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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772화 (772/1,000)
  • 772화 색정광(色情光) (5)

    “제가 한번 솔거 씨를 고쳐 보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모르자니우스는 회의감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난 수십 년간 아무도 고치지 못했던 솔거 삼촌이야. 이 광증은 악마에게 홀려서 생겨난 것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을 것이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계속된 내 말에 모르자니우스는 고심하는 기색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 피부색은 절대백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완벽한 흰색, 그 때문에 호감도가 MAX상태였던 모르자니우스는 일단 내 말을 믿어 주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겠네.]

    그는 나를 첨탑 꼭대기에 남겨두고는 혀를 끌끌 차며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가능한 검은색을 밟지 않도록 흰 신발코로 바닥을 총총 딛으며.

    “무슨, 어렸을 때 횡단보도 흰 금만 밟는 것 같네.”

    초등학교 다닐 적에는 혼자서 그런 상상 많이 했다.

    검은 부분을 밟으면 죽는 거고 흰 부분을 밟아야 살 수 있다며 총총걸음을 하다가 검은 부분을 밟으면 숨을 참으며 이번 한번은 연습이라고 넘어가던 그 시절.

    모르자니우스가 깨금발로 회랑을 총총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자, 그럼 어디 볼까.”

    나는 그동안 솔거의 기행을 옆에서 쭉 지켜보았다.

    솔거.

    그는 흰 도화지를 한 장 집어다가 온통 검은색으로 칠한다.

    종이의 한쪽 모서리부터 시작해서 대각선 방향의 모서리까지, 한 부분도 빠짐없이 검은색으로 꼼꼼하게.

    분명 NPC 이름 앞에는 ‘화가’라는 직업이 붙어 있었지만 그의 기행은 화가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하다.

    그림을 그릴 생각도 없이, 그저 종이를 단일한 색으로 꽉 채우는 것이 어떻게 그림이 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뭐, 그래도 일단 도와드릴게요.”

    이런 류의 기인과 친해지는 데에는 일단 단순 반복 작업을 함께 하는 게 도움이 된다.

    나는 붓을 들고 빨간색 물감을 듬뿍 찍었다.

    그리고 흰 도화지 한 장을 집어 들고 칠하려는 순간…….

    [지금 뭐 하는 거야!]

    솔거가 갑자기 붓을 내려놓고는 섬뜩한 눈빛을 뿜어냈다.

    “히익!”

    [헤엑!]

    [호앵!]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나도, 내 어깨 위의 쥬딜로페와 오즈마저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탁!

    솔거는 내 손에서 붓을 빼앗았다.

    그리고 사나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색이 아니야.]

    그는 빨간색 물감을 파레트에 개어 다시 도화지를 칠한다.

    나는 혼자 곰곰이 생각했다.

    ‘……그 색이 아니다?’

    보통 화가들이 자신의 그림에 누군가가 손을 댔을 때 이렇게 말하나?

    아니다. 아마 ‘손 떼’, ‘꺼져’, ‘어딜 만져’ 등등의 다른 욕지거리를 내뱉겠지.

    하지만 솔거의 대사는 뭔가 미묘하다.

    ‘그 색이 아니다’라는 것은 ‘맞는 색은 괜찮다’라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옆에서 솔거가 빨갛게 칠하고 있는 도화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고인물 특유의 룩겜 감각이 빛을 발한다.

    ‘흐음. 저 붉은색 색상은 아무래도…….’

    나는 약간이나마 감이 잡히는 것을 느꼈다.

    솔거 몰래 슬쩍 옆으로 빠진 나는 흰 도화지를 새로 한 장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내 깊은 심호흡을 한 뒤 솔거가 지금 쓰고 있는 붉은 물감을 집어 들었다.

    붉은색 물감에 아주 약간의 흰 물감, 극미량의 백색을 한 방울 떨궈 섞는다.

    그리고 자홍색 물감과 주황색 물감 역시도 한 방울씩 떨어트려 섞었다.

    그러자.

    -띠링!

    <아이템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물감으로 칠한 도화지는 솔거가 만들어 낸 것과 똑같은 아이템으로 변했다.

    -<솔거의 광기어린 분홍색 도화지> / 재료 / S

    미친 노인 솔거가 평생에 걸쳐 색칠한 종이.

    ##1899-E 223, S 204, L 0, R 0, G 0, U 0의 색 배열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로지 하나의 색으로 빈틈없이 꽉 채워서 다른 색이 들어갈 여지는 전혀 없다.

    내 손에 들린 아이템을 본 솔거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아니! 이 빨간색은 분명!?]

    나는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바로 어르신이 쓰고 계셨던 ‘쇼킹 핑크’ 색감을 그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다 같은 빨간색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나 정도 되는 고인물들의 눈으로 보면 게임 속 염료의 색깔은 명암비에 따라 수백, 수천 가지로 구분이 가능해진다.

    그것이 룩덕의 기본 소양이니까.

    [……흐음.]

    솔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홱!

    내가 색칠한 도화지를 가차 없이 구겨 버렸다.

    “……아앗!”

    내가 당황하자 솔거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종이의 모든 면에 동일한 양의 물감을 발라야 해. 색만 맞춰서는 의미 없어.]

    아, 그런 거였나?

    확실히 내가 색칠한 종이를 보니 어느 부분에는 물감이 두껍게 발라져 있고 어느 부분에는 물감이 얇게 발라져 있어서 채도의 차이가 조금 난다.

    그러니 물감이 적당히 발라진 부분은 ‘쇼킹 핑크’, 물감이 두껍게 발라진 부분은 ‘드래곤 핑크’, 물감이 얇게 발라진 부분은 ‘연지곤지 핑크’가 되는 것이다.

    “주의하겠습니다 선생님. 쇼킹 핑크로 통일하겠습니다.”

    [음.]

    나는 슬쩍 눈치를 보며 붓을 잡았다.

    솔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암묵적인 허락이었다.

    “좋았어.”

    나는 옆에서 솔거가 쓰는 색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가 물감을 섞는 정도, 농도를 얼마간 지켜보자 감이 온다.

    “으음. 레드 워터, 자몽 워터, 오렌지 워터, 핑크 워터, 코랄 워터, 체리 워터, 복숭아 워터, 레드 카런트, 스칼렛 레드, 토마토 레드, 아토믹 레드, 블러쉬, 루비 레드, 로즈 우드, 샌드 스톤, 와일드 레드, 베이지그루브, 로즈 뱅, 빅 보스, 킬 미 레드, 마스터 베이지, 번지 레드, 레드 코스터, 자이언트 브라운, 얼티밋 레드, 드래곤 핑크, 슈팅 로즈, 시티 로즈, 베리 레드, 페탈, 쇼킹 핑크…….”

    빨간색이라도 다 같은 빨간색이 아니었다.

    마치 남자들이 보기에는 다 똑같은 색처럼 보이는 여자들의 립스틱처럼 말이다.

    솔거는 언뜻 보기에는 그저 치매 걸린,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떠한 엄격한 룰과 규칙에 따라 스스로를 절제하고 통제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 도화지는 가로 488, 세로 1764…… 이 도화지는 가로 488, 세로 1765……]

    솔거는 도화지의 규격과 색에 따라 자신만의 기묘한 분류법을 세워놓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마구 쌓이고 널브러져 있던 이 도화지들은 사실 각각 솔거의 정교한 계산 아래 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까 모르자니우스가 아무 도화지나 한 아름 가지고 내려가 태워 버리려 했을 때 솔거가 필사적으로 말렸던 것이다.

    “엄청나네.”

    나는 방 안을 온통 꽉 채우고 있는 수많은 색 도화지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토록 방대한 시간 동안 색칠해 온 종이들, 그것들은 전부 뒷면에 아까 솔거가 중얼거린 것과 같은 기묘한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전부 받아 적기로 했다.

    “오즈, 쥬딜로페. 너희들이 고생 좀 해 줘야겠다.”

    [호-앵!]

    [뭐? 맡겨두라고? 이봐 벌레. 너는 자존심도 없나? 고작 이런 인간 따위의 부탁을 그렇게 기쁘게 수락할 이유 따위는…… 앗! 주인님! 지금 도화지 밟으셨어요 헤헤, 이건 제가 수거하겠습니다아-]

    쥬딜로페와 오즈가 열심히 도화지들의 번호를 외우고 받아 적는 동안 나는 바닥에 엎드려 색칠에 여념이 없는 솔거를 바라보았다.

    스슥- 스스스슥- 쓱- 스슥- 사사삭- 사사사사삭-

    그는 지금도 붉게 충혈된 눈으로 색을 칠하고 있었다.

    실로 대단한 집념. 어마어마한 색정광(色貞狂)이었다.

    *       *       *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게임 내 시간으로는 얼마나 지났을지 모르겠지만 현실의 시간으로도 꽤나 흘렀을 것이다.

    몇 번의 로그아웃과 재접속을 반복한 끝에.

    [뿌애앵-]

    [으극… 다 끝냈습니다…… 하찮은 인간…… 주인니임……]

    작업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쥬딜로페와 오즈는 온몸이 물감으로 범벅된 채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그놈의 쇼킹 핑크, 쇼킹 핑크, 쇼킹 핑크…… 이제 분홍색을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 지경.

    나 역시도 깊은 날숨을 내쉬며 도화지들의 산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솔거. 이 색정광 역시도 내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이윽고, 방 안에 가득 찬 도화지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던 그는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내 색칠을 도와준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야.]

    암요 그렇겠죠. 특히나 이곳 화이트워싱 마을에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솔거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나를 바라본다.

    [자네는 내가 무섭지 않은가?]

    “무섭긴요.”

    [악마에게 홀린 색정광 아닌가. 하하하-]

    솔거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그는 목에 걸린 검은색 목걸이 펜던트 하나를 내게 내밀어 보였다.

    과거 내가 벨제붑을 사냥할 때 사용했던 ‘어둠 대왕 솔로몬의 목걸이’와 비슷한 디자인인 것으로 보아 같은 이가 세공한 장식품인 듯싶다.

    …달칵!

    솔거의 손에 들어가자 자동으로 열리는 펜던트의 뚜껑.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 펜던트의 안에는 구릿빛 피부를 가진 한 여인의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빛이 바래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느낌 상 아름다울 것만 같은 미녀였다.

    [내 이야기 한번 들어보겠나?]

    당연한 일이다. 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여기까지 와서 이런 개고생을 한 것이니까.

    이윽고 솔거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거 미치도록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다네. 그녀는 아주 예뻤지.]

    ……아, 커플이셨나?

    나는 쇼킹 핑크 색으로 물든 손가락을 조용히 [SKIP] 버튼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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