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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744화 (744/1,000)
  • 744화 술잔을 나누면 형제 (7)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암염지대의 협곡 위로 고개를 내미는 이들.

    영국 팀의 5인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에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거구의 남자 존 호킨스.

    분명 마법사인데도 불구하고 무투가를 연상케 하는 저 압도적인 피지컬은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존 호킨스에 밀리지 않는 덩치의 뚱뚱한 선수가 있었다.

    독 계열 마법사인 올리버 마르코.

    그는 미국의 오일러 심슨과는 라이벌 관계로 그와 자웅을 겨루기 위해 이번 대회에 출전했지만 미국이 탈락하는 바람에 바람을 맞은 상태이다.

    그리고 두 덩치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뒤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노인.

    늙은 만큼 덩치가 커지는 리자드맨의 종족 특성 상 상당히 큰 체구를 가지고 있는 라치만 구룽이 잠잠한 시선으로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역시 미국의 죠 올드만과 라이벌 관계, 미국의 갑작스러운 탈락으로 인해 적수를 잃어버린 몸이다.

    “아니. 잘 싸우다가 어딜 가시는가 친구들?”

    그리고 지금 한국과 에티오피아를 향해 도발을 날리고 있는 남자.

    깔끔한 2:8가르마에 지적인 미남, 하지만 어딘가 간사해 보이는 외눈안경을 끼고 있는 이 사람은 영국 대 브라질 전에서 MVP플레이어로 선정된 토니토니 블레어 주니어.

    현실에서는 보수당의 최연소 하원의원이라는 엄청난 스펙을 가지고 있으며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유명한 지략가 타입 선수였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이는 블레어 따위가 아니다.

    그 옆에 있는 금발의 귀공자.

    깎아낸 조각 같은 외모에 훤칠한 키, 타고나길 고귀하게 태어난 자 특유의 아우라.

    에드워드 튜더 프랜시스. 이 세상의 진짜 주인공.

    내가 회귀하기 전후를 통틀어 전 세계 랭킹 1위를 줄곧 유지하고 있는 괴물의 등장이다.

    ‘……어부지리를 노리는 건가.’

    나는 고개를 들어 영국 팀을 바라보았다.

    고지대를 점령하고 있는 영국 팀이 지형 상 그 어느 팀보다도 유리하다.

    거기에 원래 최강이었던 화력을 지금까지 조금도 허비하지 않았으니 그 유리함을 말해 무엇하랴?

    이것은 내가 과거 한중일 대전 당시 중국과 일본에게도 써먹었던 방법이다.

    ……하지만.

    ‘마냥 좋은 전략인 것만은 아니지.’

    조개는 입을 다물고 황새는 부리가 끼어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에서 어부가 그 둘을 잡는다는 뜻의 어부지리(漁父之利).

    하지만 그것은 조개와 황새가 힘을 합치는 순간 뒤집어진다.

    “…….”

    “…….”

    나와 페이사는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페이사 역시 바보가 아니다.

    그는 내 눈빛을 받는 즉시 몸의 방향을 영국 쪽으로 돌렸다.

    한국과 에티오피아는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먼저 영국부터 잡자는 것이다.

    “……어엇!?”

    이 계획을 낸 것으로 보이는 블레어가 당황한다.

    한국도 에티오피아도 생각보다 피해가 서로 크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빨리 동맹을 결성할 줄이야.

    이대로 가면 오히려 영국이 불리하다.

    ……하지만. 과연 영웅은 영웅인 법.

    “재미있군. 그새 손을 잡았나? 뭐, 상관없다.”

    튜더는 오연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남이야 동맹을 맺든 사돈을 맺든 아무런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모습.

    “미국의 말괄량이를 해치웠다지? 그 실력을 내게 보여라.”

    아무래도 비앙카를 패퇴시킨 내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이윽고.

    적들의 합공을 두려워하지 않는 튜더를 필두로, 영국 팀이 전장으로 난입해 들었다.

    존 호킨스가 주먹을 휘두르자 마태강이 가드를 올린다.

    콰쾅!

    화려한 피격 이펙트와 함께 마태강이 저 뒤로 날아갔다.

    ‘……무슨 마법사가 힘이 이따위야?’

    완갑이 부서질 듯 요동치는 충격에 마태강은 이를 악물었다.

    한편, 페이사 역시 눈앞으로 파고드는 라치만 구룽의 손톱에 경악하고 있었다.

    ‘손톱 모양이!?’

    리자드맨의 손톱은 일반적으로 장검처럼 길다.

    하지만 라치만 구룽의 손톱은 끝 부분이 뭉툭하고 볼록했다.

    마치 열 자루의 쿠크리가 한꺼번에 휘둘러지는 것 같았다.

    마루 마모가 협곡의 절벽가에서 식물들을 생장시켰고 존 호킨스는 그것을 뚫고 내려온다.

    올리버 마르코가 뿌리는 독을 윤솔의 신성력이 막아 내고 있었다.

    난데없는 혼전에 세 팀 모두가 정신이 없다.

    그 와중에 나는 튜더와 1:1로 마주하게 되었다.

    “역시 흥미로운 상대로군. 어디 가르침을 부탁한다.”

    튜더의 몸에서 아우라가 피어오른다.

    무려 4가지나 되는 서로 다른 성질의 마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튜더의 모습을 관찰했다.

    회귀 전에는 감히 멀리서 바라보는 것조차 할 수 없던 대영웅과 마주 겨루게 되다니, 새삼 감회가 새롭다.

    내가 막 튜더와 일전을 겨루려는 순간!

    나도, 튜더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이변이 벌어졌다.

    꽈아악!

    갑자기 눈앞에 새빨간 선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자리에 서 있는 모든 이들을 꽁꽁 옭아매었던 것이다!

    “……!?”

    나도, 튜더도 당황했다.

    마동왕, 윤솔, 드레이크, 마태강, 유세희, 페이사, 구르무, 타파라, 마루 마모, 밸라이, 튜더, 존 호킨스, 라치만 구룽, 올리버 마르코…….

    한국 팀, 에티오피아 팀, 영국 팀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붉은 줄에 묶여 제자리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되었다.

    영국 팀의 튜더, 에티오피아 팀의 페이사조차도 당황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소행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수수께끼는 곧 풀렸다.

    “후후후. 놀랐어?”

    협곡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것은 바로 토니토니 블레어 주니어의 웃음소리였다.

    다른 동료들이 다 한타 싸움에 뛰어들 때 그는 뒤에 혼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블레어가 만들어 낸 이 기묘한 현상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았다.

    ‘……씬 레드라인(Thin Red Line).’

    이 마법은 본디 자신과 적을 동시에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능력으로 제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본인도 함께 묶인다는 것 때문에 활용도가 극히 낮다.

    하지만 지금처럼 ‘적색지대’라는 룰이 있는 배그옵에서는 꽤나 위험한 능력으로 변한다.

    가만히 있으면 리타이어 되는 적색지대에서 일정 시간이나마 기동력이 묶인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으니까.

    그 증거로.

    “하하하, 이쪽은 안전지대라서 괜찮거든.”

    블레어는 협곡 위 안전한 곳에 있었다.

    동시에 점점 확장된 적색지대는 우리가 있던 곳마저 완전히 삼켜 버렸다.

    블레어와 나머지 모두가 있는 곳은 불과 십 수 미터 거리를 두고 안전구역과 위험구역으로 갈리게 된 것이다.

    “으으윽!?”

    모든 이들이 발버둥쳤지만 제한시간 내에 블레어의 공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이는 없어 보인다.

    놀랍게도 당황하고 있는 이들은 한국 팀과 에티오피아의 팀 멤버들뿐만이 아니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이건 사전에 합의된 전략이 아니잖아!”

    “…….”

    존 호킨스와 올리버 마르코마저 잔뜩 당황한 채로 블레어에게 항의하고 있었다.

    평소 과묵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라치만 구룽조차도 불쾌하다는 듯 블레어를 노려본다.

    그리고 튜더, 영국 팀의 리더조차도 싸늘한 시선으로 블레어를 응시하고 있었다.

    “토니. 이게 무슨 짓이지? 이런 계획을 보고받은 기억은 없는데.”

    튜더의 말에 블레어는 콧방귀를 뀌었다.

    “승리를 위해 제일 효율적인 방법을 찾았을 뿐입니다.”

    “아군까지 함께 잡히지 않았나.”

    “그래서 더더욱 적들을 방심시킬 수 있었지요.”

    블레어의 말은 원론적으로 틀리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그를 제외한 14명의 선수 전원이 리타이어 되게 된다.

    자동으로 생존자 1명의 영국 팀이 1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고 당연히 MVP플레이어는 토니토니 블레어 주니어가 되겠지.

    “……너 이 자식. 설마 개인 성과를 노리고 이따위 짓을 한 거냐?”

    튜더가 분노했다.

    그는 몸을 옥죄고 있는 붉은 선을 억지로 끊어내려 했다.

    뚜드득! 우득!

    천천히 부서져 나가는 붉은 선. 하지만 그보다 엄습해 오는 적색지대의 위협이 훨씬 더 빠르다.

    ‘그래도 어떻게, 움직일 수는 있겠군.’

    튜더는 이 상황에서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에에잇!”

    적색지대 밖으로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마루 마모. 그녀는 밖에 있는 식물을 조종해 자신의 몸을 밖으로 잡아 빼낸다.

    그것을 본 블레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퍼억!

    마루 마모의 발밑에서 강철로 된 가시들이 솟구쳐 오른다.

    전신이 난자된 마루 마모는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리타이어 되었다.

    “후후후후. 미리 함정도 매설해 뒀지.”

    블레어는 말을 마친 뒤 붉은 끈에 묶여 있는 한국 팀과 에티오피아 팀을 돌아보았다.

    “아아, 동양인과 흑인에게 딱 어울리는 광경이로군.”

    그 말을 들은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나만 빼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블레어의 감시를 피해 티 안 나게, 슬쩍슬쩍 옆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내 덕에 잡것들의 협공에서도 무사할 수 있는 것 아냐. 조금만 기다리라고. 무혈 우승이라는 게 뭔지 보여 줄 테니까 말이야.”

    블레어가 튜더를 향해 주절거리는 동안 나는 옆으로 또 크게 한 보 움직였다.

    ‘그래, 계속 지껄여라.’

    애초에 이 씬 레드 라인이라는 것은 나를 속박할 수 없다.

    <이어진>

    LV: 96

    HP: 960/960

    호칭: 크툴루 크라켄 킬러(특전: 고생물)

    나에겐 강력한 정신계 마법 면역력이 있기 때문이다.

    몸이 상당히 무겁고 스피드도 현저하게 저하되긴 했지만 그래도 이동은 가능하다.

    이렇게 적당히 묶여 있는 척 하다가 바로 적색지대 밖으로 튀어나가 블레어를 잡아 죽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역으로 이 판을 내가 가져갈 수 있게 될 테니까.

    말하자면 토니토니 블레어가 잘 차려 놓은 밥상을 내가 홀딱 집어삼키게 되는 것이다.

    ‘……뭐, 영국 요리는 별로 취향에 안 맞지만.’

    그런데 그때.

    또다시 내 예상을 벗어나는 변수가 생겼다.

    콰콰콰콰쾅!

    요란한 폭발과 함께, 재수 없게 이죽거리고 있던 블레어의 발밑에서 시뻘건 용암 분수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다시 전장의 분위기를 뒤집어 놓는 이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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