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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751화 (751/1,000)
  • 751화 세계 최강 인증 (5)

    휘이이잉-

    길게 자란 흰 수염과 눈썹이 바람에 흩날린다.

    라치만 구룽. 겉보기에는 그저 작은 키에 등 굽은 리자드맨 플레이어다.

    현실에서 역시도 70대인 만큼 굉장히 연륜 있어 보이는 외형.

    아이템이라고는 걸치고 있는 거적떼기 한 장뿐이다.

    “…….”

    나는 라치만의 등장에 조금 긴장했다.

    그는 제1왕실구르카 연대 소속의 레전드 군인.

    한창 일본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당시 이등병이었던 라치만은 단지 칼 한 자루만을 들고 일본군의 기관총 진지로 돌격하여 5명의 소총수를 참수하고 그 건너편의 벙커에 숨어 있던 기관총 사수 두 명과 통신병까지 전원 참수, 단신으로 8명을 죽이고 두 개의 벙커를 탈환하는 것을 최초로 범상치 않은 군생활을 시작했다.

    그 이후 소대 최전방 전초기지에서 200명의 일본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부상병들을 격벽 뒤에 숨기고 혼자서 쿠크리와 수류탄을 들고 항전하여 4시간여를 버텨냈다.

    이때 사살한 일본군 수는 무려 91명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공적을 의심한 영국군 고위 장교 몇몇이 전투가 끝난 후 라치만을 따로 불러내어 심문하였고 이때 라치만은 건빵 주머니에서 몇 움큼이나 되는 일본군의 귀를 후두둑 후두둑 쏟아내어 그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가 죽인 적군의 수는 총 666명.

    그는 ‘구르카의 악마’라고 불리며 적군들에게 있어서는 공포의 화신이었던 존재이다.

    “…….”

    마태강은 바짝 긴장한 태도로 가드를 올렸다.

    눈앞에 있는 라치만은 과거 대만전에서 겨루었던 피반창보다도 덩치가 작고 레벨이 낮다.

    하지만 ‘인자강’이라고 했던가, 라치만은 인간 자체가 강한 존재였다.

    게임 속에서 스탯이 조금 떨어진다고 해도 현실에서의 피지컬이 너무나도 압도적인 존재이기에 바짝 긴장해야 했다.

    오죽했으면 미국전에서 유세희와 마태강을 동시에 리타이어 시켰던 절대강자 죠 올드만조차도 라치만을 일컬어 ‘한번쯤 꼭 도전해 보고 싶은 남자’라고 평가했겠는가.

    ……더군다나.

    “스승님. 다녀오십시오.”

    전 세계 통합랭킹 1위 에드워드 튜더 프랜시스조차 라치만에게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다.

    구십도 폴더 인사에서는 숨길 수 없는 존경심이 듬뿍 배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튜더를 대하는 라치만의 태도는 사무적이기 그지없었다.

    “돈 받은 만큼은 한다. 걱정 마라.”

    “하하, 스승님도 참. 여전하시군요.”

    라치만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으로 튜더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마태강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 나온다.

    이윽고, 3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캐스터들이 차분한 어조로 중계를 시작했다.

    [네, 영국 측 세 번째 선수 라치만 구룽이 필드로 나옵니다.]

    [아무래도 전 라운드에서 호킨스 선수와 접전을 펼쳤던 마태강 선수로서는 라치만 선수의 존재가 조금 부담스러울 것 같네요.]

    [아마 최대한 라치만 선수의 체력을 빼놓기 위해 지구전을 택할 확률이 큽니다.]

    [아니면 이쯤에서 윤솔 선수와 잠시 교대해서 체력을 비축하는 것도 한 방법인데요!]

    그들의 예상이 맞았다.

    ‘최대한 체력을 빼 주지.’

    마태강은 최대한 시간을 끌며 버틸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윤솔과 태그를 하여 힐을 받아 체력을 풀 파워로 충전할 요량이다.

    ……하지만.

    “지구전이라. 나를 상대로 그게 되겠나?”

    라치만은 그저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다.

    동시에.

    …푸슉!

    그가 꺼져 버렸다.

    말 그대로, 촛불처럼 꺼져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

    마태강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무슨? 어디로 갔…….”

    하지만 말을 끝맺을 수는 없었다.

    무언가 차갑고 예리한 것이 목젖을 꾹 눌렀기 때문이다.

    “헉!?”

    마태강은 재빨리 고개를 뒤로 당겼다.

    천재의 감(感), 그것이 그의 목숨을 살렸다.

    …차앙!

    허공에서 열 개의 쿠크리가 서로 앙다물린다.

    마태강의 정수리 위에 올라타 있던 라치만이 공중제비를 돌며 땅에 착지했고 그 즉시 허리를 뒤로 틀어 손톱을 뻗어 왔다.

    “미친!”

    마태강은 기겁하며 발을 뒤로 뺐지만.

    터억!

    이미 한쪽 발목은 라치만의 꼬리에 붙잡혀 있는 상태였다.

    부웅!

    라치만은 마태강이 발을 뒤로 빼는 힘을 이용하여 펄쩍 점프했고 그대로 꼬리를 당겨 품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푸푸푸푸푸푸푸푸푸푹!

    열 개의 칼날이 마태강의 흉부와 복부를 꿰뚫는다.

    “크헉!?”

    마태강은 입으로 피를 한 바가지나 쏟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신의 본능은 죽지 않는다.

    …콰악!

    마태강은 두 손을 뻗어 자신의 몸에 박힌 라치만의 손톱들을 움켜쥐었다.

    “절대 못 뺀다.”

    이대로 라치만을 자기 몸에 못박아둔 채로 독 구덩이나 용암 구덩이로 뛰어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태강의 앞으로 라치만이 잔잔한 시선을 드리운다.

    “그거 아나?”

    “……?”

    “쿠크리는 원래 찌르는 것이 아니라 베는 용도라네.”

    불길함이 엄습해 오는 대사이다.

    마태강이 라치만의 손을 못 빼게 꽉 붙잡고 있는 동안, 라치만은 양손을 뒤로 빼지 않고 옆으로 그어 버렸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퍽!

    몸에 박혀 있던 쿠크리가 지렛대처럼 옆으로 빠져나오며 살점과 뼛조각들을 흩뿌렸다.

    “……!?”

    마태강은 허탈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호킨스의 주먹에 하도 맞아서 육질이 연해졌던 탓일까?

    흘러내리는 살점과 내장, 그리고 훤히 드러난 뼈대.

    그 앞으로 라치만이 싱긋 웃어 보인다.

    “그리고.”

    “……!”

    “리자드맨의 무기는 손톱뿐만이 아니지.”

    동시에, 라치만은 마태강의 몸에서 뽑아낸 손톱의 뭉툭한 끝 부분을 추로 삼아 빙글 돌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갈고리 모양의 발톱 열 개가 마태강의 머리를 향해 날아든다.

    “으윽!?”

    마태강은 순간적으로 두 눈을 감고 말았다.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참격!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퍽!

    또다시 마태강의 몸에 열 개의 혈흔이 남았다.

    “눈을 감아? 전투 중에?”

    라치만은 싱긋 미소 지으며 마태강의 몸에 박힌 발톱을 더욱 더 깊게 박아 넣었다.

    “컥!?”

    마태강은 허리를 굽혔다.

    주먹을 들어 라치만의 손톱과 발톱을 부러트리려 했지만.

    “어림없네. 내 쿠크리는 다이아몬드보다도 단단하거든.”

    라치만은 그저 빙글빙글 웃을 뿐이다.

    “……태그!”

    마태강은 힘겹게 외쳤으나.

    “오, 그것도 어림없지.”

    라치만은 마태강이 뒤로 빠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쩍!

    짧은 파공성이 한 번. 라치만의 꼬리가 마태강의 목을 일격에 잘라 버렸다.

    꼬리 끝부분에 달려 있는 날카롭고 무거운 비늘 한 장이 길로틴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태강이가 설마 태그도 못하고 죽을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되면 전략적인 판단이 중요해진다.

    엄재영 감독은 잠시 고심하던 끝에 오더를 내렸고 그에 따라 한국 측에서 다음 선수가 바로 연이어 출전했다.

    궁귀(弓鬼).

    아직도 데스나이트 모드 상태인 드레이크가 필드로 나왔다.

    “흐음. 궁수인가.”

    라치만은 드레이크를 향해 거리를 좁혔다.

    드레이크는 출전하자마자 바로 화살 두 대를 바람에 실어 쏘았다.

    퍼펑!

    라치만은 날아드는 화살을 피해 바닥을 한번 굴렀고 바위 뒤로 피했다.

    “흐음. 익숙하군 이 감각. 저격수를 잡는 것은 자신 있어.”

    라치만의 눈에 일순간 이채가 어린다.

    핑!

    순간, 라치만의 눈앞으로 반투명한 실선이 지나간다.

    ‘……와이어?’

    라치만은 황급히 몸을 옆으로 틀었지만 그것은 결국 라치만의 목을 휘감는다.

    콰악! 우지지직!

    엄청난 힘으로 조여든 와이어는 바위를 부수고 라치만의 목을 완벽하게 옭아매었다.

    “갓챠.”

    쇠뇌의 와이어를 올가미처럼 던진 드레이크가 엄청난 힘으로 라치만을 잡아끌었다.

    바위 밖으로 끌려나온 라치만은 속절없이 바닥을 구르게 되었다.

    드레이크는 피식 웃는다.

    “어쩌나? 나 역시 저격수 잡으러 오는 돌격병 잡는 것은 자신 있는데.”

    그 역시 군인이니만큼 이런 류의 교전에는 익숙하다.

    파팟!

    드레이크는 와이어를 절벽가에 툭 튀어나와 있는 종유석에 걸고는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라치만은 버둥거리며 허공으로 확 딸려 올라갔고 드레이크는 그 틈에 사격을 개시했다.

    퍼퍽! 퍼퍼퍼퍽!

    교수형 당하기 직전인 라치만의 몸을 불카노스와 배드엔딩의 외골격으로 만들어진 화살들이 사정없이 두들긴다.

    그때.

    …빙글!

    라치만은 자기의 긴 꼬리를 돌돌돌 말아 방패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화살들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퍼퍽! 퍽! 퍼퍼퍽!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어 버린 라치만의 꼬리, 하지만 라치만의 HP는 닳지 않았다.

    진즉에 꼬리를 끊어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꾸우우욱…

    라치만은 순전히 목의 힘으로만 와이어에 매달린 자신의 몸 하중을 버텨내고 있었다.

    체구 대비 유난히 굵은 목뼈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저걸 버틴다고?”

    드레이크는 황당하다는 듯 쇠뇌를 내렸다.

    라치만의 가죽과 근육은 극도로 질기고 쫀쫀해서 화살로도 관통이 쉽지 않았다.

    화살을 쏘는 족족 끊어진 꼬리에 박히니 회수만 어려워질 뿐이었다.

    이윽고.

    툭!

    손톱을 뻗어 기어이 와이어를 끊어낸 라치만이 절벽을 마구 뛰어서 달려왔다.

    날카로운 발톱은 암석을 두부처럼 푹푹 뚫고 들어갔고 그 덕택에 그는 평지나 다름없이 활동할 수 있는 모양이다.

    …쩌억!

    다섯 자루의 쿠크리가 휘둘러져 드레이크의 머리를 여섯 조각으로 쪼개 버렸다.

    “……!”

    라치만은 흩날리는 투구 파편 사이로 눈을 가늘게 떴다.

    파괴된 것은 데스나이트를 상징하는 검은 용이빨 투구뿐, 드레이크는 이미 백 덤블링을 통해 뒤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상태다.

    “꼬리를 잘라 놨으니 할 만치는 한 것 같군.”

    “……도망치는 게냐?”

    “선임에 대한 예우지. 서로 추한 꼴 보이지 맙시다.”

    드레이크는 라치만을 향해 슬쩍 경례를 해 보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또, 나보다 당신을 더욱 더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거든.”

    “……?”

    라치만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드레이크는 손을 들어 태그 사인을 보낸다.

    그러자.

    …콰쾅!

    뒤로 빠지는 드레이크를 대신해 놀라운 속도로 뛰쳐나오는 이가 있었다.

    시뻘겋게 빛나는 불카노스 대낫.

    바로 유세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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