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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758화 (758/1,000)

758화 달을 부수는 자 (3)

“드루와-”

내 손짓을 본 블레어의 얼굴은 에이포용지처럼 하얗게 질린다.

“빨리 내려와. 0초 킬 해 줄 테니까.”

내가 계속해서 손짓하자 이내 블레어가 필드로 조심조심 나온다.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이스링크를 디뎌 보는 아이처럼 겁먹은 태도로 발끝을 톡 대는 블레어.

내가 막 지진을 일으키기 위해 주먹을 들어 올리자.

“…자, 잠깐만!”

블레어가 빽 소리쳤다.

이내 녀석은 내가 전전전라운드에 했었던 공약을 언급했다.

“나, 나를 상대할 때는 와류로만 상대한다고 했잖아! 자기 공약을 지켜야지, 응?”

다급한 나머지 아무 말 대잔치를 하는 모습.

그나저나 공약을 지킨다? 정치인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뭐,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했다.

“맞다. 까먹을 뻔했네.”

나는 내가 예전에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너는 무조건 ‘와류’ 만으로 잡아주마. 다른 어떠한 스킬도 쓰지 않고 말이야.’

블레어가 태그를 하며 도망치기 직전, 분명 내 입으로 했던 말이다.

동시에 캐스터들 역시도 수근거린다.

[아, 블레어 선수. 저게 무슨 발언입니까? 진짜 없어 보입니다.]

[상대 팀의 자비에 구걸하는 모습이라니, 자칭 대영제국이라 하던 그 위엄은 어디 갔나요?]

[세계리그에서 핸디캡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마동왕 선수가 저 주장을 받아 줘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황당하네요. 정말 프로로서 한심한 모습입니다! 실격 처리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예요!]

[하지만 마동왕 선수, 와류 특성으로 괜찮을까요? 이 맵은 적도의 쌍심! 두 달의 힘 때문에 어떠한 와류도 생겨나지 않는 중립구간입니다! 와류라는 특성 자체가 봉인되는 맵인데 과연 와류만으로 적을 잡는 것이 가능할지……!]

블레어에 대한 비난이 쇄도하고 있었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할 캐스터들이 이럴지언데 관중들과 시청자들의 반응은 뻔하다.

-추레어야 블하다

-먼소리야 와류없는 맵에서 와류로만 공격하래;;;;;

-프로리그에서 무슨 핸디캡을 달라고 해 ㅂㅅ...ㅋㅋㅋㅋ

-블레어 때문에 우리 애기들 방으로 들어가라 했어요. 저런 천하의 개썅놈은 교육상 안 좋을 거 같아서요~~~에휴~~~

-그와중에 핸디 준다고 하는 마동왕 인성....그저 갓...

-와류, 메킷, 맨. 와류가 사람을 만든다. 마동왕 사랑의 맴매 가자!

-저런 놈이 영국인이라니ㅠㅠㅠ

-누가 저런 인간을 의원으로 뽑았지???

-오피셜) 병무청, 블레어의 입국 금지 선언.

-저ㅅㄲ는 지가 의원 당선되기 전에 했던 공약도 하나도 안 지킨 ㅂㅅㅅㄲ가 뭔 공약타령ㅋㅋㅋㅋㅋ

-영국인을 대표해 대신 사죄드립니다...

-아우 저 새끼 저거 내 후임으로 들어왔으면 그냥 아주 경계 근무 나가서 어휴!!

-블레어 너 내가 똑똑히 얼굴 기억했어. 내 눈에 띄지 마라. 참고로 난 제주도 산다ㅡㅡ

.

.

블레어는 전 세계적으로 욕을 먹고 있었다.

심지어 같은 영국인들에게까지도!

심지어, 블레어는 이 와중에 내게 충격적인 제안을 하기까지 했다.

“후후, 정말로 와류 특성만 쓸 것이라면 공식적으로 약속을 해라.”

블레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눈앞에 상태창 하나가 떠올랐다.

블레어의 마법 기술인 ‘특성봉인’, 이 기술은 매우 한정적인 스킬로 상대방의 동의를 구한 뒤 상대방의 특성들을 일정 시간 동안 봉인하는 것이다.

예전에 벨제붑이 보여 주었던 폭식 특성과도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블레어의 기술은 꼭 상대방의 동의를 얻은 후에만 효과가 발동된다는 것.

상식적으로 자기 스킬을 봉인하도록 허락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마음대로 해라.”

나는 흔쾌히 블레어의 주장을 받아 주었다.

내가 블레어의 제안을 수락하자.

처처처처척!

이내 내 몸에 반투명한 쇠사슬과 자물쇠들이 주렁주렁 매달린다.

오직 왼손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봉인되었다.

이제 나는 정말로 ‘와류’ 특성밖에는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하하하하하! 도대체 무슨 허세냐 그게! 꼴 좋구나!”

와류를 제외한 내 모든 능력이 봉인되자마자 블레어는 바로 기세등등해졌다.

필드에 발가락 하나 올려놓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방금 전까지의 태도는 간 곳이 없었다.

튜더조차 패퇴한 지금, 자기가 영국의 마지막 주자가 되었고 이제 막대한 핸디캡을 짊어진 나를 이길 일만 남았다는 사실에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캐스터들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아, 마동왕 선수! 블레어 선수가 제안한 핸디캡을 수락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이 맵에서는 와류 특성이 통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적도의 쌍심’은 두 개의 달이 가지고 있는 힘이 상쇄되는 코리올리 구역이라서 모든 회전력은 소멸하는 구간! 마동왕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와류’도 지금은 자체 봉인 상태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되면 마동왕 선수는 정말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블레어 선수의 땡깡을 받아준 겁니까!? 설마 심리전에 당하기로 한 걸까요!?]

WUO 공식 홈페이지의 시청자 게시판 역시도 난리가 났다.

-어? 아니 저건 좀 너무 갔는데?

-이건 진짜 뇌절;;

-오잉...? 이러면 마동왕이 이길 수가 없지!?

-돌았나? 저걸 왜 수락함???

-세계리그에서 저런 만용이라니;;;;

-가오가 몸을 지배해 버려따....

-않이...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뭔데 갑자기 왜 분위기 싸늘하게 식게 만드는데!

-마왕 형...국제무대에서 이렇게 형 맘대로 하는건 좀 아니잖아...

-오기도 적당히 부려야지ㅡㅡ하차한다

-망했다..다된밥에 블레어 뿌리기 무엇?

-튜더까지 잡아놓고...허세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구나...

-일절에 이절에 삼절에 이어서 뇌절에 돌림노래에, 매기는 소리, 받는 소리, 도돌이표, 달세뇨, 아오소포겐까지 다 하네 완전

-대체 먼 생각이여????

.

.

방금 전까지 나를 찬양하던 시청자들마저 생각 없다고 욕하고 있다.

그만큼이나 나의 핸디캡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윽고.

블레어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 웃어대며 온몸의 마나를 끌어올린다.

“푸하하하하! 봐라! 속으로는 아차 싶을 거다! 바보 같은 놈! 그 자만심 때문에 결국 마지막 피날레가 나한테 오는구나! 그러니까 사람은 지킬 수 없는 공약을 남발하면 안 되는 거야!”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마법이 시전되었다.

차라라라라라락-

수없이 많은 쇠사슬들이 뱀처럼 고개를 들어 내 주위를 포위했다.

마치 최후의 피날레를 장식하려는 듯, 천천히 천천히 내 주위를 옥죄여오며.

그러나.

‘……어차피 다 예견했던 바.’

나는 날아드는 마법들을 보며 그저 웃을 뿐이다.

모두의 경악과 비웃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빛, 비난, 조롱, 걱정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자양분으로 삼아 게임 역사상 길이 남을 가장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벌일 생각이었다.

스윽-

나는 아무런 말없이, 그저 조용히 왼손을 땅바닥에 가져다 댈 뿐이다.

최후의 쇼가 시작되었다.

*       *       *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지? 사람 새낀가?”

VIP석에 앉아서 블레어의 행동을 지켜보던 비앙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벌린다.

그러자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치인들이란 원래 그렇지.”

비앙카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에티오피아 팀의 대장인 페이사 릴레사가 있었다.

그 둘은 각각 세계 통합랭킹 2위, 3위였지만 이렇게 가까이 붙어서 앉아 있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늘 주목받고 대접받던 이들이기에 주인공이 되지 못한 채 조연 신분으로 있는 것도 생전 처음인지라 둘 사이에는 묘한 동질감과 공감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비앙카는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기분 나쁘겠어? 저런 저열한 놈에게 캐릭터를 빼앗겼으니.”

전전전전라운드에서 블레어가 에티오피아 팀 멤버들 전원을 복제하여 꼭두각시로 조종했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페이사는 그저 가만히 정면을 응시할 따름이다.

“그것은 진짜 내가 아니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다만?”

“내 캐릭터의 복사본이 친구에게 피해를 끼치게 되어 그것이 걱정이었지. 하지만 한 방에 때려잡는 것을 보니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군.”

페이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리 복사본이라도 해도 자신의 능력을 그대로 쓸 수 있었던 인형이 마동왕이 일으킨 지진 한 방에 쓸려나간 것이 조금 충격이었던 모양.

그리고 그것은 비앙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뭐, 워낙 괴물 같은 놈이니까.”

그녀 역시도 심혈을 가해 만들어낸 군수품의 결정체 ‘대공황 골렘’이 모래알처럼 부서지던 순간의 그 충격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

“…….”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비앙카가 옆에 있던 샴페인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술 한 잔 할래?”

하지만 페이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술은 친구랑만 마신다.”

“어? 뭐… 그래? 그럼 나랑도 친구 하면 되잖아. 랭킹도 엇비슷한데.”

“아무랑이나 안 한다. 친구.”

“……내가 아무나야?”

비앙카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리고는 손부채질을 한다.

“하, 재수 없는 튜더 자식은 뭘 하고 있는 거람? 그 자식 죽상인 거 보려고 계속 앉아 있는 건데.”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튜더가 보이지 않는다.

별이 되어 날아간 이후 사망 판정이 떴으니 게임 밖으로 나와 앉아 있던가 해야 할 텐데.

‘그러고 보니 이상한데? 진짜 이 새끼 어디 갔지?’

비앙카는 샴페인 잔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

홀로그램 속 밤하늘, 하늘 높이 날아간 튜더는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어디보자, 아까 그놈이 날아간 방향이……?’

비앙카는 튜더가 날아갔던 방향을 향해 고개를 높이 들었다.

그러자, 그동안 별 관심이 없어서 쳐다보지 않았던 밤하늘에 작은 파문이 일어나는 게 보인다.

“……?”

비앙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튜더가 마동왕의 주먹에 맞아 날아갔던 방향은 두 개의 달 중 남쪽 달이 떠 있던 방향.

그리고.

모두가 경기장만 바라보고 있는 지금, 아무도 관심 가지고 있지 않은 까마득한 상공의 밤하늘.

그곳에서부터 이변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쩍!

남쪽 달이 뭔가… 뭔가 이상하다.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비앙카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 때.

“땅의 흐름이 이상한데?”

옆에 있던 페이사 역시도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쿠드드드드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땅이 회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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