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770화 (770/1,000)
  • 770화 색정광(色情光) (3)

    -띠링!

    <흰 은둔자의 마을 ‘화이트워싱’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영구히 기록됩니다>

    나는 아카식 레코드의 알림음을 들으며 마을에 들어왔다.

    눈발이 흩날리고 있는 마을 안은 온통 백색이다.

    그 흔한 검은색 하나 없는 완연한 백색.

    자세히 보면 건물이나 땅, 바위에 쌓여 있는 하얀 눈 밑에도 흰색 도료들이 잔뜩 칠해져 있는 것이 보인다.

    눈 덮인 땅 위로 서 있는 가로수들 역시도 모두 백색, 걸어 다니는 사람들 역시도 모두 백색이었다.

    내가 마을 중앙 광장을 걷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모든 NPC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와! 저 사람 좀 봐! 진짜 하얗다!]

    [아름다워. 어쩜 저리 하얗지?]

    [세상에! 산화 티타늄보다 흰 사람은 처음 본다구!]

    [횽아! 점 어디서 뺐어요!]

    [기초화장품 뭐 쓰세요 오빠!]

    [치아미백 비법좀 알려주세요!]

    [선크림 추천 좀 부탁드립니다아-]

    .

    .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이들은 모두 호감도 MAX 상태이다.

    피부색이 바뀐 것만으로 호감도가 밑바닥에서 천장까지 차오르다니, 과연 특이한 마을이구나 싶다.

    나는 흰 눈이 내린 마을 심층부로 조금 더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몸을 웅크리고 허리를 숙이고 다니는 이들이 보였다.

    희지만 허름한 옷을 입었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며 청소나 무거운 것을 나르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아마 하층민으로 추정된다.

    “…….”

    나는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상류층 사람들과 저 앞의 하층민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상류층 NPC들은 옷과 피부색이 정말로 잡티 하나 없이 희다.

    반면 하층민 NPC들은 옷이 상류층들의 것에 비해 덜 희었고 피부에도 종종 멍이나 점, 탄 자국들이 보였다.

    피부색이나 옷차림뿐만이 아니라 표정까지 밝은 상류층과는 대비되는 어두운 표정들이었다.

    그때.

    [이 마을에서는 희면 흴수록 고귀한 대접을 받는다네.]

    누군가 내게 마을의 정보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자 언덕 위의 하얀 집이 보인다.

    눈 덮인 구릉 위에 크게 솟아나 있는 흰 대저택.

    그곳의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근엄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머리에 흰 수염과 흰 눈썹.

    나는 그의 얼굴이 꽤나 낯익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나를 향해 말했다.

    [이런 곳에서 형님의 은인을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갑군.]

    그는 예전 조디악의 자살교 토벌 당시 목숨을 잃었던 대현자 알자니우스의 동생이라는 설정이다.

    북방의 외곽, 극야지대의 한 마을에서 온 철학자이자 대현자.

    그는 조디악의 자살이론을 논파하러 왔다가 되려 당해 크레바스 아래로 곤두박칠 쳤던 비운의 NPC이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형님의 복수를 대신 해 주어 정말 고맙네. 이리로 옴세. 내가 차 한 잔 대접하지.]

    나는 모르자니우스의 초대를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백색 대저택 안에 내가 찾아야 할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       *       *

    내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 살고 있는 귀족들도 하인들도 모두 내 흰 살결에 넋을 빼앗긴다.

    특히나 아직 어려서 외부인들을 거의 접해보지 못한 어린 하인들의 동요가 제일 심했다.

    그때.

    …찰싹!

    내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어린 하녀의 뺨이 확 돌아간다.

    꼬장꼬장하게 늙은 하녀장이 어린 하녀의 뺨을 올려붙인 것이다.

    늙은 하녀장은 어린 하녀를 향해 아주 엄격하고 근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얘. 얼굴 색깔이 붉게 변했잖니.]

    [히익! 죄, 죄송해요!]

    어린 하녀의 두 눈에 공포가 일렁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숨을 참으며 가슴을 짓눌렀고 이내 원래의 다시 희고 창백한 낯빛으로 되돌아왔다.

    [그래. 항상 그렇게 흰 빛을 유지하렴. 그렇지 않으면 악마가 찾아온단다. 네 색을 빼앗으러 말이야.]

    어린 하녀가 겁에 질리자 하녀장은 비로소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향해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는 그녀의 안내를 받아 대저택 중앙에 있는 만찬실로 향했다.

    저택 내부 역시도 거의 백색 일색이었다.

    하얀 장작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백열(白熱), 집 거의 모든 곳에서 비추어지는 빛 때문에 그림자조차도 지지 않는다.

    분명 피부로 느껴지는 공기는 따듯했지만 눈으로 보는 공기는 차가웠다.

    흰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회랑을 지나 만찬실로 들어가자 온통 흰색 일색인 음식들이 보인다.

    흰 빵과 흰 수프, 흰 고기와 흰 채소, 흰 포도주와 흰 치즈, 흰 식탁보와 흰 식기류.

    음식은 꽤나 정갈하고 맛있었지만 어째 맛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슬쩍 고개를 돌린 곳에는 흰 피부의 늙은 하녀장 민친이 흰 수건과 흰 포도주를 든 채 시중을 들고 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 차가운 안색의 그녀는 내 잔이 빌 때면 어김없이 백포도주를 채워 준다.

    쪼르르륵-

    흰 잔에 흰 술이 차는 소리가 희다.

    눈앞에서 흰 촛불이 일렁거렸지만 식탁 위에도 그림자는 지지 않았다.

    문득, 저택의 주인인 모르자니우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저택이… 아니 우리 마을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소?]

    “조금 이상하다뇨. 많이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 외부인에게는 말이야.]

    모르자니우스는 내 말을 씹고 자기 대사만 내뱉는다.

    [먼 옛날, 이 도시는 무시무시한 악마의 방문을 받았다오.]

    아주 오래 전, 화이트워싱 마을을 찾아온 한 악마는 마을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전부 앗아 갔다고 했다.

    악마의 저주를 받은 뒤로부터 이 마을에는 흰 피부의 사람들만이 태어났고 그들은 색을 탐하는 악마가 또 방문할까 두려워 그의 눈에 띄지 않게 항상 아무런 색도 없는 백색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리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악마는 수많은 용사들을 터럭처럼 날려버린 뒤 모든 이들을 자신의 색욕(色慾)을 충족시키기 위한 노예로 삼아 버렸소. 우리처럼 엄격하고 신실한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는……] [SKIP]

    응 스킵.

    시간도 별로 없으니 딱히 메인 스토리에 지장가지 않는 선에서는 좀 빨리빨리 플레이하고 싶다.

    나는 모르자니우스의 말을 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식탁의 맞은편에 커다란 액자 하나가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도 희고 옷도 희고 배경도 흰 색이라서 무슨 커다란 도화지를 걸어놓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가족들의 초상화이다.

    “…….”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초상화를 살펴보았다.

    흰 액자에 걸려 있는 흰 종이. 흰 얼굴, 흰 머리카락, 흰 옷의 사람들.

    하나같이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들을 짓고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이윽고,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화 중 유일하게 얼굴이 찢어져 있는 한 명을 발견했다.

    …드르륵!

    나는 의자를 밀어내고 일어나 바로 초상화를 향해 달려갔다.

    초상화의 찢어진 부분에 손을 대자.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기다렸던 메시지가 뜬다.

    <히든 퀘스트 ‘망나니 색정광(色情狂)과의 조우’>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모르자니우스의 대저택 속 숨겨진 초상화 터치’>

    <히든 퀘스트 수행 제한: ‘흰 용 카프카타렉트, 혹은 흰 악마 레비아탄을 만나봤던 자>

    <히든 퀘스트 완료 조건: ‘색의 방 입장’>

    <※이 퀘스트는 여러 가지 의미로 위험합니다>

    경고문구부터가 살벌한 히든 퀘스트이다.

    ‘여러 가지 의미로 위험하다고?’

    퀘스트 메시지 자체에 이런 불길한 첨언이 되어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찢어진 초상화에 손을 대자, 기다렸다는 듯 모르자니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초상화의 주인이 궁금하오?]

    “네.”

    그러자 모르자니우스는 드물게도 눈 밑에 그늘을 드리운다.

    물론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옛날, 우리 가문에도 있었지. 악마에게 홀려 색정광이 된 망나니가. 나의 먼 삼촌인데…….]

    “저는 그 분에게 볼 일이 있어서요.”

    [그는 지금 만날 수 없소. 악마에게 홀린 것이 너무 심해 수십 년째 첨탑 꼭대기, 독방에 갇혀 있거든. 그래도 정 삼촌을 만나고 싶다면야…….]

    모르자니우스는 허리춤에서 열쇠를 꺼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하녀장 민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안내해 드리게 민친. 형님의 은인인지라 부탁을 거절할 수 없구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주인님.]

    늙은 하녀장은 열쇠를 받아들고 나를 안내한다.

    그녀가 나를 안내한 곳은 아주 좁고 높은 첨탑. 대저택의 가장 외진 곳에 봉인되다 시피 한 구역이었다.

    달팽이의 껍질 속 관을 따라 올라가는 것처럼 온통 백색의 회랑이 나선형으로 솟아 있다.

    보고 있노라면 절로 정신이 피폐해지는 광경이었다.

    [이쪽으로 쭉 더 가시면 됩니다. 열쇠로는 방문만 열 수 있고 구속구는 풀 수 없으니 이 점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민친은 탑의 중간 부분에서 멈춰선 채 더 이상 올라가기를 거부했다.

    드물게도 상당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왜 저래?’

    나는 열쇠를 들고 얼마간 계단을 올라갔다.

    그때.

    [손님!]

    민친이 다시 한번 나를 부른다.

    내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그녀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당부해 온다.

    [……절대 현혹되지 마십시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민친은 마치 두려운 것을 눈앞에 둔 소녀처럼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다시 열쇠를 꽉 움켜쥐었다.

    오르던 계단을 마저 오른다.

    그리고 이내, 나는 왜 그 꼬장꼬장한 하녀장이 이토록 겁을 먹었는지 알게 되었다.

    흑색(黑色).

    지독할 정도로 시커먼 색이 어느덧 회랑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어느덧 이곳 외로운 첨탑의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한 것이다.

    검은색 기류가 뭉게뭉게 뿜어져 나오는 외딴방.

    나는 열쇠를 든 채 계단을 마저 올랐다.

    스슥- 스스스슥- 쓱- 스슥- 사사삭- 사사사사삭-

    무언가가 바닥을 기어 다니는 소리가 시커먼 문 틈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

    나는 검은 방 앞에 바짝 다가가 섰다.

    그리고, 심연과도 같이 깊은 열쇠 구멍으로 열쇠를 밀어 넣고 돌렸다.

    …철커덕!

    복도를 울리는 쇳소리.

    그와 동시에.

    ……!

    방 안에서 들려오던 불길한 소리가 뚝 멎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