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0화 왕좌의 게임 (3)
드디어 ‘월드 얼티메이트 올림피아드(World Ultimate Olympiad)’의 2차전, 배틀로얄 그라운드 제로 오버가 시작되었다.
한국, 에티오피아, 영국이 벌이는 각축전.
이 살벌한 3파전의 결과, 오늘 하나의 국가는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된다.
과연 왕좌를 놓고 겨루게 될 최후의 두 국가는 어느 국가가 될 것인가!
“……끙.”
나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검은 커튼 뒤로 실낱같은 햇빛이 눈부시다.
어제 잠시 맥주를 마시러 나간다는 게 덜렁교 사람들과 만나는 바람에 술자리가 길어졌다.
고인물 모드였기에 대회가 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어 잡혀 있느라 수면 시간이 약간 부족해졌다.
결국 방송을 핑계로 일찍 나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아, 나는 10시간 이하로 자면 피곤한데.”
아직 그래도 대회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다.
나는 일어난 김에 대회 전까지 쌓인 메시지들을 조금 읽어 보기로 했다.
-띠링!
메일을 켜니 제일 먼저 뜨는 팬레터가 보인다.
<감히 존경이라 부르기 어려운 그대에게...>
-고인물 님!
-나의 아기 다람쥐.
-늘 하는 생각이지만 그 큰 손을 꾸물거리며 마우스를 움직이는 당신의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존경스럽습니다.
-마치 짜릿한 첫사랑의 충격, 고인물 님을 처음 보게 된 그 순간의 충격이 늘상 고인물 님의 방송에는 있습니다.
-고인물 님. 나의 아기별.
-운명이란 것을 믿으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운명 따윈 믿지 않는다, 나는 자기 자신을 믿는다...그리 말들을 합니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것은 존재하고, 신 역시 존재하며, 늘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답니다.
-고인물 님은 특히 그걸 아셔야 합니다.
-왜냐면 고인물 님은 신이 가장 공들여 만든 작품이니까요.
-고인물 님의 보드라운 살결, 도톰한 허벅지, 크고 아름다운 눈, 신에 가까운 컨트롤 능력까지도.
-이 모든 게 신의 작품이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요.
-고인물 님. 나의 초롱불.
-고인물 님은 불안함과 무의미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제게는 구원입니다.
-고인물 님이 게임을 해야 내가 살고.
-고인물 님이 레이드를 뛰어야 내가 웃습니다.
-그래서 고인물 님의 고통은 다 제가 갖고 싶습니다.
-게임을 하는 고인물 님을 보면 그 모든 고통도 잊히고 저 역시 행복하니까요.
-고인물 님!
-늘 행복하기를 고인물 님을 빚은 신께 기도합니다!
<별님세개>
“와. 글 되게 잘 쓰신다.”
사실 이쯤 되면 고도의 안티가 아닌가 싶지만 이 분은 덜렁교 내에서도 유명한 열혈팬이기에 그럴 수 있다.
나를 향한 애정이 잘 드러나 있어서 뭔가 뭉클하면서도 고마웠다.
“……근데 고인물은 대회에 참가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팬레터가 오는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한 뒤 마동왕 명의로 온 대회 격려 편지들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모든 지인들에게서 응원 메시지가 왔다.
당연히 내가 모르는 이들에게서 온 응원 메시지들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그중 가장 위에 있는 것은.
<님아. 잘 해. 다치지 말고.>
유다희가 보낸 문자였다.
E스포츠 대회에서 선수가 부상당할 일은 거의 없지만 말이다.
나는 그녀에게 별 생각 없이 답장을 보냈다.
<고맙다. 잘 하고 올게.>
그러자.
-띠링!
바로 답장이 온다.
<아직도 대회장 안 왔냐ㅡㅡ? 팬들 다 입장해 있는데.>
<엉. 선수들은 아직 시간 좀 남았다. 1시간쯤?>
<아오. 그럼 이 오프닝이 1시간 넘게 이어진다는 거? 되게 기네.>
그녀는 심심한지 바로바로 답 메시지를 보내온다.
내가 준비를 위해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띠링!
유다희의 메시지가 연달아 왔다.
<야. 근데 다른 선수촌 보면 막 선수들이나 팬들이나 막 눈 맞아서 호텔 방으로 찾아가고 그런다는데. ...님은 뭐 그런거 없냐?>
나는 그 문자를 보자마자 한숨을 푹 쉬었다.
어제 드레이크와 마태강의 방문 앞이 시끌시끌했던 것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에게 달라붙던 수많은 덜렁교 남자들 역시도.
나는 답장을 보냈다.
<있었지.>
‘남자이긴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래도 거짓말은 아닌 것이다.
나는 문자를 보내고 나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간단하게 씻은 뒤 호텔의 로비로 나왔다.
로비 구석에 먼저 준비를 마치고 나와 있는 마태강과 유세희가 보인다.
……한데?
둘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
마태강은 매우 지치고 피곤한 표정, 유세희는 어딘가 화가 난 얼굴이었다.
내가 로비로 나가자 마태강이 볼멘소리를 했다.
“사부. 어제 왜 거짓말 하셨습니까.”
“어? 내가 뭘?”
“어제 담배 피고, 술 먹고, 병 깨고, 몸에 싸인펜으로 문신 막 그려 놓으면 여자들이 도망갈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어 그랬지.”
“근데 그랬더니 더 좋아하던데요.”
“?”
“세희가 다 쫓아내 주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마태강이다.
이게 그 ‘될놈될’인가 뭔가 그건가?
바로 그때. 유세희가 화난 소리로 나를 다그쳤다.
“사부는 너무 연애고수에요.”
“??”
“그런 팁울 오빠한테 전수해 주지 마요! 울 오빠는 뭘 해도 다 멋있어 버리니까.”
“???”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유세희는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그리구 왜 울 언니한테 뻥 쳐요! 내가 다 일렀어요! 어제 사부 아저씨들이랑만 뒤엉켜서 밤새 술 퍼먹었다고!”
음. 그새 통화가 됐나? 역시 자매 간이다.
근데 뻥 친 적은 없는데…….
* * *
내 이름은 유세희.
눈앞에서 어리버리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부를 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제자이다.
나는 옆에 있는 태강 오빠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큰언니는 연애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나나 둘째 오빠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다 퍼 주고 헌신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 부쩍 질투심이 많아진 것 같아서 스스로도 자중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오늘만은 예외다.
그리고 사실 내가 사부에게 이렇게 투정을 부리는 이유는 태강 오빠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아까 전에 큰언니의 전화를 받은 바 있다.
큰 시합을 앞둔 내게 격려차 전화를 한…… 줄 알았는데.
[야! 막내야! ‘걔’ 지금 뭐 하냐!?]
큰언니의 목적은 대놓고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뭐, 본인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 했지만.
그리고 ‘걔’라니? 애초에 걔가 누구야?
내가 ‘걔’의 정체에 대해 되묻자 큰언니는 드물게 당황하여 소리친다.
[걔가 걔지 그럼 걔가 누구야!]
아. 그러네. 누군지 알 것 같다. 애초에 큰언니가 관심을 보이는 인물은 엄청나게 제한적이니까.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큰언니는 대답하기보다는 다른 질문을 했다.
[어젯밤에 걔 호텔 방으로 누구 들어간 사람 있었어? 아씨, 마교 팬클럽 회원들이 밤새 호위 서서 그럴 일 없었을 텐데? 걔가 따로 외출이라도 했나? 그러면 우리가 못 막지…… 아니 대회 전에 그런 거 하면 기량 떨어지는데 바보 놈이……!]
왜 이렇게 당황해 있는지 모르겠다. 엄청 급해 보이는데?
‘그런 게’ 뭐냐고 물어보자 큰언니는 대답을 해 주는 대신 화를 냈다.
[그, 그런 게 있어! 쬐끄만 게 뭘 그런 걸 궁금해 하고 그래!]
나에게는 평소 화를 절대 내지 않는 큰언니인지라 조금 놀랐다.
하도 다급해 보였기에 ‘좀 알아봐 줄까?’ 라고 묻자 큰언니는 반색을 했다.
(이 또한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솔 언니와 드레이크 씨를 찾아가 어젯밤 사부의 행방에 대해 물었고 늘 그렇듯 별 것 없는 근황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으응? 아마 남미의 남자 팬들에게 잡혀 있었을걸? 뭐 3대 500인가? 치게 해 준다면서 근육 부위 별 트레이닝인가 그런 거 얘기하는 것 같던데.’
‘여자? 하하하. 그도 여자들에게 관심 없어 보이고 여자들도 그에게 관심 없어 보인다만. 이미 오래된 현상이지. 스캔들 같은 것은 걱정 마라.’
솔 언니와 드레이크 씨는 사부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이고 있었다.
애초에 이게 신뢰의 영역인지는 조금 의문이 들긴 하지만.
다시 큰언니한테 전화를 해서 ‘그런 것(?) 없다’라고 전하자 큰언니는 약간의 침묵 끝에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웃었다.
[핫하! 그럴 줄 알았다! 그런 놈 따위 매력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약간 진지한 목소리로 ‘사부는 매력이 있어’라고 하자 큰언니는 그제야 약간 움찔했다.
[뭐, 그야 나도 알지…… 아는데. 여자들한테는 잘 안 먹히는 스타일이잖아. 좀 오래 옆에 두고 봐야 안다는 말이야.]
큰언니의 말에 잠시 발끈했던 것은 사실이다.
내가 아는 사부는 의외로(?) 스캔들 하나 없고 건실하며 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이니까.
음. 나로서는 인생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뭐 아무튼.
내가 사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지금 이 순간 그리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나는 큰언니에게 사부에 대한 것을 물었다.
[……어? 뭐, 뭐, 뭐? 어어?]
사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큰언니는 핸드폰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로 당황했다.
상대방이 다른 이성과 있을 때 화가 나면 좋아하는 거라고 들었다.
내가 사부와 다른 여자가 같이 있는 게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큰언니는 약간 고민하던 끝에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 변태 자식! 어떤 멀쩡한 여자 앞날을 망치려고! 내가 막아야지! 공익을 위해서! 아까도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야!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라 막내야!]
큰언니와는 나이 차도 꽤 나는데, 이럴 때마다 내가 오히려 언니가 된 기분이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이제 시합이 아주 가까워졌다.
……뭐. 저 둘 사이는 아직 먼 것 같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