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3화 색정광(色情光) (6)
먼 옛날.
화이트워싱 마을의 한 유복한 가문에 아이가 태어났다.
흰 피부. 흰 머리카락. 흰 눈. 점이나 잡티 하나 없는 완연한 백색(白色).
빛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이 아이의 이름은 ‘솔거’, 흰 피부를 자랑으로 삼는 화이트워싱 마을의 사람들 모두가 한 눈에 반해 버릴 정도로 희고 맑은 아이였다.
[어쩜 이렇게 하얗고 고울까. 방금 내린 눈, 혹은 맑은 날의 구름과도 같군.]
[이 고결한 아이라면 악마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거야.]
[제아무리 악마라도 이 아이에게서만큼은 색을 빼앗지 못하겠지?]
[이 아이로 인해 우리 마을은 번영할 것이요 머지않아 악마를 몰아내고 옛날의 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니!]
모든 사람들의 축복과 기대 속에 솔거는 점점 성장해 나갔다.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이 미소년에 대한 가문의 기대는 점점 커져만 갔고 그것은 그의 생활환경을 완벽한 백색으로 만들어 놓았다.
늘 깨끗해야 한다.
늘 희고 맑은 것만 봐야 한다.
떨어지는 눈, 새벽의 서리, 한겨울에 얼어붙은 호수, 뛰노는 흰 털의 짐승들, 흰 건물과 흰 사람들.
잠자리에서 눈을 떠서 다시 잠자리에서 눈을 감기까지, 솔거는 흰 색 말고는 그 어떠한 색도 볼 수 없었다.
‘흰 색 말고 다른 색을 띄게 되면 무서운 악마가 찾아온답니다. 도련님의 색을 빼앗기 위해서요.’
유모가 해 주는 옛날 옛적의 무서운 이야기는 이미 귀에 못이 박혔다.
모두의 걱정과 기대 속에, 솔거는 대저택의 차기 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 대해 배워 나갔다.
물론 솔거는 아주 착하고 순수하며 맑은 아이였기에 그런 것에 별다른 반발심은 없었다.
애초에 집 안에서만, 모든 것들이 극도로 조심스럽게 통제되는 환경에서만 자라 왔던지라 흰 색 말고 다른 색이 존재하는지의 여부조차도 알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흰 방. 흰 옷. 흰 식사. 흰 사람들.
그렇게 솔거는 십 수 년을 희고 깨끗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모두가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바르고 맑은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 날.
솔거는 밤늦게 배가 고파 만찬장으로 나왔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새벽. 아무도 없는 식당.
흰 접시 위에 올라간 도톰하게 부푼 흰 빵 두 개와 굵고 긴 흰 소시지 하나.
야식거리를 들고 나오던 솔거는 희뿌연 촛불 빛 뒤에 숨어 있는 두 남녀를 발견했다.
‘……아버지?’
솔거는 반가운 마음에 만찬장 구석을 향해 다가가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발걸음을 멈췄다.
아버지는 전에 없던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흰 피부 곳곳은 입술 자국과 이빨 자국으로 붉었고 얼굴마저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늘 근엄하고 엄격하던 표정은 기묘한 열기로 인해 일그러져 있었고 낮고 위엄 있던 목소리는 비음과 신음에 섞여 불안하게 흔들린다.
더군다나 그런 아버지의 그림자에 짓눌리듯 깔려 있는 이는 얼마 전 저택에 들어온 젊은 신입 하녀 민친이 아닌가?
민친 역시도 평소의 희던 모습은 간 곳이 없다.
거칠게 찢어진 옷에는 주름과 음영이 가득 져 있었고 평소에는 옷 안에 가려져 있던 은밀한 피부 곳곳에는 피멍이 들어 붉고 푸르다.
말수는 여전히 적었지만 쉴 틈 없이 목젖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교성은 그녀를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그 둘의 헐떡이는 숨소리에는 명백한 색(色)이 묻어 있었다.
흰 사람들이 서로의 몸을 탐하며 붉게 물들어 가는 광경.
솔거는 그만 접시를 떨어트릴 뻔했다.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어린 하녀 민친.
솔거는 그 광경을 뒤로 하고 도망쳐 버렸다.
무서움? 설렘? 흥분? 공포? 전율? 기대? 고양? 두려움? 죄책감? 후회? 배신감? 충격? 어지러움? 배덕감?
가슴이 미친 듯이 고동쳤지만 그 이유를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비정상적인 심장 박동을 어떻게든 숨겨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저택 상층에 있는 자신의 방까지 가는 회랑이 오늘따라 유난히 길고 구불구불하다.
벽에 걸려 있는 흰 횃불들이 마치 자신을 감시하는 시선들처럼 느껴졌다.
…쾅!
방으로 도망쳐 문을 두 겹, 세 겹으로 걸어 잠근 솔거는 원인 모를 두근거림에 이불로 자신의 몸을 꽁꽁 옥죄였다.
그날 밤, 흰 이불이 더욱 희게 물들었지만 그 사실을 눈치 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솔거 본인조차도.
* *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위해 테이블 앞에 앉은 솔거는 한 잠도 자지 못한 얼굴로 눈앞의 음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유와 계란 흰자가 그의 앞에서 하이얀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문득, 솔거는 자기 앞에서 식사 시중을 드는 하녀를 바라보았다.
어린 하녀 민친. 그녀가 담담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젯밤의 색(色)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흰 얼굴.
하지만 가슴과 목을 두텁게 가리고 있는 흰 천 너머의 살결이 어떤 색으로 물들어 있는지 솔거는 안다.
테이블 앞에서는 아버지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격식에 따른 절도 있는 칼질과 포크질.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엄격하고 근엄하며 진지한 모습이다.
달그락-
식기가 긁히는 소리, 아버지의 표정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계란에 노른자가 섞여 있군.’
말마따나, 흰색에 미미하게 노란색이 섞여 있다.
…짜악!
아버지는 옆에 있던 민친의 등을 채찍으로 후려갈겼다.
민친은 비명 한 번 없이 채찍을 감내했다.
심지어 잔에 따르는 중이었던 백포도주 역시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민친은 재빨리 테이블 밑으로 숨어들어가 붉게 물든 상처에 흰 분을 발랐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피부는 이내 흰 분에 의해 덮인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달그락… 달그락…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기색(氣色), 가족들 중 그 누구도 이 광경을 문제 삼지 않았다.
식사는 그렇게 계속 이어진다.
조찬이 끝나고 난 뒤, 솔거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민친을 불렀다.
‘무슨 일이세요 도련님?’
민친은 사무적이고 딱딱한 어조로 솔거의 앞에 섰다.
솔거는 자신조차 이유를 알 수 없는 민망함과 죄책감에 잠시 쭈뼛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네가 어젯밤에 아버지랑 하던 걸 봤어.’
남녀 간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저 순수한 의도로 말했을 뿐이다.
솔거의 입장에서는 ‘그 일’을 어떻게 지칭해야 할지 몰라 그냥 ‘했다’고만 말했을 뿐이건만, 민친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솔거의 입을 막았다.
그녀의 안색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흰 분 밖으로까지 드러나 보일 정도로.
‘제발 안주인님께는 말씀드리지 말아 주세요. 뭐든지 할게요.’
‘뭐든지 한다고?’
솔거는 ‘뭐든지 한다’라는 말의 뜻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민친이 지금 왜 이러는지도 몰라 그저 당황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솔거를 본 민친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울 뿐이다.
‘주인님과 같은 반문을 하시는군요.’
그녀의 입에서는 더욱 더 영문 모를 말만 나왔다.
민친은 솔거의 앞에서 옷고름을 풀어 헤쳤다.
이빨 자국. 솔거나 민친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우악스러운. 마치 금지된 숲 너머에나 살 것 같은 추악하고 무시무시한 짐승의 그것 같은.
그 외에도 민친의 목과 가슴은 온통 피멍으로 붉고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흰 색 이외의 색에 솔거는 순간 넋을 빼앗겼다.
그는 손을 뻗어 민친의 살결 위에 발린 흰 분 가루들을 걷어냈다.
그러자 시퍼런 멍과 빨갛게 상기된 피부색이 더욱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너의 색……’
‘예. 저와 섹……’
솔거와 민친은 입을 열었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솔거는 민친이 당황하는 이유를 잘 알지 못했으나 피부색이 변한 것을 들킨 일 때문에 그러는가 싶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저택, 아니 이 마을에서 흰 색 이외의 색을 띄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솔거는 훌쩍이는 민친을 바로 앉힌 뒤 옷매무새를 고쳐 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너는 왜 다른 색을 가지고 있는 거야?’
솔거의 순진무구한 질문에 민친은 당황했다.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자 솔거는 그 당황의 이유를 제멋대로 해석했다.
‘너도 이 마을 사람이라서 잘 모르는구나.’
‘……예? 예에. 뭐.’
‘우리 말고도 다른 색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마을 바깥에는 신기한 색들이 많겠지?’
솔거의 괴짜스러운 요구에 민친은 어리둥절해 했다.
그리고 이내, 민친의 눈에는 서슬 푸른 빛이 감돌았다.
어젯밤의 오욕, 복수심, 그리고 그 광경을 본 목격자에 대한 불안감이 그녀의 혓바닥을 제멋대로 놀려 놓았다.
‘도련님. 흰 색 말고 여러 가지 색을 보고 싶으세요?’
‘응. 궁금해.’
민친의 살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솔거의 대답이었다.
민친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입을 열었다.
휘이이잉-
그녀가 창문을 열고 몰아치는 눈보라 너머로 가리킨 것은 금지된 숲 저편, 저 멀리 외떨어진 절벽 위에 있는 한 수도원이었다.
‘혹시 저 산 너머 수도원에 사는 마녀에 대해 들어 보신 적이 있나요?’
‘……마녀? 그게 뭐야?’
‘음, 이 세상의 색(色)이란 색(色)은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죠. ‘색을 먹는 에스더’라고 불릴 정도인걸요.’
민친은 저 스스로도 치를 떨 정도의 교활함으로 솔거를 꼬드겼다.
‘그녀를 찾아가면 아마 이 세상의 모든 색(色)다른 색(色)을 경험해 볼 수 있을지 모르…….’
민친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솔거가 바로 제 방으로 뛰어 올라갔기 때문이다.
겉옷을 챙기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