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730화 (730/1,000)
  • 730화 세계리그 개막! (1)

    3주 뒤.

    런던 북서쪽 약 80km, 우스강(江) 상류의 도시 버킹엄에서 최후의 리그, ‘WUO(World Ultimate Olympiad)’의 조 추첨이 열렸다.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국 한국.

    유럽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국 영국.

    오세아니아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국 호주.

    아프리카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국 에티오피아.

    남아메리카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국 브라질.

    북아메리카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국 미국.

    이상 6대주 리그의 대표팀들이 오늘 버킹엄의 호텔 ‘로열 블러드’의 최상층 파티룸으로 모여들었다.

    물론 나 역시 한국 대표팀의 리더로서 오늘 이 자리에 섰다.

    눈앞에 쫙 깔린 레드카펫의 좌우로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어 사진기 플래시를 터트리고 있었다.

    ‘이 카펫을 밟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랭커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그렇게 보니 눈앞의 레드카펫이 마치 피의 길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윽고, 시끄럽게 마이크를 들이미는 기자들의 행렬도 순식간에 뒤로 멀어졌다.

    바글거리던 곳은 오로지 호텔 앞의 현관뿐, 로비만 들어서도 거짓말처럼 주변은 정적에 잠긴다.

    촛불만이 타오르는 샹들리에, 살아있기라도 한 양 숨을 참고 있는 조각상들, 애초에 태어나길 그 모습대로 태어난 듯 엔틱한 가구들.

    마치 다른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온 듯한 차분함이 나와 우리 구단 식구들을 반기고 있었다.

    다들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호텔 안의 분위기를 나름대로 즐기고 있는 눈치다.

    650개나 되는 방을 가진 거대한 호텔이지만 최상층까지 가는 데에는 불과 3분도 걸리지 않았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최상층의 문이 열린다.

    내가 복도로 발을 내딛자마자 마주친 이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술잔을 부딪쳤던 에티오피아의 선수들.

    그들의 대장인 페이사 릴레사가 굳은 표정으로 측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무심코 아는 척을 하려다가 겨우 멈췄다.

    이래서 참, 습관이 무섭다.

    “……!”

    그때, 나와 페이사의 시선이 잠깐 마주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고인물이 아니라 마동왕, 한국 대표팀의 대장이다.

    여기서의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기에 나는 조용히 페이사의 옆으로 가 섰다.

    다행스럽게도 페이사 역시 금방 내게서 시선을 떼고 원래 쳐다보던 곳을 계속 쳐다본다.

    ‘……파티룸 안인가? 뭘 보는 거지?’

    나 역시 에티오피아 선수들의 시선을 따라 슬쩍 고개를 외로 꼬았다.

    그곳에는 흥미로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브라질 국가대표 다섯과 호주 국가대표 다섯이 앉아 있는 맞은편 원탁에서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음. 뭐지 이 분위기?”

    어수선함을 느낀 드레이크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보아하니 우리를 끝으로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 같다.

    파티룸 중앙, 커다란 원탁의 제일 상석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 두 사람 간의 신경전만 아니라면 꽤나 조용한 분위기였으리라.

    한국 팀과 에티오피아 팀이 가서 원탁에 마련된 지정석에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설전은 끝나지 않았다.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둘은 각각 영국과 미국의 대표였다.

    영국 팀의 에드워드 튜더 프랜시스.

    미국 팀의 비앙카 트럼프.

    ‘……역시 저 둘인가.’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가 회귀하기 전이나 후나 저 둘은 사이가 나쁜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다른 선수들 역시 그것을 아는지 누구는 그저 흥미롭게, 누구는 관심 없다는 듯, 누구는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고 있었다.

    하기야 그도 그럴 법하다.

    영국의 기린아 튜더.

    전 세계 공식 통합랭킹 1위.

    세계 최강으로 손꼽히는 길드 로열블러드의 지존.

    영국 황가의 일원이자 오늘 조 추첨이 열리고 있는 로열블러드 호텔의 오너.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하나.

    훤칠한 키에 조각 같은 얼굴. 고귀한 언행과 품격 있는 몸짓.

    그야말로 한 시대가 자신을 대표하기 위해 깎아 놓은 걸작과 같은 위인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맞서고 있는 미국의 히로인 비앙카는 어떤가?

    전 세계 공식 통합랭킹 2위.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서도 가장 부유한 재벌가 비앙카 가문의 3세, 무남독녀 외동딸.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

    마돈나, 브리트니 스피어스 이후로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10대 솔로가수이자 머라이어 캐리를 이어 팝의 여왕 타이틀을 노리고 있는 월드클래스의 톱스타.

    매력적인 몸매에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얼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동감에 홀려 버릴 듯한 눈빛.

    그녀 역시 능히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 존재이다.

    혼자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면 능히 모든 것을 다 거머쥘 수 있는 두 영웅이 한 시대에 태어났으니 대립과 불화합은 운명적인 것이리라.

    튜더와 비앙카는 서로를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둘은 랭커들의 랭커, 천상계 중의 천상계, 같은 최상위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연예인과 같은 존재.

    그렇기에 아까부터 이 회의장의 모든 이들이 원탁의 중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살벌한 신경전을 숨을 참은 채 관전하고 있는 것이리라.

    한편, 나 역시도 튜더와 비앙카를 살펴보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이 둘을 보는 것은.

    회귀 전의 삶에서는 감히 꿈도 꿔보지 못할 일이었다.

    ‘확실히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네. 뿜어내는 아우라부터가 이질적이야.’

    외모, 혈통, 배경, 게임 실력……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이렇게 압도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는 이를 본 것은 두 번째였다.

    참고로 첫 번째는 바로 앙신(殃神) 조디악.

    물론 뿜어내는 포스의 종류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눈앞의 튜더와 비앙카는 확실히 조디악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신화적인 영웅들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직 애송이라는 것?’

    회귀하기 전 내가 그들을 알았을 때의 위용에 비하면 지금 그들의 모습은 알에서 갓 부화한 메추라기나 다름없다.

    조디악이 맨날 나에게 당하고 사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튜더가 눈살을 찌푸리며 비앙카에게 말했다.

    “낳아 준 은혜도 모르는 패륜국의 졸부라서 그런가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군. 공공장소에서는 떠들지 말라는 것도 못 배웠나?”

    그는 주변의 시선이 달갑지 않다는 듯 고개를 외로 꼬며 홍차 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비앙카가 지지 않고 코웃음쳤다.

    “꼴에 홍차는 좋다고 마시네. 영국의 차는 바닷물에 타는 게 제 맛 아닐까? 보스턴의 물맛이 그리운가 봐.”

    그러자 튜더의 고고하던 안면에 핏줄이 섰다.

    비앙카 역시도 이를 뿌득 갈며 튜더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둘 사이의 나는 그 광경을 보며 그저 고개만 갸웃할 뿐이다.

    ‘저렇게 예쁘고 잘생기고 돈 많은 애들이 왜 서로 싸우지?’

    내가 둘 중 하나라면 당장 사귀자고 대시했을 텐데, 참 세상 일이란 건 복잡하고 가진 놈들의 심리란 건 이해하기 어렵다.

    ……바로 그때.

    “그만들 하지. 전원이 다 모였는데 그쪽들 때문에 행사가 지체되잖아.”

    튜더와 비앙카의 사이를 갈라 놓는 묵직한 중저음이 있었다.

    세계랭킹 3위 페이사 릴레사. 그가 나서서 둘을 떨어트려 놓은 것이다.

    블랙 퓨마라는 별명이 붙어있을 정도로 강렬한 페이사의 기세에 튜더와 비앙카 역시 움찔한다.

    귀공자와 연예인 사이에 맹수가 끼어든 듯한 광경.

    나는 그걸 보고 조금 감탄했다.

    ‘이야, 내 친구 잘한다.’

    끼어들기 조금 뭣한 분위기였는데 총대를 매 줄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들 튜더와 비앙카의 기세에 눌려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던 차여서 더욱 통쾌했다.

    ‘……근데 솔직히 좀 재밌었는데.’

    조금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할 수 없지.

    나는 얌전히 자리에 앉은 채 안내를 기다렸다.

    이윽고, GM들이 나와 대회의 구성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왕좌를 놓고 벌어지는 최후의 게임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구성된다.

    1. <무작위 조 추첨을 통한 1vs1 대전으로 3국 선발>

    2. <선출된 3국 중 배틀로얄 그라운드 제로 오버 형식으로 2국 선발>

    3. <양국 간의 결승전>

    그러니까 뽑기를 해서 6대주 리그의 우승국 6국끼리 각각 일대일 대전을 해 패자는 떨어트리고 승자는 위로 보낸다.

    그리고 살아남은 3국 중 배그옵으로 하위 1국을 떨어트리고 상위 2국 간에 결승전을 치르는 고전적인 방식.

    다만 이 경우 1차 무작위 조 추첨 대전에는 그전에 없던 약간의 시스템적 변화가 있었다.

    ‘……1차의 변수는 나중에 개인방송으로 설명해야겠다.’

    좋은 방송 콘텐츠 하나를 확보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그때.

    “한국 팀! 공을 뽑아 주세요!”

    GM 직원이 내 앞으로 상자를 내밀었다.

    안에 들어 있는 공에는 숫자가 적혀 있다.

    나는 공을 뽑기 전 잠시 망설였다.

    ‘내가 아는 미래대로 흘러갈까?’

    회귀하기 전, 내가 알던 대로라면 영국은 브라질과 붙고 에티오피아는 호주와 붙게 된다.

    원래 이 자리에 있어야 할 러시아는 미국과 붙고 말이다.

    ‘에라, 될 대로 되라 그래.’

    이쯤 되면 뭐 변수가 생겨도 이상할 게 없다.

    세상 모든 일이 정해진 운명대로 그대로 흘러가는 일 따위는 없으니까.

    ……그런데!?

    운명이란 게 정말 있기는 있나 보다.

    나는 회귀 전 러시아가 뽑았던 검은색 1번 공을 뽑고야 말았다.

    그러자 원탁 저편에 있던 미국 대장 비앙카가 흰색 공을 들어 보인다.

    검은색 1번 공의 상대를 알리는 흰색 1번 공.

    결국 조 추첨 결과는 내가 아는 그대로 흘러가게 되었다.

    영국 vs 브라질.

    에티오피아 vs 호주.

    그리고 한국 vs 미국이다.

    내가 묘한 기분으로 공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흥! 최후의 담판을 지어 보자고. 누가 최고인지 말야.”

    비앙카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날카롭게 말했다.

    나에게 말하는 건가 싶어 잠깐 당황한 순간.

    “바라던 바. 이번에야 말로 알게 해 주지. 누가 정점인지.”

    내 옆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영국 대장 튜더가 비앙카를 고고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다시 불꽃이 튀는 두 앙숙의 사이.

    ……이거 원, 나는 안중에도 없구만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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