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729화 (729/1,000)
  • 729화 술잔을 나누면 형제 (3)

    영국인들은 매주 토요일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음으로써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어떤 종류의 잘못이든지 간에) 속죄하려 한다. (중략) ‘되도록 말라빠지게 만들라’는 게 집단적인 국민 의식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요리 수칙이었다. 지은 죄가 뭔지는 몰라도 국민들한테 억지로 먹이는 샌드위치들로 충분히 속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더글러스 애덤스 (Douglas Adams),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中-

    *       *       *

    나와 페이사는 눈앞에 나온 요리를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모든 식단은 죄다 고기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소고기와 양고기, 박하 소스를 친 멧돼지 고기들이 계속해서 날라져 온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야채가 없는 게 아닌가 싶어 나는 손을 들고 슬쩍 물었다.

    “혹시 채소는 없나요?”

    그러자 요리사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소와 양이 채소를 먹는데 채소가 왜 필요한가요?”

    으음, 꽤나 설득력 있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요즘 식단 조절 중이기에 고기만 먹을 수는 없다.

    또한 에피오피아 선수들 역시 정교회 금식기간 중 섭취할 수 있는 채식 식단에 더욱 익숙한 모양이다.

    “그래도 채소가 조금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가요?”

    내 주문을 들은 요리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주방으로 돌아가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대량의 해시 브라운이었다.

    보기만 해도 기름진 식사였기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요즘 장시간 레이드 뛸 일이 많아서 그런가 이렇게 기름기 있는 것들만 먹으면 몸이 축난다.

    “채소는 이제 됐고요. 과일 같은 건 없나요?”

    “까다로우시군요.”

    요리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내 내 앞으로 과일을 내놓았다.

    그것은 시럽과 젤리 안에 박혀 있는 과일이었다.

    나는 설탕범벅이 되어 있는 과일을 내려다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혹시 조금 더 건강하고 덜 부담되는 식재료는 없을까요?”

    “흠. 그러시다면 생선을 추천드립니다.”

    “아아, 생선. 생선 좋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요리사는 비로소 뜻이 통했다는 듯 씨익 웃었다.

    그리고 이내 그가 내 앞으로 내민 것은 반투명한 젤리 덩어리였다.

    그 안에는 생선 대가리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박혀 있다.

    “장어 푸딩입니다.”

    “…….”

    “양파죽은 서비스입니다.”

    장어가 박혀 있는 푸딩과 으깬 양파를 끓였을 뿐인 죽이 나왔다.

    내가 말이 없자 옆에 있던 에티오피아 선수들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이봐, 그냥 평소에 먹는 걸 먹자고.”

    페이사는 평범한 피쉬앤칩스와 해기스를 주문했다.

    이윽고 바짝 튀긴 흰살 생선(아마도 대구와 매기로 추정)과 감자튀김, 그리고 소시지와 순대의 중간쯤에 있는 고기덩어리가 나왔다.

    이것들은 맛없기로 악평이 자자한 영국요리의 선입견을 날려버릴 정도로 맛있었다.

    “패쉬앤칩스 맛없다고 들었는데… 잘하는 집은 잘하네. 물론 이 가격이라면 차라리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이 낫겠지만.”

    “생선을 튀기고 소스를 뿌렸으니 어지간해선 맛없기 힘들지. 하지만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더 잘 만드는 것 같다.”

    “에티오피아에도 피쉬앤칩스가 있어?”

    “있지. 해산물이 귀해서 조금 비싸긴 해도.”

    맨 처음 팀의 제일 연장자인 밸라이가 나에게 오른손을 뻗어 음식을 먹여 주었다.

    이것은 ‘구르샤(Gursha)’라는 행동으로 나에 대한 예의와 환대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원래 스푼이나 포크 등의 식기를 사용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다지만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식기를 제대로 사용했다.

    오직 해외 여행 경험이 없는 마루 마모만이 어색하게 칼질을 하다가 포기하고 오른손을 썼다.

    나와 페이사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영국 요리들을 음미했다.

    사실 술이 좀 들어가니 뭐든 다 맛있다.

    (정어리 파이랑 장어 푸딩은 빼고.)

    배가 차자 기분이 조금 늘어진다.

    그때, 마루 마모가 스마트폰을 들어 내 채널의 구독,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모두 마친 자신의 유튜뷰 계정을 보여 줬다.

    일명 구독 3신기. 진정한 팬의 소양이다.

    물론 나 역시 에티오피아 선수들의 계정을 구독하고 있었다.

    내 계정을 본 마루 마모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너는 에티오피아 왜 좋아해요?”

    “어허 너라니. 오빠.”

    “오퐈.”

    “그래, 잘하네.”

    “……가 아니라 아조시.”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유튜뷰.”

    “하여간 유튜뷰가 애들 다 버려놓는다니까. 누구야 그런 거 알려 준 스트리머가.”

    “너 채널. 덜렁덜렁-”

    “…….”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입을 열었다.

    “나만 에티오피아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많은 한국인들이 에티오피아를 좋아해. 예전에 한국전쟁 당시 원조를 받은 게 있으니까.”

    그러자 내 말을 들은 페이사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들 역시 한국을 좋아한다. 가끔 중국인으로 오해해 차별할 때도 있지만. 처음에 너를 만났을 때도 중국인인 줄 알고 경계했던 것이다.”

    “중국인은 왜 경계해?”

    “에티오피아에 중국인들이 많이 이주해 왔거든. 그 이주지역 쪽이 범죄율이 높아서 국민들의 인식이 별로 좋지는 않다.”

    나는 그냥 해기스만 우물거렸다.

    나에게 팬레터를 보내 주며 순수한 웃음으로 악수를 나누던 중국 팬들이 생각나 섣불리 고개를 끄덕이기도 뭣하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선수들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나는 그저 조용히 경청할 뿐이었다.

    ‘하기야 뭐, 어디나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지.’

    정성스럽게 선물을 해 오는 팬이 있는가 하면 자기네 나라에서 나가라고 침을 뱉거나 주먹을 날리는 안티 팬도 있는 법이다.

    이윽고, 술이 조금 더 들어가자 화제는 더욱 진지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팀의 제일 연장자인 밸라이 선수는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게임 산업에 집중해서 국가 발전을 꾀하려고 하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여공들과 아동들이 희생되고 있어.”

    하루 12시간, 주 75시간이 넘는 노동.

    캡슐 파츠를 조립하고 그것을 해외로 운반하는 작업 속에 쓰러지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란다.

    주 납품 국가는 프랑스나 영국 등으로 가상현실 속에서도 식민지 지배가 이어지고 있다는 세계 여론이 빗발치고 있지만 변화는 더딘 편이었다.

    그때.

    그동안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페이사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보면 에티오피아에서는 게임 산업이 활성화되면 안 돼. 독재자의 군자금만 불려 줄 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의 착취 주고만 공고히 하는 꼴이니.”

    프로게이머, 더군다나 나라를 대표해서 이 자리에 있는 존재가 하기에는 부적절한 말이다.

    그것을 아는지 페이사는 더더욱 갈등하는 기색.

    “……하지만 우리는 게이머야. 게이머로서 더욱 높은 경지를 밟아 보고 싶다는 꿈이 있어.”

    그래서일까? 에티오피아 선수들은 양가적 감정 사이에서 무겁게 갈등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선수들은 충분히 세계리그에서 우승할 수 있는 재능과 기량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곧 독재자의 명예와 주머니를 살찌우게 할 것이고 이는 에티오피아 전 국민들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경우 개인의 소망과 꿈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곧 거대한 폭력과 부조리에 이바지하는 것이 된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 잡생각 없이, 오로지 한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지금 여기에는 재능이 넘치고 실력도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다른 수많은 동포들을 걱정해 꿈에 그리던 무대에 오르길 주저하는 이들이 있다.

    ‘……뭐, 만약 몇몇 협회 쓰레기들을 축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 역시도 비슷한 처지였겠지.’

    나는 한국의 뎀 협회에 손을 뻗고 있었던, 그리고 유다희와 유창, 유세희를 옭아매고 있던 레드문의 전 회장 차규엽을 떠올렸다.

    그놈과 치렀던 오랜 공방전의 세월 역시도.

    물론 정부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에티오피아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들의 심경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는 있었다.

    나는 그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가만히 있던 페이사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기운 내.”

    “…….”

    하지만 페이사는 술잔을 잡지 않고 그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원래 술을 안 마시는가 싶어서 나 혼자 잔을 들었을 때, 그가 말했다.

    “우리 집안에는 술잔을 나누면 형제라는 가훈이 있지.”

    생각보다 가훈이 있는 집이 많다. 드레이크네도 그렇고.

    내가 고개를 돌리자, 내게 시선을 맞춘 페이사가 술잔을 들어올렸다.

    “네 눈은 호수처럼 맑다 어진.”

    어? 이거 어째 멘트가 좀? 이 친구 약간 드레이크 느낌인데?

    내가 움찔하는 것도 모른 채, 페이사는 특유의 엄격 근엄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의 눈망울 속에는 이 게임을 향한 사랑과 순수함, 열정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것과, 또한 우리들의 것과 매우 닮았고.”

    그건 나 역시 페이사를 보며 그렇게 느끼고 있단 차였다.

    페이사는 이내 씩 웃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지. 너는 내 형제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쨍-

    나의 술잔과 그의 술잔이 부딪쳤다.

    이역만리, 머나먼 타지에서 형제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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