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717화 (717/1,000)
  • 717화 안녕(Hi), 쥬딜로페 (1)

    나는 저 하늘을 높이 날고 있어.

    그때 네가 내게 줬던 두 날개로.

    이제 여기는 너무 높아.

    이제 조금은 나 알겠어.

    너의 관심사 걸음걸이 말투와 사소한 작은 습관들까지.

    다 말하지, 너무 작던 내가 영웅이 된 거라고.

    난 말하지, 운명 따윈 처음부터 내 게 아니었다고.

    세계의 평화.

    거대한 질서.

    그저 널 지킬 거야 난.

    네가 준 이카루스의 날개로.

    태양이 아닌 너에게로.

    Let me fly.

    -방탄소년단, 『작은 것들을 위한 시』 中-

    *       *       *

    아키사다 아야카.

    그녀는 지금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아키사다의 시선은 지금 탑의 최상층부에서 등장한 검은 후드의 맨얼굴에 꽂혀 있었다.

    유다희.

    그녀는 지금 고인물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서로 맹렬한 속도로 가까워지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 극적인 포옹을 하겠지.

    아키사다는 순간 자기 자신조차 근원을 알 수 없는 부러움을 느꼈다.

    ‘나는 이렇게나 멀리 온 당신에게 이 우승컵을 바친다. 나의 모든 사랑을 담아.’

    너무 감명을 받아서 좌우명처럼 외우고 있었던 고인물의 대사.

    지금 유다희를 바라보고 있는 고인물의 애틋한 표정을 보면 그때의 이 말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는 명확하다.

    아키사다는 고인물에 대한 선망, 유다희에 대한 부러움으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고인물, 저 사람이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할 정도로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누굴까 했는데…….’

    난생 처음으로 질투라는 감정이 몽글몽글 솟아난다.

    그때.

    ‘아니, 잠깐. 저 여자……마교의 한국 지부장이네? 그리고 걸그룹 힘민체(SDC) 때도 같이 작업했던 그……?’

    하지만 아키사다는 생각을 계속할 수 없었다.

    고인물과 유다희.

    당장이라도 끌어안을 듯 빠르게 가까워진 둘 사이.

    ……그러나.

    그 사이에 극적인 상봉과 감동적인 포옹,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키스나 뭐 그런 것 따위는 없었다.

    “꼭 그랬어야 했냐, 이 개자식아!”

    퍽! 소리와 함께, 고인물의 싸대기가 돌아간다.

    유다희가 대뜸 주먹부터 날린 것이다.

    *       *       *

    <이어진>

    LV: 96

    HP: 1/960

    호칭: 샌드웜 땅꾼(특전: 가뭄) / 대망자 묘지기(특전: 언데드) / 아귀메기 태공(특전: 잠복) / 크툴루 크라켄 킬러(특전: 고생물) / 와두두 여왕 쥬딜로페의 펫(특전: 갹출) / 여덟 다리 대왕 참수자(특전: 불완전변태) / 리자드맨 학살자(특전: 징수) / 식인황제 시해자(특전: 1차 대격변) / 뒤틀린 황천의 생존자(특전: 절약) / 불사(不死)의 좌군단장(특전: 여벌의 심장) / 불사조의 대리인(특전: 선택) / 검은 용군주 오즈의 위상(특전: 혈족전생) / 시작의 마을 유토러스의 명예 백작(특전: 귀족) / 탐욕의 악마성좌 마몬의 위상(특전: 수전노) / 발록의 뿔을 꺾은 자(특전: 야수) / 그 무서운 데모고르곤(특전: 싸움광) / 살인자들의 탑 5층의 주인(특전: 맵 디자인) / 폭식의 악마성좌 벨제붑의 위상(특전: 폭식 창자) / 데스나이트 ‘킹 아서(King Arthur)’의 후예(특전: 백전노장) / 저주받은 고목 쟈쿰 벌목자(특전: 고대 신앙) / 심해 스토커(특전: 마찰계수) / 푸른 용군주 버뮤다의 위상(특전: 잠수) / 레흐락과 게슈탈트의 친구(기다림) / 아틀란둠의 왕자(특전: 대심해) / 질투의 악마성좌 레비아탄의 위상(특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 싸움 나락의 생존자(특전: 스탯의 정수) / 흰 용군주 카프카타렉트의 위상(특전: SM플레이어) / 두 전쟁대군주의 계약자(특전: 2차 대격변)

    나는 앙버팀 특성으로 인해 HP 1 상태로 살아남았다.

    레벨이 1 올라 96이 되었고 새로운 호칭인 ‘두 전쟁대군주의 계약자(특전: 2차 대격변)’까지 생겨났지만…… 그래도 HP의 총량이 엄청 낮은 것은 마찬가지니 이런 자잘한 공격에도 빈사상태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유다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 한 번 공격을 감행해 왔다.

    커다란 창이 내 정수리 위로 날아든다.

    “니가 사람새끼냐, 임뫄!”

    예전에 유창이 예상했던 대사 고대로다.

    “으아악! 그, 그만! 진짜 죽어!”

    “그래! 걍 니가 죽지 그랬냐? 주인을 대신 죽게 만드는 펫이 어딨어!?”

    “나, 나도 마지막에는 그러려고…….”

    내가 우물쭈물거리자 유다희는 창을 휘두르려다 말고 한숨을 푹 내쉰다.

    “어휴, 여전히 븅신같네. 오빠 맞어?”

    “…….”

    내가 말이 없자 유다희는 콧김을 흥 내뿜었다.

    “비켜. 인터뷰 내용 대충 들어서 무슨 생각 하는지는 알겠으니까.”

    “…….”

    “위 우슝쿼블 봐췬돠~ 눼 뭐듄 솨뢍을 댬와~ 어우, 열애설 난 거 생각하면 그냥 콱 마!”

    유다희는 다시 한번 나에게 주먹을 들어 보인 뒤 다시 내렸다.

    그리고는 다시 검은 후드를 펄럭 뒤집어썼다.

    그 순간.

    ‘……기다려 줘서 고마워.’

    내 머릿속에 환청 같은 것이 들렸다.

    어라? 이건 분명 유다희의 목소리인데?

    순간, 나는 유다희의 바지 주머니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아이템 하나를 발견했다.

    -<타짜의 포커 카드> / 양손무기 / A+

    전설의 도박마 ‘아귀’가 애용했다고 하던 카드.

    대체로 사용자의 말로는 좋지 않은 편이다.

    -특성 ‘너랑나랑은’ 사용 가능 (특수)

    어느새인가 나와 그녀의 너랑나랑은 특성에 ‘ON’ 표시가 떠 있었다.

    “으앗!? 이게 왜 지 맘대로 켜져!? 오, 오프! 오프!”

    유다희는 황급히 카드의 스위치를 끄고는 인벤토리에 던져 넣는다.

    “어휴, 이거 자꾸 주머니에 넣으면 눌려서 지 맘대로 켜지고, 확 마 고물상에 팔아 버리든가 해야지.”

    그녀는 한참을 꿍얼거리던 끝에 몇 번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이내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오다 주웠어. 이거 써.”

    나는 그것을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육각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향기로운 액체.

    -<‘하해대왕 레비아탄’의 용연향(龍涎香)> / 재료 / S+

    한 마도로스의 평생 어치 집념이 담긴 기름.

    만약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선택을 번복할까?

    -특성 ‘긴 주마등(走馬燈)’ 사용 가능

    그것은 하해대왕 레비아탄이 드랍한 아이템이었다.

    유다희는 레비아탄을 잡고 이 아이템을 레이드 보상으로 받은 걸까?

    나는 그것을 본 순간 까마득한 해저에서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스마엘. 죽은 에이햅을 대신해 하해대왕의 아가미를 물어뜯던 그.

    이 광기 어린 마도로스는 마치 관뚜껑에 못을 박듯, 후회와 슬픔, 광기로 점철된 얼굴로 레비아탄에게 작살을 꽂아 넣었었다.

    부글거리며 쏟아져 나오던 향기로운 기름.

    ‘…퀴퀘그! 오오! 퀴퀘그!’

    대체 이 흰 기름의 무엇이 그를, 아니 수많은 마도로스들을 매혹시키는 것일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이 향기로운 기름을 탐닉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레비아탄의 거체를 해저에 침몰시키고 난 뒤인 지금도 알 수 없다.

    에이햅, 이스마엘, 퀴퀘그 등등, 설명해줄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죽었으니까.

    ……그러나!

    바로 여기, 이 기름의 효능을 설명해 줄 사람이 하나 남아 있다.

    하해의 생존자 유다희다.

    “이 아이템은 특정 대상을 상대로 시간을 되돌리지.”

    질투의 악마성좌 레비아탄, 놈은 체내의 물을 역류시켜 강하게 뿜어내는 공격 패턴을 가진다.

    마치 질투심에 눈이 멀면 피가 거꾸로 치솟고 속에 든 것이 역류하는 것처럼.

    그 때문일까?

    유다희가 가져온 향기로운 기름은 대상의 상태를 역류시킨다.

    질투에 사로잡혀 위에 있는 것을 끌어내릴 때 특히나 아주 유용하다.

    역류시킬 대상이 시간이든 공간이든 상관은 없다.

    상대가 막 레벨업한 상태라면 이 기름을 끼얹어 레벨업 전으로 되돌려 버릴 수도 있었다.

    방금 전 성공한 최고 난이도 보스몬스터 레이드를 한 번에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유다희는 이 기름병을 그런 곳에 쓰지 않았다.

    …찰랑! 뽕!

    코르크 마개가 뽑히며 기름이 기묘한 향기를 내뿜는다.

    유다희는 손을 뻗어 허공에 나부끼는 황금색 홀씨들 중 하나를 잡았다.

    그리고 이내, 그 기름을 홀씨에 붓는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그러자.

    츠츠츠츠츠츠!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대지 위, 죽어 널브러진 벌과 개미들 위로 황금색 홀씨들이 떠올랐다.

    탑의 최상층부를 향해 금빛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솔솔솔솔-

    그것을 본 윤솔과 드레이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금빛 포자들이 되돌아 와!”

    “오오, 이쪽으로 온다! 다시 모여들고 있다!”

    그리고 그 황금빛 바람은 다시금 유다희의 손바닥으로 집결해 하나의 형상을 이룬다.

    내가 익히 잘 아는, 그런 작고 앙증맞은 형상을.

    “…….”

    나는 떨리는 손으로 유다희의 손을 잡았다.

    유다희는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손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이윽고.

    유다희의 손바닥 위에 얹어진 내 손의 사이로 무언가 작고 따듯한 것이 잡혔다.

    살포시 마주 잡힌 두 손바닥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미는 귀여운 얼굴.

    포자를 다 모으지 못했는지 전보다는 작은 체형이었지만 분명히 원래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다시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호앵?]

    쥬딜로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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