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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742화 (742/1,000)
  • 742화 술잔을 나누면 형제 (5)

    뜨거운 태양빛 아래 풀썩이는 마른 먼지.

    각 져 있는 암염들이 툭툭 불거져 나와 있는 주위로 건조하고 짭짤한 바람이 불어온다.

    휘이이이잉-

    회전초 하나가 바스락거리며 경사로를 굴러가고 있었다.

    …쿵!

    나는 필드로 한 발을 크게 내딛었다.

    오늘의 맵은 ‘고고한 잉카’, 남대륙 중앙부에 있는 높은 고산지대이다.

    대기 중 산소 농도가 부족해서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깎여나가는 것이 특징, 따라서 서식하고 있는 몬스터들도 대부분 이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여 레벨이 높고 성격이 더럽다.

    ‘어디 보자, 필드 위 몬스터들은 어지간하면 처리반들이 정리했겠고. 지하종 몬스터들도 다 잡은 건가?’

    나는 호기심에 한번 발을 굴러보았다.

    몇 번이나 쿵쿵거리며 돌아다녔지만 딱히 땅 밑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는 없다.

    아마도 모든 몬스터들이 깔끔하게 박멸된 모양.

    ‘……이야, 이 근방의 지하종 몬스터들은 잡기 빡셌을 텐데. 처리반 직원들도 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만.’

    현재 플레이어들 중 넘버원은 누가 뭐래도 영국의 에드워드 튜더 프랜시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GM 소속의 ‘처리반’ 인원들을 배재한 카운팅이다.

    만약 처리반의 플레이어들 역시 계급장을 떼고 한 사람의 플레이어로서 현 천상계 랭커들과 1:1 캐삭빵을 뜨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어쩌면 랭커들 쪽이 무참히 발릴지도 모르겠는걸?’

    나는 이루어지지 않을 상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애초에 GM 처리반 직원들의 계정은 일반 플레이어는커녕 이 세계관 자체에 개입할 수 없게끔 되어 있으니까.

    (물론 대회 때는 예외이다)

    바로 그때.

    내가 만들어 낸 흙먼지를 보고 접근해 오는 이들이 있었다.

    “어이, 대장! 잘 찾아왔군.”

    드레이크가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엇! 사부. 드디어 찾았습니다.”

    “나이테 따라 왔어요!”

    “나는 구름 방향 보고!”

    그리고 속속들이 도착하는 마태강과 유세희, 그리고 윤솔까지.

    이렇게 우리 다섯은 대회 시작 직후 바로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낙오자 하나 없이 말이다.

    “자, 우선은 적색지대를 피하자고.”

    전원이 모이자마자 현 위치가 적색지대로 지정되었기에 우리는 빨리 이곳을 탈출해야 했다.

    나는 앞서 이동하면서 배그옵에 대한 강의를 했다.

    유세희나 윤솔 등 아직 이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위한 배려다.

    “잘 들어. 그리고 너희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가늠해 봐.”

    <# 후퇴해야 할 때>

    1류: 상황을 보고 뒤로 빠진다.

    2류: 뒤로 빠진 뒤 상황을 본다.

    3류: 상황이 닥쳐야 뒤로 빠진다.

    死류: 뒤로 못 빠진다.

    <# 적이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1류: 적이 사라진 것을 눈치 채고 신호를 보낸다.

    2류: 적이 사라진 것을 눈치 채긴 했는데 급한 와중이라 신호를 못 보냈다.

    3류: 급하게 신호를 보내려다가 적에게 죽는다.

    死류: 적에게 죽고 나서 왜 아무도 신호를 안 보내줬냐고 화낸다.

    <# 다 같이 모여야 할 때>

    1류: 상황을 보고 한 곳으로 모인다.

    2류: 한 곳으로 모이면서 상황을 본다.

    3류: 한 곳으로 모이지 않은 채 상황만 본다.

    死류: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른다.

    <# 오더를 내릴 때>

    1류: 서로 오더를 내리며 소통한다.

    2류: 제일 잘하는 놈이 오더를 내린다.

    3류: 내가 제일 잘하므로 내가 오더를 내린다.

    死류: 누군가 오더를 내리면 걔가 제일 잘하나 보다 싶다.

    <# 적과 마주쳤을 때>

    1류: 이유가 없으면 싸우지 않는다.

    2류: 이길 수 없으면 싸우지 않는다.

    3류: 싸우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死류: 싸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

    <# 같은 팀 동료와 대립할 때>

    1류: 이유가 없으면 싸우지 않는다.

    2류: 게임에서 이길 수 없으면 싸운다.

    3류: 싸우느라 이길 수 없다.

    死류: 싸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

    <# 팀의 승리 후 기여도를 논할 때>

    1류: 스노우볼을 잘 굴려줬으면 최고다.

    2류: 킬어시를 많이 먹었으면 최고다.

    3류: 우리팀이 승리했으면 내가 최고다.

    死류: 애초에 승리해 본 적이 없다.

    .

    .

    “어때, 다들 지금의 자기 수준이 보여?”

    내 말에 드레이크도 마태강도 유세희도 윤솔도 고개를 끄덕거린다.

    “스스로 이런 말 하기는 좀 민망하지만 나는 1류 같구만.”

    “저는 2류 같습니다.”

    “에엥, 저는 2류랑 3류 중간요.”

    “……히잉, 나는 4류야.”

    우리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막 적색지대를 벗어날 무렵.

    …퍽!

    멀리서 무언가가 날아와 발밑을 때린다.

    나조차도 미처 감지해 내지 못한 원거리 기습, 그것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연히 드레이크 덕분이다.

    “저격수가 있군.”

    드레이크는 내 뒷덜미를 잡아 슬며시 뒤로 당긴 뒤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발가락 끝에 박힌 화살을 바라보았다.

    “나무뿌리로 된 화살이네. 맞아 봤자 데미지는 별로 없었을 거야.”

    “하지만 독이 발라져 있을 수도 있지.”

    “어차피 내 혈관 속에는 벨제붑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을까?”

    “그건 인정.”

    나와 드레이크는 동시에 협곡 위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5인의 선수들이 있었다.

    에티오피아의 강뉴부대!

    페이사 릴레사가 이끄는 전사들이 당당히 선전포고를 날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게는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얼마 전에 친구도 생겼고. 사감은 없다.”

    페이사는 우리를 향해 선고를 내렸다.

    동시에 에티오피아의 5인이 우리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콰콰콰콰쾅!

    기습을 안 당한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강렬한 불과 얼음의 폭포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의 하루에는 한국의 사계절이 모두 들어가 있지.”

    “어디 한번 뜨거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맛보라구!”

    화염 마법사 구르무와 얼음 마법사 타파라가 만들어 내는 불과 얼음은 서로가 서로의 기운을 방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그리고 그것을 막아 낸 이는 바로 윤솔이었다.

    우지지지직!

    윤솔은 하린마루 특유의 엄청난 근력으로 땅을 뒤집어 거대한 토벽을 만들었고 그것으로 불과 얼음을 싹 걷어내 버렸다.

    불과 얼음, 토사가 뒤섞여 지독한 혼란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스스스스스스……

    윤솔은 자기가 만들어 낸 토류의 흐름이 바뀌는 것에 깜짝 놀라야 했다.

    뒤집어진 흙 밑에는 부서진 암염 부스러기들이 잔뜩 널려 있었는데 그것이 순식간에 칼날의 형상을 취해 윤솔의 목을 노린다.

    밸라이! 전신을 소금으로 만들어 윤용하는 기묘한 탱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윤솔의 흙 방어벽을 뚫고 와 소금의 칼날을 휘둘렀다.

    따-앙!

    하지만 그것은 마태강의 건틀릿에 의해 막혔다.

    “소금은 구워야 제맛이지.”

    이윽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마태강의 두 주먹이 밸라이의 전신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뻘겋게 타오르는 소금! 허연 것이 검고 붉게 물들며 퍽퍽 튄다.

    아무리 밸라이라고 해도 근접딜러 마태강의 벤치마킹은 부담스러운지 몸을 다시 소금으로 되돌려 흙벽을 빠져나간다.

    마태강이 그런 밸라이를 추격하려 할 때.

    “오호, 거기까지.”

    수많은 부진목 나무뿌리들이 생겨나 마태강을 그물처럼 뒤덮었다.

    달달한 커피향이 나는가 싶더니 이내 마루 마모가 마태강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라르(Harar), 카파(Kaffa), 울레가(Wollega), 리무(Limu), 시다모(Sidamo), 예가체프(Yirgacheffe), 테피(Tepi), 베베카(Bebeka).

    하나하나가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커피콩들이 날아들어 마태강을 노린다.

    그러나.

    퍼퍼퍼퍼퍼펑!

    유령처럼 나타난 유세희가 지그재그로 휘두르는 대낫에 커피콩들은 목표물에 닿기도 전에 두 동강 나 터져 버렸다.

    “나이스 세희.”

    그리고 드레이크가 쏘아 보낸 저격은 그 촘촘한 그물망을 뚫고 마루 마모의 어깻죽지를 관통한다.

    그야말로 신기에 이른 저격 솜씨였다.

    “……크윽!?”

    마로 마모가 뒤로 물러서는 틈을 드레이크는 놓치지 않았다.

    드레이크가 다시 한번 화살을 꺼내드는 그 순간.

    “귀찮은 원딜이로군.”

    어느새 들려오는 으스스한 목소리.

    ‘어느새!?’

    드레이크는 오싹 타오르는 소름을 느끼고는 재빨리 뒤돌아섰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검은 손 하나가 드레이크의 얼굴을 뒤덮었다.

    페이사 릴레사. 일명 블랙 퓨마!

    그는 드레이크를 내려다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드레이크 캣이라고 했나?”

    “…….”

    “고양이보다는 퓨마가 더 강하겠지.”

    에티오피아 팀의 리더이자 공식 세계랭킹 3위인 페이사 릴레사.

    그의 오른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용암과 왼손에서 폭발하는 화쇄류는 튜더나 비앙카조차도 제대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원딜러인 드레이크로서는 더더욱.

    “죽어라.”

    페이사는 날카로운 가시 갑옷을 위시한 채 드레이크를 찍어 눌렀다.

    근접 딜 한 번으로 승부를 볼 요량 같았다.

    하지만.

    “안 되지.”

    그것을 턱 막아서는 손, 바로 나의 손이다.

    마동왕. 내가 앞으로 나서 페이사의 손목을 잡아챈 것이다.

    …꽈아아악!

    손과 손이 맞물린다. 자존심을 건 악력 대결.

    “……!?”

    페이사는 나의 왼손 악력에 깜짝 놀란 듯싶다.

    하기야, 대륙의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단 1분 1초도 쉬지 않고 뚫고 나가는 데스웜의 힘이 담겨 있는 건틀릿이니 당연할 수밖에.

    퍼엉!

    일순간, 페이사의 오른손 손바닥에서 용암이 뿜어져 나왔다.

    페이사는 근접 딜러이면서도 나와의 근접전을 포기한 것이다.

    ‘방금 이 장면, 핫 클립 감이군.’

    나는 기선을 제압한 것에만 우선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서 페이사의 손을 뿌리치는 동시에 드레이크의 뒷덜미를 확 잡아채 뒤로 빠졌다.

    “아까 나무 화살 때의 빚은 갚았지?”

    “아아, 인정.”

    드레이크는 내 뒤로 나동그라진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콰쾅! 퍼퍼퍼펑!

    한국 팀과 에티오피아 팀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맹렬히 교전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꽤 팽팽해 보이는 싸움.

    하지만.

    “으음. 좀 힘들겠는데?”

    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한국 쪽이 점점 불리해질 것을 안다.

    실제로 윤솔, 드레이크, 마태강, 유세희가 만들고 있는 라인은 구르무, 타파라, 밸라이, 마루 마모가 만들고 있는 라인에 점점 뒤로 밀려난다.

    “어째 점점 피로해지는데요?”

    “맞아, 유효타를 허용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지치지?”

    “……어쩐지 엄청 피곤한걸.”

    “으아! 몸이 너무 무거워요!”

    분명 종족값도, 결정력도, 내구력도, 선공 제압능력도, 서포트도 딱히 밀리는 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이 차이란 대체 무엇일까?

    밀려나는 본인들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

    그러나 나는 그 이유를 아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간 때문이야.”

    자칫 유행 한참 지난 CF 유행어를 다시 읊조리는 아저씨의 개그처럼 들릴까 봐 매우 작게, 혼자서만, 비밀스럽게 중얼거린 대사였다.

    “간 때문이라고? 대장!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간 때문이라니! 간이 왜! 간과 이 피로가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이지? 가르쳐 줘! 제발!”

    귀가 밝은 드레이크 때문에 망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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