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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746화 (746/1,000)
  • 746화 술잔을 나누면 형제 (9)

    -어젯밤 경기 의외로 노잼이더라;;

    ↳ㅆㅇㅈ~ 세계 최정상 3국이 모인거치고는 좀 싱거웠음

    -ㅂㅅ같은 토니 블레어 ㅅㄲ가 트롤짓해서 그럼ㅡㅡ

    ↳그래도 블레어 덕에 영국이 이긴건 맞지ㅋㅋ

    ↳그럼 블레어가 어제 경기에서 MVP받음?

    ↳ㄴㄴMVP는 페이사 릴레사가 받았음ㅋㅋ

    -페이사 클라스 ㅎㄷㄷ하네 WUO 3R에서 2R동안 MVP임...;;;

    ↳이 정도면 에티오피아가 씹캐리한거 아니냐ㅋㅋㅋㅋ

    -원래라면 영국이 떨어지는게 맞지

    -마지막에 페이사가 실수만 안했어도 에티오피아 대 한국전인데ㅠ

    ↳아깝긴 하다ㅋㅋㅋ

    -페이사의 위엄 같은 소리하네 ㅂㅅ들 어제 경기 보긴 봤냐? 페이사 땜에 에티오피아 광탈한거임;

    ↳마동왕 백무빙이 워낙 은밀했던 거지 걍;

    ↳솔직히 그걸 어케 잡아냄ㅋㅋㅋ

    ↳암튼 페이사 실책이 맞다. 아무튼 그럼.

    -어제 경기는 블레어가 망쳤고 페이사가 살렸고 마동왕이 마무리했지

    ↳튜더는 병풍이었음ㅋㅋㅋ

    ↳근데 그와중에 잘생겼더라...꽃병풍...

    -영국은 어제 걍 ㅂㅅ이었네 한게머임ㅋㅋ

    ↳글케 따지면 한국도 한거없음ㅋㅋㅋ

    ↳에티오피아가 다했다!!!

    ↳근데 왜 떨어졌냐!!!

    .

    .

    나는 댓글 읽기를 멈추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경기가 끝난 날의 늦은 저녁.

    조촐한 파티라도 열자는 엄재영 감독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나는 방에 혼자 남았다.

    식사도 룸 서비스로 혼자 조용히 해결했다.

    밥과 명란젓, 참기름, 김과 김치만이 있는 조촐한 식단.

    나는 혼자서 지난 기억을 우물거린다.

    에티오피아의 강뉴부대. 페이사가 예전에 내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게임 산업에 집중해서 국가 발전을 꾀하려고 하지. 어떻게 보면 에티오피아에서는 게임 산업이 활성화되면 안 돼. 독재자의 군자금만 불려줄 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의 착취 주고만 공고히 하는 꼴이니.’

    페이사 릴레사, 그는 갈등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선수로서 더욱 높은 경지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열망.

    그러나 거대한 폭력과 부조리의 선전 도구로서 이바지하고 있다는 죄책감은 그 열망보다도 훨씬 더욱 무겁게 그를 짓눌렀던 모양이다.

    월드클래스 급 기량. 충분히 세계 정상을 노려볼 수 있었던 에티오피아 팀은 결국 최후의 전쟁을 앞두고 탈락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지만 나만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탈락이 본인들의 선택임을.

    “…….”

    나는 계속해서 우물거렸다.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은 흔히 말한다. 이 성적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나 스스로 시간을 엄수하고 학습량을 조절했으며 다른 것을 하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일로매진한 결과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학생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학생이 공부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책상과 의자를 만든 목수, 책을 만든 편집자, 학원비나 독서실 비를 내준 부모님, 학교에서 지식을 가르쳐 준 교사, 공부 중 배가 고플 때 먹을 간식이나 야식을 만들어 주는 요리사, 공부 외에 잠시 한숨 돌릴 여유를 주는 친구들…….

    일일이 다 따지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그 학생의 점수 아래에 깔려 있다.

    아무 잡생각 없이, 오로지 한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이처럼 축복받은 일이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의 선수들은 이 모든 것들을 거의 다 혼자서 해내야만 했다.

    그곳에는 좋은 캡슐 장비도 없고 좋은 인프라도 없다.

    게임에 대한 지식이 없는 꼰대들이 무자비하고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비효율적인 정책들 속에서 에티오피아 팀은 힘겹게 싸워 왔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동자 속에는 순수함과 열정이 있었다.

    ‘너의 눈망울 속에는 이 게임을 향한 사랑과 순수함, 열정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것과, 또한 우리들의 것과 매우 닮았고.’

    페이사는 내게 말했었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지. 너는 내 형제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술잔을 나누면 형제. 페이사는 그 말을 경기장에서 다시 한번 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갔다 와라. 세계 정상에.’

    자기들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하지만 능력 부족이 아닌 다른 이유로 갈 수 없는, 그런 곳으로 형제를 밀어 보내는 이들의 심경은 어떨까?

    나는 감히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아프리카 챔피언스 리그의 정상에 서기까지 253전 253승, 무패의 신화를 이룩한 어마어마한 팀 강뉴부대.

    나는 내일 그들이 가졌던 꿈의 무게만큼의 짐을 어깨에 짊어져야 했다.

    새삼 묵직한 사명감이 가슴 밑부터 꽉 차 올라온다.

    ‘내일 경기에서 꼭……!’

    최후의 리그.

    그간 준비해 놓은 전략을 아낌없이 발휘할 순간이 왔다.

    내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네. 이번에는 영국에서 열린 ‘월드 얼티메이트 올림피아드’를 관람하러 온 여행객들의 인터뷰입니다!]

    별 생각 없이 틀어 놓은 TV에서 홍영화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마이크를 든 채 거리 곳곳을 다니며 세계 각국의 여행객, 혹은 현지인들에게 이번 경기의 소감을 묻고 있었다.

    [한국이 결승전에 올라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 전까지는 어디 있는지 잘 모르는 나라였는데 이번 기회에 아주 매력이 많은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어 참 좋습니다.]

    [원래 튜더 선수의 팬이었는데 지난 경기를 보고 마동왕 선수의 팬도 되었습니다. 두 선수가 좋은 시합을 펼쳐 주었으면 좋겠네요.]

    [아무리 그래도 마동왕이 튜더의 벽을 넘기는 힘들 것입니다. 영국은 세계제일이고 튜더는 그 중에서도 제일이니까요.]

    [개인적으로 마동왕 선수 너무 멋있어요! 그 가면 속에 왠지 꽃미남이 있을 것만 같아요!]

    비를 맞으면서도 들뜬 얼굴로 인터뷰에 응하는 시민들.

    그리고 홍영화가 인터뷰를 따고 있는 거리 곳곳에는 니아의 콘서트를 알리는 현수막들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니아의 박보연이 말했었다. 자기들도 곧 영국 투어 온다고. 일정이 맞으면 같이 경기 관람이나 하자고 했었는데.

    “지금 누구 초대에 응할 때가 아니지.”

    그래서 홍영화나 박보연이 놀러오겠다고 하거나 놀러온다고 한 것도 전부 거절 중이었다.

    게이머로서 최고의 영예를 코앞에 두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그것은 곧 국가의 격에도 큰 영향을 미칠 테니까.

    하지만.

    [마동왕 선수, 우편 왔습니다!]

    호텔 로비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은 그런 내 생각을 뒤바꾸어 놓았다.

    나는 원래 어지간해서는 팬레터를 직접 받지 않지만, 로비 측에서는 검은 비옷을 입은 누군가가 물을 뚝뚝 흘리며 급한 편지라며 전했다고 한다.

    구단 직원과 엄재영 감독이 먼저 읽어 보고 내용 상 별 문제는 없다고 하니 위험도는 없을 것이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 편지를 수령해 읽어 보기로 했다.

    “……!”

    그리고 그 작은 호기심의 대가는 컸다.

    잘 살고 있나 친구 :)

    아니, 오늘은 친구가 아니라 선배로서 예우하지.

    바로 대격변 선배 말이야!

    너와 네 친구가 각각 일으킨 1차, 2차 대격변 흥미롭게 잘 보았어.

    나도 이번에 그 덕 많이 봤고.

    그런데 말이야.

    받기만 할 수는 없잖아?

    나도 대격변이라는 것 한번 일으켜 보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이 점에 대해 논의하고 싶다면 나를 찾아와 줘.

    네 친구도 같이 오면 좋고!

    P*S1- 영국은 비가 자주 오니 감기 조심해.

    P*S2- 너는 결국 오게 될 거야♥

    -런던 E, Tower hamlets, White chaple, 3-21 Avenue, 어느 어둡고 축축한 지하수로에서, 친애하는 너의 J가-

    “야, 초대를 이렇게 하네.”

    이렇게 기분 나쁘고 음침한 초대는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다.

    아마도 조디악이 보낸 편지겠지 이건?

    “이 자식은 연쇄살인 혐의로 쫓기는 주제에 어떻게 호텔에 왔다 간 거지? 부하들이 많은가?”

    나는 편지를 구겨 버렸다.

    혹시나 해서 로비로 나가 보았지만 이미 검은 비옷의 남자는 사라지고 없는 뒤다.

    그저 놈이 남긴 물 젖은 발자국만이 로비 카펫에 뚜렷하게 찍혀 있을 뿐이었다.

    ‘……쫓아가 볼까?’

    행동은 생각보다 빠른 법이다.

    나는 곧바로 유창에게 전화를 걸며 발자국을 쫓았다.

    “아 이 자식. 왜 안 받아.”

    평소에는 꼬박꼬박 잘 받다가 갑자기 전화가 연결되지 않는다. 머피의 법칙 같은 걸까.

    발자국도 빗길에 사라졌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진흙 자국이 깔끔한 보도블럭길 위로 이어져 있다.

    ‘하긴 수배 중인 놈이 당당히 대로로 다닐 리는 없겠지. 부하라도 말이야.’

    빠르게 발자국을 좇는데 어느 순간 커다란 덩치가 내 눈앞을 가로막았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덩치가 매우 큰 영국인 경찰이었다.

    그는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더니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검은 비옷을 입고 있는 남자. 아마도 조디악이겠지.

    하관까지 보일 정도로 사진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내가 움찔하자 경찰은 재차 물었다.

    “혹시 이 사람을 보신 적 있습니까?”

    “…….”

    하관을 보니 분명 그 조디악이 맞다.

    이 미친놈은 직접 편지를 전해 주러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 건 아니고 호텔 로비에서 누가 절 찾았다고 해서요. 혹시 헤어진 옛 애인인가 싶어 따라 나왔습니다.”

    “남자로 보이는데요.”

    “예. 뭐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존중합니다. 한데, 이 사람 아는 사람입니까?”

    “아뇨 모르는 사람입니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영국인 경찰은 한참을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모자를 푹 눌러썼다.

    “…방금 추적 중 동료가 다쳐서. 실례했습니다.”

    그러자 골목 저편에서 신음 소리가 들린다.

    경찰 한 명이 허벅지를 움켜쥐고 벽에 기대어 누워 있는 것이 힐끔 보였다.

    빗물에 번지는 핏물. 저 멀리서 들려오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까지.

    ‘……음. 추격할 마음 싹 사라지네.’

    깜빡했다.

    그놈은 게임과 현실을 비슷하게 살아가는 진짜배기 살인마.

    이렇게 위험한 놈을 혼자서 만나는 것은 무리다.

    내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는 그때.

    “……뭐 찾냐?”

    고개를 돌리니 저 옆 호텔의 측문 쪽에서 비에 쫄딱 젖은 채 말을 걸어오는 이가 보인다.

    유다희. 그녀가 껄렁한 태도로 벽에 기대어 있었다.

    머리가 홀딱 젖어 있지만 않았더라면 나름 여유 있어 보이는 자세였을 텐데.

    그녀는 내 손에 있는 편지를 보더니 왜인지 심기가 불편해진 것 같다.

    갑자기 시비를 털기 시작하는 걸 보면 말이다.

    “뭐야? 연애편지? 헤어진 전여친이라고? 참나 팔자 좋네. 무슨 빗속의 여인도 아니고……,”

    “응원하러 왔냐?”

    “뭐!? 미쳤냐! 내가 니 연애를 왜 응원해! 웃기셔 진짜 아주!?”

    “경기 말이야.”

    “……아하, 아하. 어, 뭐, 그렇지. 경기 응원 차.”

    머쓱하게 웃으며 시선을 회피하는 유다희.

    그녀를 보자 조디악을 추격하겠다는 의지는 잠시 사그라들었다.

    ‘그래, 현실에서는 상종 안 하는 것이 답이지.’

    조디악이 남긴 두 번째 추신이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내게 유다희가 핀잔을 주며 우산을 씌워주었다.

    “얌마, 비 더 맞으면 감기 걸린다. 넌 뭐 상하이에서도 그러더니 온 세상 비는 다 맞고 다니냐? 감기라도 걸리면 내일 경기 어쩌려고.”

    그래, 지금은 일단 호텔로 돌아갈 때다.

    조디악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으니까.

    불과 몇 시간 뒤면 벌어질 세계리그 최정점.

    바로 최후의 정상결전(頂上決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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