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화 용자의 무덤 (7)
엄청난 기세로 주변을 녹이던 히드라 빅헤드의 몸이 갑자기 우뚝 멎는다.
후쿠시마 핵 용광로마냥 땅거죽을 푹푹 주저앉히던 놈이 갑자기 그 자리에 풀썩 쓰러져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나는 귓가에 울리는 정체불명의 알림음들에 주목했다.
-띠링!
<용자궪 무궪 1궪7층 외벽 궩궪뷁궭훑>
<시스템 이상이 감지되었습니다>
<오류코드 #127306219065899902……‘용자의 무덤’>
<긴급 디버깅(debugging) 시스템 가동>
<룰북(rule book)에 의거해 ‘용자의 무덤’의 히든 룰을 발굴합니다>
<적절한 규칙 채굴 중……#107층 #외벽 #손상>
<패치가 완료되었습니다!>
……오류 코드?
나는 알림창을 확대해 자세한 패치 노트를 열람했다.
<용자의 무덤 속에 등장하는 몬스터에 대한 특례 1-1) 용자의 무덤 속 몬스터는 호칭이나 아이템을 드랍하지 아니한다…… 1-2) 1-1 룰의 경우에 108층은 해당치 아니한다…… 2) 용자의 무덤 속 몬스터는 해당 층 안에서만 이동 가능하다…… 3-1) 만약 용자의 무덤 속 몬스터가 해당 층을 벗어날 경우 체력의 50%를 잃는다…… 3-2) 만약 용자의 무덤 속 몬스터가 해당 층을 넘어 탑 자체를 벗어날 경우 체력의 100%를 잃는다…… 3-3) 이 경우 탑 자체를 벗어난 것에 대한 판정은 몬스터의 육체가 탑 외벽에 닿았을 경우로 한정……>
뭔가 복잡한 내용들이 가득하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용자의 무덤 속 몬스터가 해당 층, 혹은 탑 자체를 벗어날 경우 소멸하게 된다’ 바로 이 조항이다.
“……설마?”
나는 고개를 돌렸다.
히드라 빅헤드의 거대한 몸은 이미 나를 구석까지 몰아넣은 상태였다.
시선을 돌리자 히드라의 육체 저 끝부분, 잘려나간 8번째 머리 부분이 탑의 벽을 뚫고 밖으로 약간 삐져나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해서 탑 밖으로 벗어나게 된 히드라의 육체는 탑 바깥의 벽에 닿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체력의 100%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설마 이거 ‘디버깅(debugging)’인가?”
디버깅이란 컴퓨터 프로그램의 잘못을 찾아내고 고치는 작업을 뜻한다.
작성된 프로그램들이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듯하던 초반의 알림음을 생각하면 분명 비상조치가 내려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메인스트림은 히드라가 107층을 파괴한 정도, 그리고 외벽을 손상시킨 뒤 던전 바깥에까지 미칠 영향을 딥러닝으로 계산했고 메모리의 작업 영역표에 가상 데이터를 넣어 정확한 예측치를 내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히드라 빅헤드의 메인 루틴, 오류 데이터, 표준 데이터 등등을 연산한 결과 놈을 이 세계관에서 임시 배제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을 내려 버렸다.
기억 장치의 내용을 덤프해 버린 것이다.
“하긴. 지금 히드라 빅헤드가 탑 바깥으로 풀려난다면…….”
모르긴 몰라도 아마 끔찍한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회귀 전 벨제붑이 일으켰던 ‘오염된 피 사건’보다야 못하겠지만 지금 현재 플레이어들의 수준을 감안한다면 거의 그에 필적하는 재앙이 벌어지겠지.
본의 아니게 전 세계 플레이어들을 인질로 잡았던 셈이 되어 버렸다.
“……되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네.”
금 밟아서 죽었다니. 이게 무슨 피구도 아니고…….
위험등급 S랭크 중 최악의 육상병기치고는 너무나 어이없는 최후였다.
-띠링!
<영상을 다시 송출하시려면 ▶버튼을 눌러주세요>
나는 눈앞에 뜬 메시지의 재생 버튼을 클릭했다.
그러자.
위이이잉- 포르륵!
내 옆으로 다시 홍영화의 도깨비불 얼굴이 동동 떴다.
[우와아! 뭐야! 뭐야! 어떻게 됐어요! 아직 살아 있어!?]
“I'm still alive.”
[뭐야, 뭐라는 거예요. 한국말로 해!]
“보시다시피. 잘 살아 있습니다.”
나는 홍영화와 전 세계 시청자들을 눈앞에 두고 엄지손가락을 뒤로 제꼈다.
그곳에는 쓰러져 죽어 있는 거대한 뱀의 머리통, 히드라 빅헤드가 보인다.
[우-와아아아아아!]
홍영화가 전에 없던 함성을 지르며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니, 진짜 이걸 오또케 잡은 거양! 진짜 나 눈물날라 그래- 게이머로서 이런 광경을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 건 진짜 축복이에요오! 아니, 근데 진짜 어떻게 잡았아요? 아우! 잡는 과정 좀 보여 주지!]
“으음. 뭐. 저도 실패할 줄 알고,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서 잠깐 방송 꺼 놓은 건데. 어떻게 되긴 되네요.”
뭐 어차피 본 사람도 없는데 허세 좀 부려 보자.
내가 짐짓 겸손한 척 너스레를 떨고 있을 때.
-띠링!
나의 허세를 도와주는 상황이 조성된다.
<세계 최초로 용자의 무덤 ‘제 107번뇌층’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영구히 기록됩니다>
<107층부터는 특수 보상이 지급됩니다>
오오, 때마침 나의 107층 클리어를 공표해주는 알림음 덕에 면이 제대로 선다.
“……응? 근데 특수 보상?”
내가 알기로 용자의 무덤은 더 이상 아무런 보상을 얻을 수 없게 바뀌었다.
몬스터를 잡아 봤자 경험치만 오를 뿐 아이템 드랍이나 호칭 특전 등은 받을 수 없게끔 말이다.
“으음, 108층은 예외인 줄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107층도 예외였던 건가.”
하기야, 107층을 클리어한 시점에서 용자의 무덤을 정복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애초에 고정 S+급 몬스터는 잡으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니까.
이윽고, 내 눈앞에 나에게만 보이는 상태창이 떴다.
<이어진>
LV: 96
HP: 960/960
호칭: 샌드웜 땅꾼(특전: 가뭄) / 대망자 묘지기(특전: 언데드) / 아귀메기 태공(특전: 잠복) / 크툴루 크라켄 킬러(특전: 고생물) / 와두두 여왕 쥬딜로페의 펫(특전: 갹출) / 여덟 다리 대왕 참수자(특전: 불완전변태) / 리자드맨 학살자(특전: 징수) / 식인황제 시해자(특전: 1차 대격변) / 뒤틀린 황천의 생존자(특전: 절약) / 불사(不死)의 좌군단장(특전: 여벌의 심장) / 불사조의 대리인(특전: 선택) / 검은 용군주 오즈의 위상(특전: 혈족전생) / 시작의 마을 유토러스의 명예 후작(특전: 대귀족) / 탐욕의 악마성좌 마몬의 위상(특전: 수전노) / 발록의 뿔을 꺾은 자(특전: 야수) / 그 무서운 데모고르곤(특전: 싸움광) / 살인자들의 탑 5층의 주인(특전: 맵 디자인) / 벨제붑의 아들을 죽인 자(특전: 맹독) /폭식의 악마성좌 벨제붑의 위상(특전: 폭식 창자) / 데스나이트 ‘킹 아서(King Arthur)’의 후예(특전: 백전노장) / 저주받은 고목 쟈쿰 벌목자(특전: 고대 신앙) / 심해 스토커(특전: 마찰계수) / 푸른 용군주 버뮤다의 위상(특전: 잠수) / 레흐락과 게슈탈트의 친구(기다림) / 아틀란둠의 왕자(특전: 대심해) / 질투의 악마성좌 레비아탄의 위상(특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 싸움 나락의 생존자(특전: 스탯의 정수) / 흰 용군주 카프카타렉트의 위상(특전: SM플레이어) / 두 전쟁대군주의 계약자(특전: 2차 대격변) / 용자의 무덤 107층, 히드라 참살자(특전: 구두룡(九頭龍))
상당량의 경험치 상승과 동시에 호칭 특전이 떴다!
‘세상에.’
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보는 이도 많은데 경박스럽게 방방 뛰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잖아?
‘구두룡(九頭龍)’
↳절단된 신체를 고속으로 재생합니다. 재생된 신체는 두 배로 늘어납니다.
쉽게 말해, 팔이 잘려나가면 그 자리에 새로운 팔 두 개가 돋아난다는 이야기다.
“미친 거 아냐?”
나는 오래 전 유다희와 초갈모드로 함께 싸웠던 것을 떠올려 보았다.
이제 그와 같은 플레이를 혼자서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거지.
“너무 좋잖아!”
내 반응을 본 홍영화는 애타는 표정으로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채근했다.
[뭔데요! 뭐라는데요! 나도 좀 보여 줘요!]
“사생활입니다.”
[아 뭐가 사생활이야! 지금 우리 방송 보는 사람이 벌써 1억이 넘는데!]
오우야, 시청자 수가 그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이쯤 되면 거의 1인 생방송의 전설이다.
하지만 나는 꿋꿋하게 호칭 특전에 대한 이야기를 함구했다.
다만, 지금부터 뜨는 알림창 정도는 세간에 공개해도 되겠지?
-띠링!
<용자의 무덤 제 108 번뇌층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습니다>
<계속 도전하시겠습니까?>
<수락 시 108 번뇌층 통로 개방>
<거절 시 탑 외부로 이동 ※107층 클리어로 인한 특전 보상은 몰수됩니다>
나는 잠시 턱을 짚었다.
홍영화가 다급하게 묻는다.
[고, 고인물 씨! 여기서 더 위로 가실 건가요?]
“흐음, 글쎄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요?”
내가 역으로 묻자 홍영화는 안달복달 혼자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맴돈다.
[아아, 이미 107층을 클리어한 것만으로도 게이머로서는 너무도 엄청난 업적이라서…… 하지만 108층이 코앞인데…… 근데 S급 몬스터와 S+급 몬스터는 차원이 다르니깐…… 아아, 그래도 진짜 딱 한 층, 한 층만 클리어하면 전 세계 최초로 용자의 무덤이 공략되는 순간인데…… 으으, 그래도 이것까지 생각하는 건 너무 욕심 부리는 것 같고…… 방송인으로서는 여기에서 딱 끝내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내는 게 더 좋은데…… 게이머로서는 역시 108층에 도전하는 신화적 영웅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달까…… 에?]
혼자서 조잘조잘 고민을 중얼거리던 홍영화, 그녀는 이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그녀를 지나쳐 한참 앞, 그러니까 용자의 무덤 108층으로 통하는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뭐해요, 안 오고.”
그러자 홍영화의 얼굴이 눈에 확 띄게 밝아졌다.
[도저어어어어-언!]
강아지처럼 내 뒤를 쪼르르 따라오는 도깨비불.
나는 홍영화를 등지고 거대한 문 앞에 섰다.
지금까지 흑색 일색이었던 용자의 탑의 최정상.
최정상에 위치해 있는 이 문은 놀랍게도 잡티 하나 없는 순백의 색을 띠고 있었다.
‘……어딘가에 있는 꼭대기 방이랑은 대조되네.’
검은 탑 꼭대기의 하얀 방을 보자 과거 방문했었던 하얀 탑 꼭대기의 검은 방이 떠오른다.
나는 힘을 주어 문을 밀었다.
…끼기기긱!
준비는 철저히 했다. 여벌의 심장을 적시고 있는 포션의 양도 아직은 충분하다.
……이제는 단 하나만이 남았다.
고정 S+급 몬스터.
이 세계관을 17등분으로 나누어 지배하는 존재.
일곱 악마성좌 중 일좌(一座).
경국지색(傾國之色). 일고경성(一顧傾城). 침어낙안(侵漁落雁). 절세대미(絶世代美). 천금매소(千金買笑). 화용월태(花容月態). 단순호치(丹脣皓齒). 절대가인(絶代佳人).
몽마(夢魔)의 왕.
용자의 무덤 제 108 번뇌층의 층주이자 최종보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색(色)과 섹(?)의 관장자.
……바로 ‘아스모데우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