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743화 (743/1,000)
  • 743화 술잔을 나누면 형제 (6)

    에티오피아(Ethiopia).

    세계적인 마라토너를 여럿 배출한 나라.

    에티오피아의 선수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는 초장거리를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질주한다.

    국토의 절반 이상이 고원지대에 있어 국민들 전체가 희박한 산소량에 적응했기에 평균적으로 뛰어난 폐활량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에티오피아가 마라톤 강국이 된 이유 중 하나.

    그리고 지금 한국 팀은 에티오피아 팀의 저력을 몸소 체감하고 있었다.

    윤솔, 드레이크, 마태강, 유세희는 지친 기색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들 역시 게임 센스가 좋은 이들이기에 금방 이변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이 맵, HP랑 MP 자연회복이 엄청 더디네.”

    “가만히 있어도 체력이 조금씩 조금씩 깎여나가고 있어.”

    “고산지대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으앙~ 어쩐지 아까부터 계속 지치더라!”

    오늘의 경기장인 고고한 잉카는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가만히만 있어도 체력이 깎이고 자연회복 되는 체력의 양도 확 줄어든다.

    현실에서도 높은 고산지대에 가면 숨이 차고 쉽게 피로해지는 것이 반영된 것이다.

    그때, 윤솔이 내게 소곤거리며 물었다.

    “대장. 근데 아까 그러면 간 문제가 아니라 폐 문제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니야?”

    날카로운 지적이다. 사실 드립 한번 쳐 보고 싶어서 무리수 한번 둬 봤다.

    그러자 이번에는 드레이크가 의문점을 제기한다.

    “그럼 2차 대격변 때의 방주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어야 하지 않았나? 더군다나 거긴 이곳보다 고도가 높은 곳인데.”

    아, 이런 질문 좋군. 고인물의 설명본능을 자극하잖아.

    사실 설명할 때는 아니지만 입이 근질거려서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나는 드레이크에게 물었다.

    “드레이크, 바벨이 무엇으로 이루어졌지?”

    “……!”

    동시에 드레이크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역시 이해력이 빠르군.

    “나무. 산소. 나 무산소(I have no oxygen)!”

    그렇다. 바벨은 애초에 거대한 식물로 이루어진 공간.

    그곳에서 발생하는 산소는 고도와 상관없이 대기 상태를 지표면에 가깝게 만들어 준다.

    한국팀, 아니 평소에 고도에 신경 쓰지 않는 나라의 플레이어라면 응당 모를 만도 하다.

    나는 바삐 오더를 내렸다.

    “어어…NE 방향! 그리고 우익 쪽은 사운드 계속 들어! 드레이크! 리드 샷 해야 해! 대기가 다르면 궤적도 달라진다! 솔아, 지금 풀피니까 2초 뒤에 힐! 아니, 2.4초! 집중해!”

    그러나 나의 참관에도 불구하고 전투 양상은 쉽게 뒤집히지 않는다.

    구르무와 타파라는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윤솔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서로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밸라이는 소금으로 변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한다.

    마루 마모는 엄청나게 많은 촉수뿌리들에 파묻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에티오피아 선수들은 고산지대에서 사냥하는 것에 익숙한 듯 이미 철저한 대처를 하고 온 모양.

    현실에서도 고산지대가 더 익숙한 이들이기에 퍽 잘 어울렸다.

    “사실 뭐, 맵이 어디든 상관없어.”

    나는 고개를 들어 구릉지대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는 에티오피아 팀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정말로 강하다. 단지 맵 때문에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내가 없었다면 한국 팀도 위험했겠는데.’

    내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에티오피아의 5인이 총력전을 걸어왔다.

    쿠르르르륵! 쩌저저적!

    불기둥과 서리폭풍이 좌우 양익의 퇴로를 차단한다.

    구르무와 타파라는 일부러 윤솔이 땅을 뒤집어 방어할 수 없게끔 계속해서 경사로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아앗!?”

    윤솔은 발로 땅을 굴러 산사태를 일으키려 했지만 그랬다간 경사지대 하층부에 있는 동료들에게 오히려 피해가 갈까 봐 쉽게 힘을 쓸 수 없었다.

    더군다나.

    퍼펑! 펑!

    암염 가득한 대지에서는 자꾸만 흰 칼날이 튀어나온다.

    흰 소금으로 된 블레이드가 살을 한번 가르면 그 상처 안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지 않았다.

    다만 흰 칼날이 붉게 물들 뿐이다.

    “소금이 피를 빨아먹는 건가. 베이면 체력을 빼앗긴다 조심해!”

    드레이크는 단검으로 소금 칼날을 후려쳐 부쉈다.

    하지만 밸라이가 만들어 내는 소금 송곳과 칼날은 계속해서 대지를 뚫고 튀어나오고 있었다.

    “마법사가 탱커를 하는 이유가 있었군. 부숴도 부숴도 되살아나니 어딜 노려야 하는지 원.”

    드레이크는 벌써 몇 번이나 밸라이의 머리에 화살을 박아 넣었지만 그때마다 계속해서 소금으로 변해 부서졌다가 다시 재생하는 밸라이의 능력에 막막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마루 마모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밸라이 삼촌! 좀 멀리 떨어져서 싸우세요! 제 식물들이 아저씨 소금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아아, 미안하구나 얘야.”

    밸라이가 소금의 칼날을 슬쩍 거두자 그 부분의 땅에서 식물의 뿌리가 미친 듯이 뻗어 나온다.

    촤촤촤촤촤촤촥!

    마루 마모는 거대한 식물뿌리와 커피콩 군단을 이끌고 유세희와 마태강을 한꺼번에 몰아붙이고 있었다.

    마태강은 주먹에 실린 불로 식물을 피격했지만 식물들은 몸이 불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든다.

    (다만 유일하게 싫어하는 것은 아군인 밸라이의 소금이었다)

    “2차 대격변 이후 식물들이 많이 난폭해졌다더니 정말이었군.”

    “으으, 어떻게 막아야 할지 감이 안 서는데.”

    마루 마모의 메타는 대량의 넝쿨식물과 뿌리식물, 폭발성 열매들을 이용한 인해전술 메타.

    마태강은 초창기 국내전 당시 오승훈의 인해전술 마법을 본 적 있었고 유세희 역시 대만 전에서 인해전술의 대가 리덩후이를 상대로 싸워 본 적이 있었기에 어찌어찌 버티고는 있지만… 지금 마루 마모가 보여 주는 압도적인 식물 군단을 상대로는 도무지 승기를 잡을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팀원에게 힐을 걸어 줘야 할 윤솔은 구르무와 타파라가 만들어 내는 불과 얼음의 벽에 갇혀 있었고 드레이크는 밸라이와 팽팽하게 접전을 치르다가 체력이 떨어짐에 따라 조금씩 밀려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한국 팀의 패색이 짙어져갈 무렵.

    …쾅!

    모든 것을 뒤집는 한 방이 있었다.

    “크헉!?”

    마른하늘에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

    그 날벼락 같은 단말마에 에티오피아 팀 전원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바닥에 깊게 패인 크레이터 중앙에 쓰러져 있는 페이사 릴레사가 보인다.

    심지어 그는 전신에 화산석 같은 중장갑을 두르고 양 손에서 용암과 화산재를 뿜어내고 있는 채다.

    천하의 페이사 릴레사가 전투준비태세 100%인 상황에서 이런 꼴을 당할 수 있다는 것에 모든 이들이 크게 놀랐다.

    그리고 세계랭킹 3위, 블랙 퓨마, 에티오피아 최강의 유저를 일격에 날려버린 주먹.

    ……바로 나지롱!

    “뭐, 뭐야!? 대장?”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페이사를 무릎 꿇릴 수 있는 자가 있다고!?”

    에티오피아 선수들이 급격히 당황한다.

    나는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다시 한번 페이사의 가드 위로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는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이다.

    콰-쾅!

    또 한 번 날아든 주먹이 페이사의 가드를 뒤흔들어 놓았다.

    페이사는 정신이 아득해진다는 듯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고 그 뒤를 차근차근 따라붙을 뿐이다.

    “비앙카의 대공황 주먹도 이것에 무너졌지.”

    내가 오른손을 들어 보이자 페이사의 등 뒤로 집결한 에티오피아 전사 4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팀전에 있어 대장전은 아주 중요하다.

    내가 페이사와의 1:1에서 승기를 잡은 것은 나머지 팀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사기가 약간 줄어든 에티오피아 팀은 잔뜩 경계하는 기색으로 뒤로 물러났고 그 틈에 한국 팀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윽고 윤솔과 드레이크, 마태강, 유세희가 내 뒤로 포진해 섰다.

    윤솔이 힐을 걸어 주었기에 한국 팀은 전원 회복, 에티오피아 팀은 힐러가 없었지만 그래도 선수 전원이 체력을 거의 꽉 찬 상태로 유지 중이다.

    국면은 다시 팽팽해졌다.

    “……말도 안 되는 공격력이군. 당신, 대체 왜 언랭인 건가?”

    페이사는 금이 간 완갑과 방패를 살펴본 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나와 페이사의 시선이 한 곳에서 맞부딪쳤다.

    페이사의 호수처럼 검고 깊은 눈동자가 가면의 구멍 속 나의 눈을 들여다본다.

    “…….”

    양 팀 대장들 사이에 흐르는 짧은 침묵.

    우리가 막 서로를 향해 다시 움직이려는 순간.

    삐이이이이이-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롭게 울리는 이명.

    동시에 이 자리에 선 모두의 시야가 붉게 물든다.

    레드존! 우리가 서 있던 구역이 또다시 금지구역으로 설정되었다.

    나는 바로 오더를 내렸다.

    “전투는 나중에. 일단 자리부터 뜬다.”

    페이사 역시 비슷한 판단을 했다.

    “아직 체력은 많으니 승부를 서두를 것은 없지. 다들 적색지대 밖으로!”

    나와 페이사는 오더를 내린 직후 서로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

    “…….”

    어차피 여기서 더 싸워 봐야 레드존의 제한시간 안에 끝날 승부도 아니다.

    게다가 아직 영국이 남았으니 어부지리를 애먼 놈에게 안겨 주기보다는 차라리 잠시 휴전하자는 신호였다.

    ……하지만.

    “아니. 잘 싸우다가 어딜 가시는가 친구들?”

    에티오피아 선수들이 처음 나타났던 암염지대의 협곡 위, 그보다도 더 높은 곳에 드리워지는 다섯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영국 팀 ‘로얄 블러드’, 그들이 결정적인 순간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구의 사내 존 호킨스와 올리버 마르코,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노인 라치만 구룽까지.

    빈정거리는 듯한 웃음이 섞여 있는 멘트로 도발을 하는 이는 지난 영국 대 브라질 전의 MVP플레이어 ‘토니토니 블레어 JR’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여기 있는 모두가 익히 아는 얼굴이 보인다.

    에드워드 튜더 프랜시스.

    전 세계 통합랭킹 1위가 드디어 등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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