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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759화 (759/1,000)
  • 759화 달을 부수는 자 (4)

    블레어는 마치 손 안에 들어온 사냥감을 바라보듯 득의양양해 있었다.

    “뭣 때문에 스스로 불리함을 자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오만했다. 한국은 네 덕분에 결승전까지 올라왔다가 너 때문에 떨어지겠구나.”

    이윽고, 블레어가 부리는 사슬들이 뱀처럼 흐늘거리며 내 주위를 포위했다.

    하지만.

    “…….”

    나는 그저 조용히 왼손만을 땅바닥에 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본 블레어는 한 번 더 조소를 머금었다.

    “멍청한 놈. 이곳은 ‘적도의 쌍심’이다. 와류는 생기지 않아. 암만 발버둥 쳐 봐라. 맵의 특성을 극복할 수 있나.”

    그렇다. 이곳은 적도의 쌍심. 두 개의 달이 심장처럼 고동치는 구역! 코리올리 특성으로 인해 모든 전향력(轉向力)이 봉인되는 곳이다.

    그걸 아는 블레어는 한층 여유로운 태도로 앞을 향해 걸었다.

    곧이어 자기 발아래 놓이게 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천천히 톺아보면서.

    ……바로 그 순간.

    “응?”

    블레어는 뭔가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주 살짝, 미약하게 느껴지는 위화감.

    그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모든 것이 그대로다. 다만 눈앞에 있는 상대가 약간 오른쪽으로 이동해 있는 것을 빼면.

    “뭐야? 어느새 옆으로 움직였지?”

    블레어는 내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태연하게 대꾸할 뿐이다.

    “난 안 움직였는데?”

    “거짓말 마라. 방금 전까지는 좀 왼쪽에 있었잖아. 지금은 오른쪽에 있고.”

    “나 안 움직였다고.”

    내가 거듭 말하자 블레어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 순간.

    ……오싹!

    블레어의 안색이 조금 바뀌었다.

    녀석 역시도 나름 탑클래스의 랭커, 돌아가는 상황을 모를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다.

    정말로 상황은 돌아가고 있었다.

    드드드드드드드……

    나를 중심으로 천천히, 시계 방향으로, 땅이 회전하고 있다.

    “어엇!?”

    블레어는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꾸드드득…… 드드드드드……

    앞서 설명했듯, 대지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협곡 전체가 옅게 떨릴 정도의 미약한 지진, 그것이 이 골짜기를 통째로 들어 옮기고 있다.

    우드득! 우득! 쿠르릉!

    산사태가 일어나며 협곡 곳곳에서 부분적 붕괴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한 와류의 징조!

    “뭐, 뭐야 이게!?”

    블레어는 기겁을 하며 다시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여전히 왼손을 땅바닥에 대고 있다.

    내가 뿜어내고 있는 와류의 힘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이 땅 전체에 작용하고 있었다.

    협곡 전체가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뒤틀리고 있는 것을 눈치 채자 블레어는 핏대를 세우며 항의를 했다.

    “말도 안 돼! 저 하늘의 달을 보라고! 두 개의 달이 분명히 떠 있잖아! 북쪽 달과 남쪽 달이 맞닿는 지역이란 말이야! 어떻게 와류가 생길 수 있어!?”

    블레어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밤하늘의 두 달을 바라보았다.

    십 수억 시청자들의 시선이 블레어를 따라 하늘의 두 달을 향한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가 보았다.

    …쩍!

    밤하늘의 이변을,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풍경의 위화감을.

    남쪽 하늘에 떠 있는 달.

    그것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쩌적! …쩍!

    둥그런 보름달에 시커먼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십 수억 명의 사람들은 모두 일제히 눈을 비빈다.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의심하면서.

    뭐, 물론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 중 몇몇의 눈이 정말로 이상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거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그것은 그들이 지금 실제로 벌어지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는 뜻이다.

    달이 부서지고 있었다.

    쩌적! 쩌저저적! 콰콰쾅!

    이윽고, 굉음과 함께 남쪽 하늘에 떠 있던 달이 부서졌다.

    …우르르르릉!

    1차 대격변 저리 가라 싶을 정도로 엄청난 기세, 무시무시한 붕괴가 실시간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속보가 들어왔다.

    [아아! 남쪽의 달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꿈이 아니라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예!?]

    [지금 GM 처리반측에서 긴급 출동을 한다고 합니다! 시청자 여러분들은 붕괴로 인한 데미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소, 속보입니다! 방금 전 캡슐 문이 열리며 튜더 선수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일순간 기절했었다고 하는데 의료진 검사 결과 특별한 이상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답니다.]

    [참고로 튜더 선수가 캡슐 밖으로 나왔을 때는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답니다. ‘닐 암스트롱’의 기분을 알 것 같다며!]

    한편, 하늘을 보고 있던 블레어의 표정은 이제 거의 시체의 것처럼 검게 죽어 있다.

    “저, 저 방향은 설마……?”

    놈도 눈치 챈 모양이다.

    달이 무너지고 있는 방향, 그곳은 바로 전 라운드에서 별똥별이 된 튜더가 날아갔던 방향이다.

    이윽고 시선을 내리는 블레어.

    나는 그와 눈을 맞추며 오른쪽 주먹을 한번 흔들어 보였다.

    내가 발록 모드로 변해 후려갈긴 주먹은 튜더를 남쪽 하늘로 날려버렸고 그렇게 해서 탄환처럼 날아간 그는 남쪽에 있던 달에 부딪쳤다.

    그리고 한계까지 강화된 나의 힘은 끝끝내 달마저 부숴 버렸던 것이다.

    튜더가 죽는 순간, 달의 몰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붕괴물이 조금 우려가 됐는데… 처리반들이 나서 준다니 다행이네.’

    세계 각국의 처리반에는 유능한 마법사들이 많다.

    그들이 모두 모인다면 떨어져 내리는 달쯤은 막아 낼 수도 있겠지.

    ……뭐, 못 막아 낸다면. 그땐 내 알 바 아니다.

    ‘적어도 백섭이라도 시켜 주겠지 뭐.’

    백섭이 되든 어쨌든 간에 대회 우승 기록은 그대로 남을 테니까.

    “자, 그럼 어디. 와류로 조져 볼까?”

    왼손에 본격적으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남쪽의 달이 사라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북쪽의 달뿐이다.

    반시계 방향으로 흐르던 억제력이 사라진 지금, 북쪽 달이 뿜어내는 시계 방향으로의 전향력이 제대로 그 힘을 받는다.

    동시에, 나의 와류 역시도 북쪽 달의 힘을 받아 더욱 더 강력한 가속도를 얻게 되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쿠르르르르르륵-

    협곡이 통째로 믹서기 안에 들어온 양 회전하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오로지 나 하나,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온 세상이 돌아간다.

    무시무시한 힘에 의해 요동치는 대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갈려 나가는 그 흐름의 한가운데에 블레어가 있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블레어, 초속 30미터가 넘어가는 초대형 폭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블레어를 살려두고 있었다.

    와류의 흐름을 조절하여 블레어가 낙석에 맞지 않게, 최대한 공회전만 하도록 돕는다.

    죽음을 각오한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던 블레어는 이내 계속되는 회전에 의아한 듯 소리쳤다.

    “죽여! 왜 안 죽이는 거야 이 악마야!”

    아주 좋은 질문이다.

    내가 그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네 뼈와 살을 분리하기 위함이지.”

    그렇다. 바로 원심분리(遠心分離)!

    나는 광활하고 거대한 와류에 놈을 장시간 봉인해 버릴 생각이었다.

    그래야 지금껏 당한 걸 조금이라도 갚아 주지 않겠는가?

    *       *       *

    “……처참한 꼴이군.”

    페이사와 비앙카 사이로 지친 기색의 튜더가 비집고 들어왔다.

    페이사는 그리 놀란 기색이 아니었지만 비앙카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어버버 거렸다.

    “너, 너너! 뭐하는 거야!”

    “경기 관람 하러 왔다.”

    “이래도 되는 거야?”

    “당연히 안 된다.”

    경기 도중에는 당연히 선수는 대기실을 떠날 수 없다.

    지금은 엄연히 경기 중임으로 대기실을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튜더는 비앙카의 말에 그저 픽 웃어 버릴 뿐이었다.

    처음 보는 생경한 태도에 비앙카의 말문은 더욱 막혀 버렸다.

    “의료실에 잠시 갔다 온 것이고 복귀 중에 들렸을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19조 3호 규정상 나는 11분의 시간을 더 밖에서 보낼 수 있지. …더 이상 팀원에게 오더를 내리거나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낸다면 말이야.”

    “…….”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벙긋벙긋 거리는 비앙카.

    반면, 그의 말을 차분히 듣고 있던 페이사는 짧게 한 마디를 건넸다.

    “…멀리서 보고 싶었던 거군.”

    “그래.”

    튜더의 눈빛은 깊어졌다.

    “더 멀리서, 더 똑똑히.”

    경기장 안을 세차게 휘몰아치는 와류를 지켜보던 튜더는 시간이 되었는지, 연락을 받았는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건가?”

    페이사의 말에 튜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 한다. 비록 졌지만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을 마친 튜더는 경기장 안을 보고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혹시…….”

    “……?”

    튜더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의……회오리 감자…라는 음식을 아나?”

    *       *       *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마새꺄아아아아아아아-”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빙글빙글 도는 블레어.

    이내 놈의 옷과 아이템들이 모조리 벗겨져 날아간다.

    완연한 알몸이 된 블레어는 긴 토사물의 궤적을 그리며 회오리의 바람결을 따라 하염없이 뱅글뱅글, 초고속으로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나자.

    흐물흐물흐물……

    알몸이 된 블레어는 이내 연체동물이라도 된 양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본인도 당황스러워할 정도의 변화.

    나는 피식 웃었다.

    “초고속으로 회전하고 있는 동안에는 게임 속 몸이 무중력 상태에 처해 있다고 판단, 몸을 중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지탱할 체내의 뼈가 불필요하다는 계산 하에 조금씩 조금씩 캐릭터 속의 뼈가 줄어들지. 온갖 분비물 등을 통해 빠져나가는 뼈의 칼슘 성분은 한 달에 약 1%, 약 100개월 뒤에는 전신의 뼈가 없어진다는 이야기야.”

    그래서 실제로 우주비행사들은 꾸준히 뼈를 강화하고는 한다.

    하지만 평소 칼슘과 뼈 건강에 관심이 없던 우리 블레어 어린이는 대가를 치러야겠죠?

    “으아아아아아아아이게에에에에뭐어어어야아아아아아아-”

    블레어는 빙글빙글 도는 와중에 완전히 연체동물처럼 되어 버렸다.

    “본인. 방금 연포탕 끓여먹는 상상해 봄.”

    나는 오른손을 확 뻗어 와류 폭풍의 힘을 뚫고 블레어의 멱살을 잡아 끄집어냈다.

    촤아아악!

    내 손에 잡힌 블레어는 축 늘어져서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알몸에 토사물 범벅.

    거기에 마치 수산시장에서 떨이로 산 물 간 세발낙지마냥 흐늘흐늘 늘어진 모양새.

    온몸의 뼈가 죄다 빠져나가 심지어 이빨마저 없게 되었다.

    “이리 와 봐. 시켜 볼 게 있어.”

    나는 블레어를 들어 올려 덜렁덜렁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지…….”

    블레어는 흐물거리는 혀를 움직여 겨우겨우 한마디를 내뱉는다.

    “GG.”

    선수가 스스로의 의지로 기권 선언을 한, 무려 세계리그 정상에서 벌어진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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