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777화 (777/1,000)
  • 777화 용자의 무덤 (4)

    ……쿵!

    용자의 무덤 제 59 번뇌층.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석실에 둔중한 소음이 울려 퍼진다.

    돌기둥이 창살처럼 빼곡하게 내려앉은 석조 공간, 무언가 끔찍한 것을 세상과 격리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미궁.

    하지만 이곳의 주인은 지금 내 밭 밑에 깔려 있는 신세다.

    ……머리만 남은 채로 말이다.

    <카이도마루(外道丸)> -등급: B+ / 특성: 거인, 악귀, 살금살금, 지진, 융합

    “아, 오랜만이야 오랜만.”

    나는 머리통만 남은 악귀에게 조금 뒤늦은 재회 소감을 밝혔다.

    옆에서 홍영화가 놀라 외친다.

    [세상에! 카이도마루를 혓바늘로만 찔러 죽이다니! 이게 가능한 건가요?]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딨습니까. 드X곤볼의 타오파이도 하던 건데.”

    나는 깜짝 놀란 홍영화를 뒤로하고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60 번뇌층의 문이 거침없이 열렸다.

    스으으윽…

    허공에 떠 있는 검은 해먹에서 매끈한 다리 하나가 뻗어 나온다.

    검은색 망사 스타킹.

    군데군데 찢어진 자국이 보이는.

    [호호호호-]

    미모의 여성이 반라의 몸을 일으킨다.

    <서큐버스> -등급: B+ / 특성: 어둠, 이상성욕, 레이디 퍼스트, 양자택일, 융합

    “오우야.”

    [또 묵직해지셨나요?]

    “어허, 애들도 보는데 무슨 그런 발언을!?”

    [왜요? 세계 신기록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심적 부담감,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선 한국인 랭커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범국가적 책임감을 말하는 겁니다만?]

    내가 눈을 감자 옆에 있던 홍영화가 비꼬기 시작했다.

    전부 다 내가 예전에 했던 말이었기에 딱히 할 말이 없다.

    …쾅!

    뭐 B등급 대의 몬스터들에게 길게 할애할 분량은 없다.

    나는 서큐버스가 검은 안개를 걷고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기 전에 깎단으로 해치워 버린 뒤 바로 다음 층으로 향했다.

    이윽고, 위험등급 A랭크의 엘리트 몬스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 힘든 여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세세하게 설명하고 싶지만.

    ‘분량이 모자라 적지 않겠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홍영화 역시 내 의견에 동의했다.

    [솔직히 약간 옛날 방송 분량 재탕하는 느낌이라 좀 그렇네요.]

    “그쵸? 양심이 있다면 이런 구간 정도는 빨리빨리 스킵해야죠.”

    나는 깎단을 거꾸로 쥐고 A급 몬스터인 바다코끼리를 쥐어 패기 시작했다.

    옛날에 크라켄에게 쫓길 때 도움을 주었던 필드 보스인지라 감회가 조금 새로웠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지.

    그 외에 ‘이히히히’, ‘얼음상어 서리이빨’, ‘트윈헤드 오우거’, ‘거미 대모’, ‘리자드맨 만인장’, ‘데스 나이트(하급)’, ‘대머리황제수리’, ‘메두사’, ‘황금광 청개구리’, ‘냉동 흡혈귀’ 등등의 낯익은 몬스터들이 출현한다.

    이후 위험등급 A랭크의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75층을 돌파, 76층에 이르자 A+등급의 몬스터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 또한 빨리빨리 가겠습니다. 솔직히 님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게 이런 별 중요하지도 않은 애들이랑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 분량 질질 끄는 거 아니잖아요.”

    [누구한테 말하시는 건가요?]

    “당연히 시청자님들이죠.”

    나는 홍영화와 주거니 받거니 하며 깎단을 들었다.

    꿈과 인성으로 가득 찬 용자가 나가신다!

    ‘아귀 메기’, ‘대망자’, ‘미노타우로스’, ‘샌드웜’, ‘다리 많은 여제’, ‘데스나이트(상급)’, ‘고대 거인 요튠’, ‘기저의 뱀 파이썬’, ‘사이클롭스’, ‘어둠 대왕’, ‘씨어데블’…… 기타 등등.

    솔직히 A+등급의 몬스터들부터는 나조차도 방심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저마다 하나씩 보유하고 있는 필살의 궁극기를 쓴다면 능히 S급 몬스터들에게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는 존재들을 처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방심하지 않는 것이지.”

    애초에 자만과 태만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나다.

    나는 꼼꼼하게,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심경으로 A+등급 몬스터들을 하나하나 밟아나갔다.

    이 과정 또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이내 대망의 91층. 여기서부터는 무려 S급 몬스터가 등장하는 구간이다.

    대부분의 월드클래스급 공격대들이 본격적으로 좌절하기 시작하는 구간이기도 했다.

    [그-워어어어어억!]

    91층의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땀 대신 용암을 뿜어내는 고대괴수 ‘용암장갑암룡’이다.

    “아, 용암장갑암룡! 일반 장갑암룡이 무수한 전투 경험을 쌓아 한 단계 진화한 상위종 몬스터죠. 저는 처음 봅니다만… 쟤도 저 같은 놈은 처음 볼 겁니다.”

    나는 바로 도트 데미지 작업에 들어갔다.

    샥샥샥샥-

    참다랑어를 해체하는 노련한 주방장처럼, 나는 깎단으로 용암장갑암룡의 단단한 비늘 틈새마다 칼빵을 놔 주었다.

    애초에 나는 S랭크 최상위권에 존재하는 칠귀타 데스나이트도 거꾸러트린 몸.

    S랭크 하위권에 속하는 용암장갑암룡 따위는 내 속사를 10분도 채 버티지 못한다.

    [우와! 용암장갑암룡을 22분 42초만에 잡으시다니! 굉장해요!]

    ……아, 10분은 조금 심했나?

    뭐 아무튼. 홍영화는 내 주변을 뱅글뱅글 돌아다니며 연신 놀라워하고 있었다.

    [시청자님들! 보고 계시나요! 지금 여기는 S급 몬스터가 등장하는 첫 관문 ‘제 91 번뇌층’입니다! 아, 이제는 92층이네요! 방금 막 91층의 수문장인 용암장갑암룡을 쓰러트렸으니까요! 고인물 씨의 이 파격적인 행보가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 제가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홍영화는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아마 내 방송을 지켜보고 있는 전 세계의 시청자들 역시도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천하의 튜더조차도 공격대를 이끌고 와 99층에 도달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어떤가? 단신으로 무려 91층에 도달했다.

    이는 러시아의 랭커 트로츠키가 솔로 플레이로 달성한 ‘88’층을 아득히 뛰어넘는 신기록!

    거기에 트로츠키는 88층까지 혼자 가는 동안 무수한 실패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고 마지막으로 88층 클리어에 성공했을 때 걸렸던 시간은 자그마치 이틀 하고도 열일곱 시간.

    하지만 지금 나의 레코드는 어떤가!

    [……믿기지가 않아요. 91층을 클리어하는 데 걸린 시간이 지금까지 총 9시간 6분 9초! 그 중에서 1층의 보스였던 슬라임 퀸에게 개쓸데없이 낭비한 3시간 정도를 감안한다면……!]

    “개쓸데없다뇨. 나름 힘든 시련이었습니다.”

    [됐구요. 빨리! 빨리 다음 층으로 고고! 얍얍!]

    홍영화는 극도의 흥분 상태로 내 주변을 뱅글뱅글 맴돈다.

    어째 이 여자… 나보다 더 신난 것 같은데?

    ……하지만.

    잔뜩 흥분한 홍영화조차도 다음 층부터는 거의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입도 뻥긋,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91층에 이어 92층, 93층, 94층, 95층, 96층, 97층, 98층, 99층을 스트레이트로 격파해 버린 것이다.

    1시간도 걸리지 않은 채로. 심지어 노히트런(1의 데미지도 입지 않은 상태)!

    […….]

    중계라는 본연의 업무조차도 잊고 입을 딱 벌린 홍영화.

    나는 얼어붙은 그녀를 대신해 캠에 대고 싱긋 웃었다.

    “말했잖아요. 오늘 제 실력이 만천하에 제대로 공개될 것이라고.”

    시청자들의 반응은 아직 알 수 없다.

    아니,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중계가 끝나고 난 뒤에 봐도 충분한 것.

    “자,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빨리빨리 가 보자구요~”

    나는 튜더가 세웠던 마의 99층을 박차고 위로 올라갔다.

    이제부터는 ‘100’층, 세 자릿수 단위의 ‘트리플 넘버링’, 여기서부터는 뭘 해도 세계 신기록이다.

    현세의 게이머들이 아무리 힘을 모아 덤벼들어도 끝끝내 넘지 못했던.

    아예 ‘불가능’이라고 알려져 있던 벽을 나는 단신으로 부숴 버린다.

    …쾅!

    나는 100층의 문을 열고 발을 내딛었다.

    -띠링!

    <용자의 무덤 ‘제 100 번뇌층’에 입장 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영구히 기록됩니다>

    이윽고. 천하의 튜더조차 좌절시켰던 S급 몬스터가 거대한 몸을 기울여 나를 향해 다가왔다.

    “……우리는 인연인가 보다.”

    나는 눈앞에 있는 덩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용옥의 고문기술자’, 튜토리얼의 탑과 무투룡의 싸움 나락을 거쳐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다.

    [조, 조심하세요! 신규 몹인가 봐요!]

    “신규 몹? 아닌데요. 벌써 두 번이나 잡았던 몹인데요?”

    [네에? 아니 대체 어디서 저런 무지막지한 것들을 잡고 다닌 거예요!]

    홍영화가 기겁하거나 말거나, 나는 앞으로 쏘아져 나간다.

    용옥의 고문기술자는 리자드맨 용사의 상위호환 격 몬스터로 튜더와 그의 공격대조차 전멸의 쓴맛을 보았을 정도로 무척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통상의 게이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

    이미 몇 번이나 쓰러트린 몹이니만큼, 나는 침착하게 용옥의 고문기술자를 잡아 나간다.

    결국 놈을 무릎 꿇리는 데 약 40분가량, 완전히 숨통을 끊어 놓는 데 약 20분가량이 추가로 걸렸다.

    “여기서부터는 슬슬 힘드네요. 시간 분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확실히 100층부터는 체감 난이도가 다르다.

    101층의 보스 ‘쟈쿰’, 102층의 보스 ‘작아지는 엘리스’, 103층의 보스 ‘뇌를 빠는 스펙터’, 104층의 보스 ‘데모고르곤’, 105층의 보스 ‘데스나이트 사묘아리’, 106층의 보스 ‘아몬 후작’…….

    쟈쿰과 데모고르곤을 제외하면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던 몬스터들이었다.

    ‘……까딱 잘못했으면 105층에서 리타이어 될 뻔했네.’

    105층의 수문장 데스나이트 사묘아리와 106층의 수문장 아몬 후작은 정말로 무지막지하게 강했다.

    회귀 전 집단지성을 이용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현재의 나로서도 공략이 불가능했을 정도로.

    “…….”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내가 회귀하기 전 세상의 게이머들은 용자의 무덤을 총 106층까지 공략했었다.

    S급 몬스터의 마지노선 107층과 고정 S+급 몬스터가 등장하는 108층만은 회귀하기 전의 게이머들도 공략하지 못했던, 거의 대부분이 미지로 남아 있는 영역.

    다만 나는 이 107층과 108층에 존재하는 몬스터를 꽤나 정확히 추리해 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연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설명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뭐, 어쩌겠어.’

    이건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고인물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직감 비스무리한 것이다.

    …저벅 …저벅 …저벅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몬 후작이 지키고 있었던 106층을 지나 107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섰다.

    에드워드 튜더 프랜시스가 세운 세계 신기록 ‘99층’, ‘더블 넘버링’의 벽은 이미 옛저녁에 넘었다.

    그것도 단신으로.

    현세의 게이머들이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을 이미 세웠으니 이제 정말로 신화가 될 시간이었다.

    홍영화가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 잠시만요. 저 너무 떨려서…… 청심환 좀 먹고 올게요. 잠시 일시정지! 쉬는 시간!]

    “인생은 실전이죠. 일시정지 같은 건 없습니다.”

    [이건 게임이잖아요!]

    “게임이 곧 제 인생입니다.”

    세이브가 없기에 매 순간 최선을! 그것이 나의 모토!

    그때, 홍영화가 기어이 청심환을 꼴깍 삼킨 뒤 내 옆에 바싹 붙어 말했다.

    [아니 근데 저… 진짜 딱 10분 만 쉬고 가면 안 될까요?]

    "네?"

    아니 맥 빠지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10분만 쉬고 가자니, 어디 이런 구려빠진 쌍팔년도 작업 멘트를…….

    하지만 홍영화는 절박하게 외친다.

    [이미 방송국으로 좀만 방송 쉬어 달라는 요청 메시지가 105만 건이나 와 있단 말이에요!]

    “왜요?”

    [다들 화장실이 가고 싶대요! 앗, 방금 LGB 국장님도 옆에 오셨어요! 지금 약간 지리셨다고…….]

    흠, 하기야 약간은 이해되는 대목이다.

    눈 한번 깜빡이는 시간도 아까워하는 애청자들이 벌써 12시간 넘게 내 방송을 보고 있겠지?

    그 예전, 어X져스 엔드 게임이나 X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개봉했을 때 너무 긴 러닝타임으로 인해 다들 화장실 타이밍을 재느라 곤욕이었던 일화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안 돼요. 이 똥싸개들아.”

    모름지기 용자의 무덤에 도전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런 용자의 도전을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기저귀에 며칠 치 생존식량을 구비해 놓는 것은 상식이다.

    그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거야!

    내가 도전을 강행하자 홍영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외쳤다.

    [으, 으아아아…… 이러다 진짜 108층 클리어하는 거 아니야요?]

    “그럼 못할 줄 알았어요?”

    [아니…… 나는 그냥 솔직히…… 많이 가 봐야 90층 언저리에서 좌초될 줄…… ]

    “뭐라구요?”

    [쪠송해요! 쪠송해요! 하지만 그것만 해도 엄청난 거잖아요! 근데 이건 대체……]

    고개를 도리질하면서도 도무지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입을 딱 벌리고 있는 홍영화.

    나는 피식 웃으며 캠 너머 시청자들을 향해 말했다.

    [100% 클리어가 불가능하다면 애초에 도전할 이유가 없죠.]

    용자의 무덤의 최정상, 일명 ‘불가침의 108층’

    일반적으로 세계관 속에 꼭꼭 숨어 있는 것이 고정 S+급 몬스터라지만, 유일하게 전 세계 모든 이들이 행방을 아는 존재가 바로 이 용자의 무덤 최상층에 군림하고 있는 녀석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그놈을 #잡는다

    “어때요. 해시태그 다니까 좀 있어 보입니까?”

    [감성충이시네요.]

    “뭐라구요?”

    [감성 충만하시다구요. 자! 얼른 갑시다! 신화를 만들러 고고!]

    실시간으로 써 내려가는 신화책의 한 페이지에 함께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게임 중계인으로서는 큰 영광일 것이다.

    나는 들뜬 홍영화를 데리고 107 번뇌층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주하게 되었다.

    뎀 세계관 속에 존재하는 최강의 S급 몬스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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