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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771화 (771/1,000)
  • 771화 색정광(色情光) (4)

    스슥- 스스스슥- 쓱- 스슥- 사사삭- 사사사사삭-

    무언가가 바닥을 기어 다니는 소리가 시커먼 문 틈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철컥!

    내가 자물쇠에 열쇠를 꽂고 돌리자 그 소리는 뚝 멎는다.

    …….

    조용한 침묵.

    나는 문을 열기 전 잠시 바닥과 벽을 살폈다.

    시커먼 물이 들어 있는 복도. 자세히 살펴보니 마냥 검은색으로만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나는 손에 묻어나는 검은색 가루들을 툭툭 털었다.

    그것은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보라색, 갈색, 녹색 등이 서로 뒤섞여 만들어진 흑색이었다.

    수없이 많은 다양한 색들이 한 데 뒤섞이다 보니 검은색으로 보였던 것뿐, 방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은 색색의 물감들과 분들.

    끼기기긱……

    나는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이내 눈에 들어온 것은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깡마른 체구의 한 노인. 나이를 얼마나 먹었을까 가늠도 되지 않는다.

    다만 퀭하게 풀린 눈과 입가에 흐르는 침, 온몸을 뒤덮을 정도로 자란 백발과 흰 수염 때문에 나이를 한 수백 살은 먹은 것처럼 보였다.

    노인은 손목과 발목에 무거운 구속구를 차고 있었다.

    아마도 이 방에서 탈옥할 수 없게 가둬 놓은 듯한 모양새.

    그러나 정작 노인 본인이 이곳을 탈출할 생각 따위는 눈꼽만치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나를 경계하듯 힐끔 보고는 더욱 더 깊숙한 방구석으로 숨어들어간다.

    그러더니 하얀 도화지 한 장을 들어 손에 들고 있던 파스텔로 마구 칠하기 시작했다.

    스슥- 스스스슥- 쓱- 스슥- 사사삭- 사사사사삭-

    아까 방 밖에서 들었던 이 소리는 바닥을 기어 다니는 소리가 아니라 노인이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 도화질을 색칠하는 소리였다.

    문제는 노인의 색칠이 그냥 미치거나 치매에 걸린 이가 만들어 내는 수준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흰 종이. 그것이 노인의 손에 들어가면 단일색으로 전체가 칠해진다.

    노인은 손에 든 붉은색 파스텔로 커다란 도화지를 온통 새빨갛게 칠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빨간색으로 꽉 차게 된 도화지는 가차 없이 방구석에 내팽개쳐진다.

    빨간색 도화지가 내팽개쳐진 곳 옆에는 노란색으로만 칠해진 도화지, 그 옆에는 검은색으로만 칠해진 도화지, 그 옆에는 녹색으로만 칠해진 도화지, 그 옆에는 파란색으로만 칠해진 도화지…….

    노인의 광기는 멈출 줄 몰랐다.

    그는 무거운 수갑에 구속되어 있는 앙상한 팔목으로 미친 듯이 종이를 색칠하고 있었다.

    멍하니 풀린 눈, 입가에 흐르는 침.

    노인이 아무런 목적도 가치도 없이, 그저 미친 듯이 파스텔과 물감, 도화지만 낭비하고 있는 동안 이 옥탑에 쌓인 도화지들의 수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양이었다.

    “……광기가 그대로 느껴지네.”

    나는 꽤 넓은 방 안에 꽉꽉 들어차 있는 도화지들의 산을 둘러보았다.

    이 수없이 많은 도화지들을 색색으로 칠하는 동안 튄 파스텔 가루와 물감 방울들이 이 방을 완전히 검게, 나아가 복도까지 검게 물들인 것이다.

    스슥- 스스스슥- 쓱- 스슥- 사사삭- 사사사사삭-

    지금 이 순간에도 노인은 계속해서 도화지 하나를 새카맣게 색칠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털썩!

    결국 도화지를 반쯤 칠하다 말고 바닥에 고꾸라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어어? 저기요. 괜찮……”

    [괜찮네.]

    구속구를 찬 노인에게 다가가려던 나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바로 등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리니 저택 주인의 얼굴이 보인다.

    그는 눈앞에 있는 나와 노인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분은 나의 먼 삼촌이시지. 성함은 ‘솔거’라고 하네.”

    그러자 비로소 쓰러진 노인의 머리 위에 이름이 떴다.

    이 대저택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는 히든 NPC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

    나는 쓰러진 채 미동도 없는 그를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모르자니우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늘 이러시지. 홀린 듯 종이를 낭비하다가 지쳐 쓰러져 잠드셔. 종이나 물감이 떨어지면 탑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고함을 치고 울며 난동을 부려서 어쩔 도리가 없지. 그저 종이랑 물감, 죽지 않을 정도의 물과 식량만 지속적으로 넣어드리는 수밖에.]

    집 안에 이런 미친 이가 하나 있으면 정말 힘들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악마의 눈을 피해 숨을 죽이고 색을 숨긴 채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던가.

    모르자니우스는 이를 뿌득 갈았다.

    [이게 다 악마 때문이야. 형님의 말씀에 의하면 멀쩡하셨던 솔거 삼촌을 홀려 미치게 만든 ‘그년’ 때문에!]

    그년이라?

    내가 호기심을 보이자 모르자니우스는 솔거 노인에 대한 비사를 이야기했다.

    [별 거 아닐세. 솔거 삼촌은 원래 어렸을 적부터 조금 특이했다고 들었어.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무서워하고 기피하는 색(色)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지. 어른들이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을 피해 몰래몰래 색칠공부를 했던 모양이야.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사단이 났지.]

    모르자니우스는 침울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당시 우리 마을의 뒷산에는 ‘색을 먹는 에스더’라는 마녀가 살고 있었어. 그 불길한 년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지. 그리고 아직 어렸던 솔거 삼촌을 꼬드겨 미치게 만들었고.]

    “꼬드겼다면 어떻게?”

    [모르지. 하지만 그년은 분명 알 수 없는 마귀술을 펼쳐서 어린 솔거 삼촌을 뒷산으로 유인했어. 그리고는 솔거 삼촌을 타락시켜서 저 지경으로 만든 거야.]

    모르자니우스는 방 안 가득한 색색깔의 도화지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 에스더라는 마녀는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용맹하신 선조들께서 퇴치해 쫓아버렸지만…… 그 여자를 만난 이후로 솔거 삼촌은 저런 꼴이 되어 버렸지. 가엾은 삼촌.]

    나는 모르자니우스와 솔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모르자니우스는 솔거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솔거 삼촌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네. 우리는 절대로 삼촌을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매번 솔거 삼촌이 과로로 쓰러졌을 때면 이렇게 몰래 올라와 도화지들을 빼돌려 태워 버리곤 하지.]

    말을 마친 모르자니우스는 품에 안고 있던 새 도화지와 물감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방구석에 쌓인 빨갛고 파란 도화지들을 한 아름 안아들고 방을 나서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네놈이었구나! 이 도둑놈!]

    쓰러진 줄 알았던 솔거가 눈에서 섬뜩한 귀광(鬼光)을 뿜어내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도화지를 가져가려던 모르자니우스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 도둑놈! 감히 내 그림을 훔치려 하다니!]

    [으아앗! 삼촌! 왜 이러십니까! 저는 그냥 삼촌의 방이 좁을까 봐 이러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무슨 그림입니까! 그냥 도화지를 하나의 색으로만 칠하는 거면서!]

    모르자니우스와 솔거는 엎치락뒤치락 싸운다.

    결국 솔거는 모르자니우스의 손에서 도화지들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온통 빨간색으로만 칠해진 도화지, 온통 파란색으로만 칠해진 도화지, 온통 노란색, 녹색, 검은색. 남색. 고동색, 보라색 도화지들.

    솔거는 허둥지둥 도화지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한편, 모르자니우스는 흰 옷에 묻은 색깔들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아아! 안 돼! 마녀가 온다! 내 색을 빼앗으러 온다!]

    모르자니우스는 황급히 옷을 벗어 훌떡 뒤집었다.

    색깔이 있는 부분이 안으로 들어가고 흰 부분이 밖으로 나오자 그는 그제야 조금 안심하는 눈치다.

    나는 슬쩍 물었다.

    “아니, 색깔이 안쪽에 있으면 괜찮습니까?”

    [으응? 그럼 괜찮지. 자고로 색(色)이란 겉으로만 안 드러나면 되는 것 아니겠나?]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건 아니잖아요?”

    [중요한 것은 겉보기지.]

    모르자니우스는 아까의 허둥거리던 태도는 간 곳 없이 몸 구석구석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는 바닥을 기며 버둥거리는 솔거를 연민과 경멸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아무튼 큰일이야. 요즘 들어 삼촌의 광증이 더욱 더 심해지는 것 같아서.]

    모르자니우스의 말대로 솔거의 행동은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대사를 한번 들어보니.

    [##1991번 분홍색, 분홍색이 필요해. 어디에 있지? 이건가? 아니야 이 분홍색이 아니야. ##1991번 분홍색이 필요하다고! 아아, 어디에 뒀지? 분명 색칠했었는데……E 205, S 172, L 180, R 237, G 146, U 255의 그 분홍색이 아니면 안 된다고……여기! 여기다! 찾았다! 하하!]

    솔거는 수많은 분홍색 도화지들 중에서 한 장을 집어 들고는 품에 안으며 연신 키스를 퍼붓는다.

    그것을 본 모르자니우스는 더더욱 표정을 구겼다.

    [미쳤어. 정말 미쳤어. 삼촌은 어쩌면 영원히 구제가 불가능할지도…….]

    그러나.

    “……흐음.”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툭!

    발치에 와 닿는 도화지 한 장.

    아까 솔거가 미친 듯이 찾던 분홍색 도화지다.

    지금 솔거는 언제 그것을 찾았냐는 듯 어느새 다른 흰 도화지 한 장을 집어 들고는 그것을 미친 듯이 검은색 일색으로 색칠하고 있었다.

    스슥- 스스스슥- 쓱- 스슥- 사사삭- 사사사사삭-

    광기어린 집념으로 도화지를 까맣게 칠한 솔거는 이내 다른 흰 도화지를 집어들고는 그것을 갈색으로 칠하기 시작한다.

    나는 솔거가 아까 전에 입 맞추던 선분홍색 도화지를 집어 들었다.

    “아까 뭐랬더라? ##1991번 분홍색이랬나?”

    나는 아이템 하나를 슬쩍 꺼내들었다.

    -<정령들의 염색 키트> / 재료 / C

    아주 오래 전, 정령들이 악마들에게 멸종당하기 전에 만들어진 아이템이다.

    BOX 속에는 정령들이 친 장난이 그대로 남아 깃들어 있다.

    …열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도?

    여분으로 챙겨왔던 아이템.

    나는 이 키트를 집어 들고 아까 솔거가 중얼거렸던 데이터 값을 하나씩 입력해 보았다.

    “E 205, S 172, L 180, R 237, G 146, U 255……”

    그러자.

    츠츠츠츠……

    이내 키트 속 염색약은 선명한 분홍색을 띄게 되었다.

    솔거가 도화지를 색칠한 것과 같은 정확히 색이었다.

    “그렇다 이거지?”

    나는 바닥의 분홍색 도화지를 집어 들었다.

    -<솔거의 광기어린 분홍색 도화지> / 재료 / S

    미친 노인 솔거가 평생에 걸쳐 색칠한 종이.

    ##1991-E 205, S 172, L 180, R 237, G 146, U 255의 색 배열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로지 하나의 색으로 빈틈없이 꽉 채워서 다른 색이 들어갈 여지는 전혀 없다.

    그림이라기보다는 그냥 색을 칠한 종이에 가까운 이 도화지.

    하지만 이 잡스러운 아이템의 등급은 놀랍게도 무려 ‘S’랭크이다.

    나는 첨탑 꼭대기 방에 가득 가득 들어차 있는 이 도화지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모르자니우스를 향해 말했다.

    “제가 한번 솔거 씨를 고쳐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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