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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745화 (745/1,000)

745화 술잔을 나누면 형제 (8)

…콰콰콰콰쾅!

재수 없게 이죽거리고 있던 블레어의 발밑에서 시뻘건 용암 분수가 터져 나왔다.

“으어어억!?”

블레어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쳤으나 전신에 붙은 불길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박자로 슬슬 움직이던 나는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끈적한 용암으로 변해 흘러내리는 협곡의 절벽. 적색지대로 인해 더욱 더 빨갛게 보이는 땅.

그곳에는 당당하게 서 있는 페이사 릴레사가 보인다.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쏟아낸 일격은 멀쩡한 황무지를 용암대지로 바꾸어 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몇 가지 클래스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튜더라면 몰라도 마법사 유저인 블레어가 이 기술을 정면으로 맞고도 살아 있는 것은 당연히 무리다.

페이사는 불에 타 죽어 가는 블레어를 보며 피식 웃었다.

“무혈이긴 하군. 피는 안 났으니 말이야.”

페이사는 움직이기도 힘든 와중에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불을 뿜어냈던 것이다.

그때쯤 해서, 나는 적색지대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은 블레어가 남긴 씬 레드 라인은 일정 시간 동안은 무조건 유지되는 것이기에 나머지 선수 13인은 적색지대 탈출에 실패했다.

이윽고.

지이이이잉!

붉은 벽이 공간을 가둔다.

이 안에 갇힌 이들은 모두 강제 소멸을 피할 수 없다.

오로지 나만이 겨우겨우 빠져나왔을 뿐.

유일하게 생존이 보장된 이는 나 하나밖에 없었다.

블레어는 마루 마모를 죽였고 그 블레어는 또 페이사에게 죽었다.

현재 스코어는 한국 0킬, 에티오피아 1킬, 영국 1킬.

한국이 꼴찌이긴 하지만 이제 몇 초 뒤면 전세는 역전이다.

적색지대 안에 갇힌 윤솔, 드레이크, 마태강, 유세희, 구르무, 타파라, 밸라이, 페이사, 튜더, 라치만 구룽, 올리버 마르코, 존 호킨스가 한꺼번에 리타이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팀 선수들은 소멸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표정들이 밝았다.

“역시 대장이야. 활로가 있었어!”

“대단한 정신력이로군. 이 붉은 선… 끊기 쉽지 않은데.”

“존경합니다.”

“사부 만세!”

내가 살아 있는 이상 최종 우승국은 한국이 될 것이기 때문에 부담감도 없다.

그렇기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반면 영국 팀 선수들은 똥 씹은 표정이었다.

“젠장, 저 쥐새끼 같은 블레어 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MVP 자리 때문에 동료까지 팔아? 도저히 정이 안 가는 새끼구만!”

존 호킨스와 올리버 마르코는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

라치만 구룽은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퇴역군인, 싸우기도 전에 꽁꽁 묶인 추한 자세로 부전승을 거두느니 차라리 지는 게 낫다는 태도다.

게다가 세계랭킹 1위인 튜더는 제대로 된 능력을 보이기도 전에 붉은 선에 속박당해 버렸다.

심지어 사전 합의된 전략도 아닌, 동료에게 뒤통수를 맞아서.

“하아.”

튜더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블레어 덕분에 어찌어찌 이기기는 했지만 정작 자기들은 딱히 한 것도 없는, 굉장히 추한 승리였다.

확실하게 1위로 이기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한국에 이어 겨우겨우 올라가는 모습이라니.

심지어 그 와중에 자충수를 두어 탈락할 뻔하기까지 했다.

거기에 내분이 일어난 모습까지 매스컴에 비추어졌으니 상황은 최악.

그동안 공고히 해 왔던 카리스마 있는 이미지에 실금이 가게 생겼다.

아마 이 시간 이후부터 튜더의 리더십, 국가대표 팀의 팀워크에 문제가 있다는 찌라시들이 쏟아지겠지.

‘쯧쯧, 그러게 팀원 간수를 잘 해야지.’

이건 혼자 뛰는 레이드가 아니란 말씀.

나는 튜더를 외면한 뒤 시선을 옮겼다.

바로 그때.

“……!”

나는 적색지대 안에 있는 페이사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곧 다가올 패배, 그리고 탈락을 예견하고 있는 듯.

그리고 에티오피아 선수들 전원이 페이사와 같은 표정이었다.

미움, 원망, 증오, 억울함 따위의 감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초연했다.

나는 의아함에 뒤로 돌았다.

사실 아까 내가 블레어의 눈을 피해 옆으로 조금씩 움직일 때 페이사는 그런 내 행동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에게 블레어를 죽일 수 있을 만한 힘이 남아 있었다면 몰래 내빼려 하는 내 뒤통수를 공격했어도 될 일이다.

만약 그랬다면 에티오피아는 확정적으로 1킬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고 적색지대로 인해 9킬로 1위를 하게 될 영국에 이어 2위를 하게 되어 결승전으로 갈 수 있었을 테니까.

‘물론 페이사가 나를 공격했다고 해도 반사 데미지가 자동 반격을 했겠지만.’

나야 실력을 숨기고 있으니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페이사가 그것을 알 리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사는 나를 노리기보다는 블레어를 공격했다.

이 점에 대해 세계 각국의 캐스터들은 이렇게 분석하고 있었다.

[아아! 에티오피아의 리더 페이사 선수가 마지막 순간에 판단 미스를 내렸습니다!]

[맞아요! 마동왕 선수가 적색지대 밖으로 백무빙을 치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한 것이 패인입니다!]

[이렇게 되면 최후의 생존자가 마동왕 선수가 되니 한국이 1위에요! 그리고 킬 수가 더 높은 영국이 자동으로 2위가 됩니다! 에티오피아는 탈락이죠!]

[저기에서는 블레어 선수를 공격하기보다는 마동왕 선수를 공격했어야 했어요! 아무리 블레어 선수가 얄미운 플레이를 보였다고 해도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안 되죠!]

[어차피 한국은 전원 리타이어 확정이니까 영국 팀의 한 명을 기습으로 잡은 것 같은데… 한국 팀 마동왕 선수의 저력을 얕본 것이 큰 실책입니다!]

[아~ 페이사 선수! 아쉽습니다! 평소에 시야각이 그렇게 넓은 선수인데 이번만은 실수를 했어요!]

[마동왕 선수의 몰래 백무빙이 제대로 먹혔습니다! 덕분에 영국과 에티오피아의 기싸움에서 한국이 어부지리를 거둔 모양새가 되었군요! 튜더 선수가 블레어 선수의 독단행동을 막지 못한 것, 그리고 페이사 선수가 비효율적인 선택을 한 것이 지금 이런 나비효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객관적인 수치는 더더욱 명확한 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황판>

<한국: 0킬> -마동왕/윤솔(적색지대)/드레이크(적색지대)/마태강(적색지대)/유세희(적색지대)

<에티오피아: 1킬> -페이사(적색지대)/구르무(적색지대)/타파라(적색지대)/마루 마모(사망)/밸라이(적색지대)

<영국: 1킬> -튜더(적색지대)/블레어(사망)/라치만 구룽(적색지대)/호킨스(적색지대)/올리버(적색지대)

한국은 비록 0킬이긴 하지만 배그옵의 룰 상 최후의 생존자가 한국 선수이니 자동 우승이다.

그 다음은 적색지대로 인해 블레어의 킬 수가 올라갈 테니 영국이 준우승을 거두겠지.

이처럼, 남들이 보기에는 페이사가 결정적인 순간 실책을 한 것 같겠지만…….

‘……아니야.’

나는 그것이 아님을 안다.

페이사는 분명 내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었고 마지막 순간, 내 등을 노리기보다는 정면에 있는 토니토니 블레어 주니어를 공격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복잡한 가설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인종 차별 발언을 한 영국 선수에 대한 분노? 나아가 아프리카인들이 가지고 있는 유럽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적대감? 아니면 승리를 해 봤자 오히려 국민들에게 피해가 가는 자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회의? 대체 무엇일까?

어지러운 생각들을 중구난방으로 떠올리고 있다 보니 절로 머리가 아프다.

혼자서 고민해 봤자 답을 알 수 없으니 나는 대놓고 묻기로 했다.

“왜 나를 안 잡고 영국 선수를 잡았지?”

내 한 마디에 모두의 고개가 천천히 나를 향해 돈다.

그들의 표정은 가지각색이었다.

먼저 대답을 한 건 페이사가 아닌 튜더였다. 그는 미묘하게 불쾌한 내색을 두 눈에 담았다.

“……승자가 물을 질문은 아니군.”

나는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승자가 물을 질문이 아니라고?

아마 튜더는 페이사의 공격이 순전한 판단 미스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내 말은…….”

“승자에겐 격식을 차릴 의무가 있다. 패자의 격식만큼 꼴불견스러운 것도 없기 때문이지. 우리는 모두 최선을 다했다. 묘를 파는 도굴꾼처럼 추악한 질문은 던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내 인간성을 비난하는 말에 레드 존 안은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네가 뭘 알아!”

“……참아, 태강아! 안 돼, 드레이크 씨 막아 봐요!”

“그래, 태강! 여기서 서로를 공격해 봤자 추한 리플레이만 남게 될 뿐이다.”

구르무도 터져 나오는 울분을 참아 내지 못했다.

“페이사! 무슨 말이라도 해 봐요!”

“마모가 죽은 게 그렇게 슬펐던 거야? 탈락이라고 탈락! 죽은 게 아니라!”

“조용히 하자 모두. 진정해! 답지 않게 왜 이래. 우리의 모토도 잊은 거야?”

“하지만! 우린 우승할 거였다고요! 그래서 고향에 평화를 가져올 거였다고요!”

탈락이 거의 확정된 에티오티파 팀도 한순간 평정을 잃고 분열이 생겼다.

모든 게이머들의 꿈인 프로리그다. 어찌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승부욕이 없는 플레이어라면 애초에 올라오지도 못했을 무대다.

“…….”

하지만 이 모든 소란 속에서도 페이사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페이사.”

내가 다시 한번 부르자 그제서야 조용히 실눈을 뜰 뿐이다.

‘대체…….’

만약 나를 잡았다면 조금 굴욕적이긴 하지만 2위는 확정이다.

결승전에서 설욕할 기회도 잡을 수 있을 것이고.

하지만 페이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페이사……!”

“듣고 있다.”

나의 계속된 부름에, 다만 감았던 눈을 뜨고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눈동자를 들어 내 눈을 쳐다보았을 뿐이다.

흑요석 호수처럼 반짝이는 그의 눈망울에 가면을 쓰고 있는 내 얼굴이 담긴다.

마치 나 자신과 마주보는 듯한 감정 속에서, 페이사의 잔잔한 음성이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들려왔다.

“어째…….”

“술잔을 나누면 형제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순간,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 자리에 굳었다.

페이사의 시선은 마동왕의 가면을 넘어 그 안의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문득, 고인물 신분으로 술잔을 나눌 때 그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지. 너는 내 형제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그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몇 개나 되는 가면으로 맨얼굴을 숨기고 있는 내가.

멍하니 서 있는 나의 앞으로 적색지대가 마지막 파장을 일으킨다.

파츠츠츠츠츠츠……

천천히 소멸해 가는 레드존. 그리고 그 안에 갇힌 플레이어들.

“방법 없는 거야, 튜더! 너 1위잖아!”

“……조용히 죽음을 기다려라. 온 영국이 우리를 보고 있다. 여왕께서도 말야.”

“염병! 블레어 이 자식 때문에!”

“존 호킨스. 마지막 경고다. 날 화나게 하지 마.”

“알았어, 알았다고…….”

“드레이크 씨, 혹시 탈출할 방법 없습니까?”

“태강, 어차피 우린 이번 라운드 우승이다.”

“그래도…….”

“잠깐, 저길 봐.”

츠츠츠츠……

모든 것이 붉은 가루로 변해 사라져 가는 세상에서 홀로 움직이는 한 명이 있었다.

페이사는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손바닥은 천천히 레드존 벽을 훑었다.

“형제여…….”

그도 아쉬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담담한 표정으로 내게 웃어 보였다.

“갔다 와라. 세계 정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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