터와 이상형 값들을 실시간으로 취합하고 조합하여 만들어진 존재. 극한의 미를 도트 단위로 분석, 조립해서 재합성, 심지어 최신 유행까지 실시간으로 반영되어 나타난 결과값.

    얼굴, 몸매, 목소리, 피부색, 특수효과까지. 말 그대로 선정(煽情)의 정석.

    하지만 단지 아름다운 것만이 다가 아닌 존재.

    손에는 삼각 깃발이 달려 있는 맹독의 창 ‘아스마다이’를 들고 어깨와 등, 허리에는 밤하늘만큼이나 깊고 어두운 여섯 장의 날개를 펼쳐놓았다.

    [호호호- 내게 색정혈(色精血)을 빨리고자 하는 자, 이 앞에 엎드릴 지어니.]

    ‘아스모데우스’, 일명 ‘색을 빠는 에스더’의 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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