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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774화 (774/1,000)
  • 774화 색정광(色情光) (7)

    휘이이잉-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 수도원.

    차가운 석벽 무대. 횃불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들이 조용히 춤을 춘다.

    텅 빈 기도실에서는 연신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30년 동안 앉은 자리에서 한 번도 일어선 일 없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대주교.

    하지만 평소 그의 온화하던 그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구슬땀이 뚝뚝 흐르고 앙다문 입술에서는 핏방울이 배어나온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그는 필사적으로 무언가에 저항하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성물들은 뿌연 신성력을 뿜어내어 그를 지키고 있다.

    바로 그때.

    휘이이이잉-

    찬바람 한 줄기가 불어와 복도의 촛불을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또각- 또각- 또각-

    한때는 수도승들로 붐볐던 이 광활한 수도원을 텅 비게 만들어 버린 존재의 하이힐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은쟁반 위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 영롱한 목소리가 대주교의 귓바퀴를 간지럽게 핥아온다.

    [대주교님~ 제가 수수께끼 하나 낼게요.]

    대주교는 재빨리 성수에 손을 담가 세수를 했다.

    그리고 굵은 땀방울을 삐질삐질 흘리며 귀를 막았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귀를 막아도 이 목소리는 계속 주변을 맴돈다.

    게다가 오히려 막힌 구멍 틈의 윤활유처럼 너무도 손쉽게 고막을 비집어 들어오고 있었다.

    [……넣을 때는 기분이 좋고.]

    끈적끈적 녹아내리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

    [……흔들 때는 설레고.]

    그것은 대주교의 심장에 정면으로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뺄 때는 아쉬운 게 뭘까요?]

    나른하고도 몽환적인 목소리.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몸속에 색(色)이 꽉 차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한 감각.

    [힌트는…… 돼지! 우둔한 수퇘지! 천박한 암퇘지! 꿀꿀~]

    목소리는 교성과 비음을 섞으며 돼지 소리를 흉내 낸다.

    대주교는 결국 신음 소리를 내며 허리를 꺾고 말았다.

    땀과 콧물, 침을 질질 흘리며 바들바들 떠는 대주교, 그는 자신의 몸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감각 속에 몸부림쳤다.

    자괴감, 해방감, 죄책감, 쾌감.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느낌이 대주교를 옥죈다.

    색욕(色慾),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는 욕망.

    이 끓어오르는 정욕은 대주교의 굳건했던 신앙을 기둥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

    세에에에에엑-

    대주교의 몸에서 색이란 색은 죄다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하얗게 변해 가는 대주교의 안색,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윽고 온몸이 미이라처럼 바짝 말라 버린 대주교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스스스스스스-

    하얀 분가루로 변해 버린 대주교는 이내 바닥에 흰 자국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 수도원 바닥에 남은 108번째 자국이자 마지막 자국이었다.

    이윽고.

    [정답은 저. 금. 통.]

    복도에 울리는 낭랑한 목소리.

    어둠을 걷고 기도실에 등장한 이는 늘씬한 체구의 한 미녀였다.

    갈색 피부, 붉은 머리, 검은 날개, 이마에 돋아나 있는 두 개의 뿔.

    약간 쳐져 있는 눈꼬리의 끝에는 권태로움, 나른함, 혹은 눈물점이라는 이름의 열매가 매달려 있다.

    그녀는 핑크색 도톰한 입술을 모아 보이며 대주교의 마지막에 윙크를 날렸다.

    [우리 대주교님, 무슨 생각을 하신 걸까? 호호호, 역겨우셔라~]

    말을 마친 그녀는 대주교가 앉아 기도를 드리던 장소에 살포시 걸터앉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샘물처럼 퐁퐁 솟구치던 성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바짝 말라 바닥을 드러내 버렸고 타오르는 촛불들은 모조리 꺼졌다.

    [휴우. 색을 많이 빨았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힘드네.]

    과거 있었던 용마전쟁에서의 상처.

    흰 용의 격노를 웃으며 무릎 꿇리던 그날의 영광이 아직도 생생하거늘.

    [쳇. 그때가 좋았는데 말이야. 레비아탄 그 질투쟁이 바보 녀석이 배신하지만 않았어도.]

    용과 악마의 합공이라니, 그 날의 기억은 떠올리기만 해도 어이가 없고 불쾌하다.

    그날 이후 나름대로 도덕적이고 지조 있다 자부하는 위선자들의 색을 수도 없이 빨고 또 빨았지만 몸 상태가 영 아니었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 전성기 수준의 힘을 되찾으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바로 그때.

    [당신이 에스더인가요?]

    어둠 저편에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이 수도원 안에 살아 숨 쉬는 것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호호호. 피난 못 간 어린 수도승이 있었나? 게 누구냐?]

    그러자 이윽고, 어둠 너머에서 흰 피부의 소년 하나가 걸어 나온다.

    바로 솔거였다.

    [당신이 ‘그 에스더’ 맞나요?]

    솔거의 질문에 여자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누군지 알고 찾아온 것이냐?]

    [네. 잘 빠신다고 들었어요.]

    [어머? 어머? 어린 녀석이 보기보다 당돌하구나.]

    [색깔 말이에요.]

    […….]

    에스더.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 있는 솔거를 바라보았다.

    한편, 솔거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닥의 흰 자국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대주교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똑똑히 본 모양이다.

    [와아. 대주교님이 이렇게 변해 버리다니.]

    [……너는 내가 무섭지 않느냐?]

    [신기해요.]

    [신기하다고?]

    [네.]

    에스더가 눈을 끔뻑거리는 동안 솔거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대주교님을 이렇게 만드신 거예요?]

    [……그야 뭐. 이 자식, 꽤 위선자거든.]

    에스더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실 이 수도원은 주변 주민들에게서 헌금을 명목으로 재물을 갈취할 뿐만 아니라 여신도들에게도 몹쓸 짓을 하던 쓰레기들이었다는 비화다.

    [……뭐, 대충 이런 스토리다. 물론 이 썩어빠진 수도원에도 나름대로 독실한 녀석들이 몇 있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뻔한 수준 아니겠느냐?]

    에스더는 대주교의 골분을 발로 쓱쓱 비벼 버리며 깔깔 웃어댔다.

    이윽고, 그녀는 자기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솔거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솔거는 눈앞에 보이는 에스더의 가슴골에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한다.

    그 모습이 재밌는지 에스더는 쿡쿡 웃었다.

    [화이트워싱의 솔거가 눈처럼 하얗다더니. 그 말이 정말이구나.]

    [아앗! 저를 아시나요?]

    [알지. 색(色)에 관련된 한 내가 모르는 것은 없다.]

    에스더는 고혹적인 미소로 솔거를 바라보았다.

    [너는 집 밖의 세상을 모르나 집 밖의 세상은 모두 너를 안다.]

    그 미소를 본 솔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토록 희던 얼굴빛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도 모른 채.

    [아둔하고 하잘 것 없는 화이트워싱의 위선자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더 가엽고 애처로운 것들. 그들은 흰 색도 결국 색(色)의 일부라는 사실을 모르지.]

    이윽고, 에스더는 흰 빵처럼 말랑말랑한 솔거의 두 뺨을 자신의 초콜릿색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녹아내린 설탕처럼 하얗고 끈적한 목소리로 귓가를 간질였다.

    [보아하니 나를 찾아온 이유는 뻔한 것 같구나.]

    [……헉! 티, 티 나나요?]

    [당연하지.]

    에스더는 솔거의 몸 곳곳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래, 너 역시도 색욕(色慾)이 일어 나를 찾아온 것이렷다? 그렇다면 잘 찾아왔다. 나야말로 색욕의 증좌(證左). 이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존재.]

    에스더는 솔거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솔거는 에스더의 풍만한 육체에 파묻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솔거를 올려다보며, 에스더는 자신의 몸을 한층 더 끌어 모았다.

    그리고 솔거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자, 착하고 솔직한 아이에게 주는 상이다. 여기서부터는 난다긴다하는 현자나 도인들도 감히 허락받지 못한 구역, 어디 이곳을 한번 맘대로 해 보려무나.]

    자신을 마음대로 하라는 에스더, 그녀는 두 다리와 팔을 활짝 벌린 채 누워 솔거의 색욕을 맞이한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절제와 수양, 윤리, 통념, 도덕과 선(善)을 비웃기라도 하는 양.

    그리고 그런 에스더의 농염한 육체 위에 엎드린 솔거는 떨리는 손으로 에스더의 얼굴 가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잔뜩 달뜬 얼굴로 말했다.

    [세상에. 색(色)이 정말 예뻐요!]

    솔거는 지금 에스더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에스더는 약간 당황했다.

    [……응?]

    [색이 정말 예쁘다고요!]

    지금까지 이런 반응을 보였던 남자가 있었던가?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반쯤 벌린 에스더.

    그리고 그녀의 위에 타 있는 솔거는 흥분한 기색으로 정신없이 외친다.

    [눈동자의 이 영롱한 적빛이라니! 분명 E 231, S 208, L 120, R 238, G 17, U 67의 선셋 더 풀 레드 색감이겠죠? 거기에 이 입술의 쇼킹한 핑크 색감은 대체…… E 205, S 172, L 180, R 237, G 146, U 255의 쇼킹 핑크가 틀림없어! 아아, 세상에는 정말로 이런 색감이 실존하는구나! 너무 아름다워요!]

    색욕(色慾)이 아니라 색욕(色慾).

    진짜 색정광(色情狂)의 각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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