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739화 (739/1,000)

739화 왕좌의 게임 (2)

1차전이 끝나고 난 다음날, 그리고 2차전이 시작되기 하루 전이기도 한 날.

전사들에게는 하루간의 휴일이 주어졌다.

한국, 에티오피아, 영국의 선수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24시간을 쓴다.

명상에 잠기는 이, 놀러 나가는 이, 쿨쿨 자는 이, 밀렸던 웹소설을 읽는 이…….

나 같은 경우는 맨 마지막의 케이스이다.

“‘철혈검가 사냥개의 회귀’라…… 신작 소설인가? 어디…… 음, 노잼이네. 하차합니다.”

뒹굴거리며 웹소설을 읽는데 자꾸 위에 알림 표시가 뜬다.

핸드폰을 꺼 놓으니 메일 알림이 울리는 것이다.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 개인적으로 응원 메일을 보내는 팬들이 많다.

이참에 메시지나 한번 확인해 볼까 싶어 여러 개의 핸드폰을 열자 낯익은 이름들이 남긴 부재중 통화나 메시지들이 쭉 떴다.

-홍영화: 님님 지금 영국임? 나도임ㅎㅎ 근데 왜 읽씹ㅡㅡ?

-박보연: ㅅ싸부 영국 가썽요? 완전부럽...사진좀 보내바욬ㅋㅋㅋ 글구 올 때 선물>

-아키사다 아야카: 오늘 영국의 비 올 확률이 ٩(๑'▽'๑)۶ 90%래요! 비 맞지 않게 조심하셔요!

-윤솔: 어진아 오늘 뭐 할거야?? 세희랑 태강이가 거리 구경하러 같이 가자는데 혹시 시간 괜찮아?

-이연호: 형님 경기 봤습니다. 중간에 배 아팠는데 자리를 뜰 수가 없어서 결국 그냥 질러 버렸습니다. 내일은 기저귀 차고 보겠습니다.

-임요셉: 고인물님 혹시 내일 경기는 어디서 관람하시는지요? 저희 덜렁교에서 VVIP석을 준비해 두었……

.

.

고인물이고 마동왕이고를 가리지 않고 수북하게 쌓여 있는 메시지들.

그리고 부재중 통화도 하나 있었다.

-유다희: 부재중 통화 2건

유다희의 메시지는 고인물 명의도 마동왕 명의도 아닌, 이어진 명의의 폰으로 와 있었다.

“어이구, 메시지 쌓인 거 봐라. 이거 확인하는 것들도 일이겠는데.”

팬들이 보낸 수많은 팬레터들까지 생각하면 답장하는 것만 해도 꼬박 며칠은 걸리겠다.

바로 그때.

똑똑똑-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현재 묵고 있는 방은 호텔에서도 가장 크고 좋은 방이었기에 어지간한 고급 빌라 수준의 넓이였고 그래서 하마터면 못 들을 뻔했다.

“벨을 누르지 왜 노크를 해?”

나는 구시렁거리며 가면을 썼고 침대에서 일어나 저 멀리 떨어진 현관문을 향해 걸어간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도어 체인 너머로 검은 모자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보인다.

비앙카 트럼프였다.

나는 정체를 감추기 위해 꽁꽁 싸맨 그녀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어제 그녀가 보낸 거만한 메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영광입니다. 만나 주셔서.”

“안 어울리게 농담도 할 줄 아네? 이거나 풀어.”

비앙카는 손가락으로 사슬을 톡톡 건드렸다.

…철컥!

내가 사슬을 풀고 문을 열자 비앙카가 불쑥 현관으로 들어온다.

저 뒤에 모노마흐와 알리타이슨이 정장을 입고 서 있는 것으로 보아 현실에서는 보디가드 같은 개념으로 활동하는 모양.

하지만 비앙카는 그 둘을 복도에 남겨두고 혼자서 안으로 들어왔다.

“명색이 이 몸을 이긴 남자인데 잡스러운 수컷들하고 같이 얘기하게 할 수는 없잖아?”

……인성 보소.

말하는 본새가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뭐, 애초에 서로 더 이상 얽힐 일 없는 관계이니만큼 굳이 참견해야 할 필요도 없다.

뭐, 물론 비앙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지만.

“둘만 있으니 좋네. 여긴 기자들도 없고. 오면서 보니까 호텔 로비에 카메라나 도청기 탐지장치들도 엄청 많던데. 따로 구비해 온 거야?”

“내가 사생활 보안에 좀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라.”

“호호호, 그 가면 속 얼굴 때문에?”

“달리 뭐 이유가 있겠나.”

“맘에 들어. 덕분에 나도 좀 편하게 됐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예쁘고 유명해야지. 기자들만 보면 이제 현기증이 나.”

비앙카는 털이 복슬복슬한 코트를 벗으며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올라간 치마 아래로 검은 레깅스에 조여진 다리를 꼰다.

“나 섹시하지 않아?”

“응 섹시하지 않아.”

“호호호. 그래 그런 태도도 참 신선해.”

비앙카는 계속해서 말을 빙빙 돌린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빨리 용건만 말하고 가.”

“어머? 왜 이렇게 차가워? 이거 신선하다 못해 너무 날것인데? 나한테 이렇게 대한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여긴 카메라도 없으니 너무 의식적으로 굴지 말라구~”

고전적인 대사를 읊으며 눈웃음치는 비앙카이다.

심지어 발끝으로 내 허벅지 안쪽으로 콕콕 찌르기까지!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그녀의 포지션은 이미 정해져 있다.

‘예쁜 여자’, ‘유명한 사람’, ‘부자’ ……이런 것들 다 의미 없다.

‘나보다 게임 못 하는 애’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시간낭비다.

“나는 이긴 팀의 선수고 너는 진 팀의 선수야. 너에게 남은 일은 이제 집에 가는 것뿐이지만 나에게는 아직 치러야 할 경기가 있단 말이야.”

대놓고 팩트로 두들겨 맞자 비앙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 너 이 무례한 쉑……!”

“네가 더 무례하잖아. 남의 휴일에 난데없이 쳐들어와서는 뭐 하는 거야.”

유혹은커녕 망신만 당한 비앙카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아주 난리도 아니다.

백인이 홍인과 청인 사이를 넘나드는 광경이 뭔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쾅!

결국 비앙카는 내 눈앞의 테이블에 서류 한 장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튜더보다 열 받게 하는 새끼는 처음일세.”

비앙카는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내 눈앞으로 서류를 디밀었다.

“우리 군수기업 ‘뉴클리어(New clear)’의 광고모델 계약서다!”

군수기업도 광고모델이 있나? 어차피 민간인에게 파는 것도 아닐 텐데.

내 의아함을 읽었는지 비앙카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뭐, 우리 할아버지가 누가 됐든 간에 이번 리그의 우승국 MVP 플레이어를 광고 모델로 기용하고 싶다고 하셔서.”

“…….”

“어때? 영광이지? 잘 하면 신형 핵탄두 대가리에 네 얼굴이 프린팅 될 수도 있다는 거야.”

내 이름을 따고 내 얼굴이 그려진 핵폭탄이라. 그거 참 겁나게 살벌한걸?

나는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게 좋았기에 당연히 거절했다.

비앙카는 어마어마한 광고료를 제안했지만 나는 그만큼이나 이미지가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했기에 다시 한번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야, 그럼 핵폭탄 말고 핵우산은 어때?”

“그게 그거잖아. 그리고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왜 네가 와서 하는 거야?”

“그야 원래는 내가 광고 모델이 될 예정이었으니까.”

나는 비앙카의 말에 기가 막혀 입을 반쯤 벌렸다.

하기야 뭐 2026년 기준으로 미국은 1만 개가 넘는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으니 그중 하나가 비앙카의 이름과 얼굴을 따서 만들어진다고 무슨 큰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그건 좀 아니다 싶다.

“핵폭탄급 매력. 블록버스터급 흥행력. 핫하고 치명적인 나랑 딱 어울리지. 안 그래?”

‘네가 생각이 없다는 건 잘 알겠다’ 라고 말할 뻔했으나 꾹 참았다.

나는 비앙카에게 궁금한 점 한 가지를 물었다.

“혹시 튜더에게도 이 제안을 했나?”

“응. 근데 거절당했어. 나를 벌레 보듯이 보던데? 재수 없는 새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사이가 왜 틀어졌는지 알겠고 튜더의 심경에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계약서에 적혀 있는 금액은 정말로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엄청난 액수인지라 나는 아주 조금은 고민했다.

지금까지 내가 번 액수들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돈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기에 나는 결국 계약서를 반려했다.

비앙카는 콧방귀를 끼며 계약서를 도로 품에 집어넣었다.

“이거랑은 별개로, 우리 팀으로 이적할 생각도 없단 말이지?”

“없어. 우리 구단주가 들으면 화낼걸?”

“흥! 그럼 네 구단주에게 연락해서 구단을 팔라고 할 거야. 어떻게든 널 갖고 말겠어.”

글쎄? 우리 구단주도 지금 싫다고 하는데?

하지만 굳이 내가 내 구단의 구단주이자 선수라는 것을 밝힐 필요는 없다.

‘……조만간 고인물 명의의 폰으로도 연락 오겠군.’

엄재영 감독이 깜짝 놀라 이것저것 캐묻는 것을 상상하자 어쩐지 가면 밑으로 웃음이 나왔다.

이윽고. 비앙카는 몹시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뭐 하나 원하는 대로 된 게 없으니 지금껏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해 왔던 그녀에게는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

“아무튼. 이번 대회에서 꼭 우승하도록 해. 나는 한국을 응원할 테니.”

어라? 이건 또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비앙카는 벌컥 화를 냈다.

“아, 나를 이긴 새끼가 튜더 그 새끼한테 지면 내가 뭐가 돼!”

꽤나 그녀다운 이유였다.

*       *       *

“드레이크랑 맥주나 한 잔 할까.”

나는 심심함에 드레이크를 보러 갔다.

옆방이라고 해도 방이 워낙에 크고 또 방과 방 사이가 워낙에 멀었기에 긴 복도를 꽤나 걸어가야 했다.

……한데?

드레이크의 방문 앞이 뭔가 소란스럽다.

“가라. 개인 방송 하느라 바쁘다.”

“아잉~ 그럼 화면에 안 잡히게 있을게요! 그리고 끝나면 놀아요!”

“싫다.”

드레이크는 방문을 닫으며 몇 명인가의 여자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정열적인(?) 복장과 사용하는 언어를 보니 브라질을 응원하러 온 남미 응원단인가 보다.

여자들이 시무룩한 얼굴로 사라지자 드레이크는 다시 방문을 빼꼼 열었다.

그리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어진. 왜 거기 그러고 있나.”

“응. 아니야. 지나가던 길이었어.”

“같이 맥주라도 한 잔 하겠나.”

“아니. 집에 갈래.”

나는 터덜터덜 걸어 되돌아왔다. 부러우면 지는 거랬다.

그때.

나는 건너편 방문에서도 소란이 이는 것을 목격했다.

“으아아! 싫어요! 나가 주세요!”

마태강 녀석이 쩔쩔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다수의 여자들이 있었다.

미국? 영국? 아무튼 북미나 유럽 쪽 응원단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마태강은 한동안 여자들에게 시달린 끝에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사부. 큰일입니다. 자꾸 방문을 노크하는 여자들이 생겨요.”

“…….”

“어떻게 하죠?”

그러게.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그런 마태강에게 조언을 해 줬다.

“몸에 싸인펜으로 막 문신 같은 거 그린 다음에 담배 뻑뻑 피고 화나면 벽 주먹으로 막 치고 술병 깨고. 그리고 막 감성적인 대사 같은 거 막 읊어. ‘크큭, 피에 취한다’ 뭐 대충 이런 거.”

“……너무 극단적인걸요. 구단 이미지 실추 아닙니까?”

“어차피 내 구단인데 뭐. 허락하마.”

“정말 그러면 해결될까요?”

“아 몰라! 나한테 묻지 마!”

나는 짜증을 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호옥시나 싶어 내 방문 앞에 남미에서 온 응원단 형들이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나마 좀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밖에 나가서 맥주나 간단하게 마셔야겠다. 페이사한테 연락해 볼까? 음, 아니다. 걔도 내일 시합이지 참.’

나는 가면을 벗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방을 나섰다.

바로 내일 이어질 시합을 시뮬레이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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