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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713화 (713/1,000)
  • 713화 작은 것들을 위한 시 (4)

    나는 눈앞에 선 윤솔을 보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과거 천공섬 레이드를 뛰러가기 전, 나와 드레이크는 어비스 터미널의 가장 밑바닥에 잠들어 있던 NPC ‘천사소녀 네티’를 만났었다.

    당시 네티를 잠에서 깨워 천공섬의 길잡이로 고용하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몸을 제공할 숙주가 한 명 필요했었는데 그 제한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세상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자.

    즉 경험치 하나 쌓지 않은, 완전한 1레벨 뉴비.

    이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심지어 튜토리얼의 탑조차 클리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한 번도 플레이해 본 적 없는 윤솔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절대 튜토리얼의 탑에서 나오는 벌이나 개미를 해쳐서는 안 돼. 도망다니면서 시간을 끌다 보면 알아서 위층으로 가는 문이 열리니까.’

    그때의 내 말대로 윤솔은 튜토리얼 미션을 전부 거절하며 도망쳤다.

    ‘아휴, 웬 징그럽게 생긴 벌이 이렇게 많아. 싸우는 것 싫어요. 안 해요. 안 싸운다구요! 거절, 거절, 거절, NO, NO, NO.’

    그리하여 윤솔은 벌과 개미를 비롯한 그 어떤 것도 해치지 않은 채 나와 함께 어비스 터미널로 향했다.

    그리고 결국 천공섬까지 올라가 식인황제를 쓰러트리고 어마어마한 폭렙을 기록해 현재에 이른 것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고레벨 몬스터들과의 레이드, 또 레이드……

    자연스럽게 레벨이 까마득하게 높아졌고 벌과 개미를 상대할 시간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음음, 나는 벌이랑 개미한테 피해 준 적 없어요.”

    윤솔의 말에 소돔과 고모라는 말문이 막힌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다.

    파죽지세로 치솟아 오르던 벌레 기둥이 윤솔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 덕에 나는 많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좋다. ‘의로운 자’여. 너는 용서하마.]

    소돔과 고모라는 윤솔의 건너편에 있는 나와 피난민들을 향해 눈을 빛냈다.

    [하지만 뒤에 있는 저 녀석들은 용서할 수 없도다!]

    말도 안 되는 전개에 윤솔이 입을 쩍 벌렸다.

    “아, 아니! 벌이랑 개미한테 피해 준 적 없다니까요!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

    [제대로 들었다. 의로운 자여. 어느 시대든 너와 같은 사람들은 있어 왔지.]

    “그럼 멈추셔야죠!”

    소돔과 고모라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솔이 황당한 표정을 짓자 소돔과 고모라는 으르렁거리며 그녀 너머의 나를 노려보았다.

    [미네르바의 올빼미, 네놈 역시 우리와 한 약속을 어기지 않았느냐? 이것으로 약속을 어긴 빚은 서로 없던 것으로 하지.]

    아오, 진짜! 그거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레비아탄과 흰 용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다.

    하여간 불사조의 죽음이 불러온 나비효과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이내 벌과 개미들은 윤솔을 크게 우회하여 이동하기 시작했다.

    .

    .

    윤솔은 방어막을 펼쳐 막아 보려 했지만 벌레들은 어둠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천사의 힘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보아라. 너희는 내 자식들의 성실함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더욱 더 강한 피어를 내뿜었다.

    <멸종위기지수>

    (Endangered index)

    인    간     99.99% (1급) (위험)

    리자드맨    99.99% (1급) (위험)

    오    크     99.99% (1급) (위험)

    멸종 수치가 극단으로 치달음에 따라 벌레들의 움직임도 더욱 일사분란해졌다.

    대멸종의 끝에 서 있는 소수의 생존자들만 볼 수 있는 광경.

    미묘하게 진군 속도가 빨라지고 개체 간의 협응성이 몰라보게 발전했다.

    게다가,

    [끼긱! 영!]

    [끼긱! 차!]

    [970층에서 탑승!]

    [끼긱! 영!]

    [끼긱! 차!]

    [1020층에서 탑승!]

    [끼긱! 떡!]

    [끼긱! 상!]

    환청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운 말소리까지 들려온다.

    가청주파수를 넘은 아주 낮은 소리의 저주파지만 엄청나게 좋은 음향장비를 쓰는 나에게는 벌레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처럼 들렸다.

    [끼긱끼긱끼긱!]

    벌레들의 움직임은 단순한 ‘집단’의 움직임을 초월해 그 상위에 있는 아득한 것에 닿아 있었다.

    벌레 기둥은 개개인들의 집합이라기보다는 아예 하나의 유기체가 된 것처럼 정교한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영차고 나발이고 니넨 다 큰일 난 것 같습니다만.”

    윤솔을 피하기 위해 한 바퀴 크게 빙 에둘러 온 시점에서 꽤 많은 시간이 경과했다.

    페이즈 변화와 상관없이 말이다.

    “올 거면 진즉에 그냥 직진했어야지. 에잉~ 쯧쯧.”

    벌과 개미는 우직하다면 우직하지만, 한 글자만 달리 하면 우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생물이다.

    그리고 그 점은 나에게 절호의 찬스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홀로그램을 찢고 나와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말했다.

    “이제 잔치는 끝났다!”

    모든 준비가 마쳐졌다.

    내 얼굴 모양의 커다란 홀로그램이 서서히 사라지며 비장의 무기가 드러나고 있었다.

    탑의 최상층부, 정수리 부근에 뜨거운 열기를 가져다주고 있는 거대한 아이템.

    대포(大砲).

    탑 아래를 향해 거꾸로 치솟아 있는 거대한 포신, 그것은 정확히 수직으로 매달려 아래의 벌레 기둥을 겨누고 있었다.

    어둠을 머금은 포구는 맹수를 품은 동굴처럼 으르렁거린다.

    -<거대한 축포> / 공성무기 / S

    세계 제일의 부자인 스크루지 후작은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불꽃축제를 개최하고 싶어 했다.

    그는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 왔던 항아리 게임 대회가 끝난 뒤 시상식 일정에 맞추어 거대한 축포를 디자인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불꽃을 쏘아 올릴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 대포이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스크루지 후작이 이 대포에 특수한 장치를 해 두었기에 살상용으로는 쓸 수 없다.

    -물리 공격력 +1

    -특성 ‘피날레(Finale)’ 사용 가능 (특수)

    드레이크가 폭식 창자 특성으로 훔쳐 온 항아리 게임 시상식의 불꽃놀이용 축포였다.

    *       *       *

    -<시간여행자의 예언서> / 재료 / ?

    부정한 가치들이 범람함에,

    시계 바늘이 거꾸로 돌고,

    용과 악마가 몸을 섞을 것이며,

    재앙의 별이 하늘에 긴 궤적을 그릴 때,

    태양이 떨어지고 마침내 긴 황혼이 저물어 오리라.

    -(아이템이 현재 봉인되어 있습니다)

    나는 불사조가 죽으면서 떨어트린 아이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사조는 죽었고 나는 그 자리를 대신해 이곳에 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이 세계를 멸종의 도가니로 만들기 위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불사조를 대신해 먼 과거, 그가 했던 대로 이들을 막고자 한다.

    “모두들 대포를 잡아요!”

    대포가 발사되는 충격을 최소화하려면 가능한 많은 사람이 대포를 고정시켜야 한다.

    그래야 에임이 빗나가지 않으니 말이다.

    사격을 할 때도 숨을 참아야 하는 것처럼 대포 역시도 최대한 반동이 적어야 했다.

    수많은 피난민들은 내 말에 따라 우르르 올라와 대포를 고정시켰다.

    “불!”

    내 다음 지령이 내려자자 수많은 마법사들이 화염 마법을 캐스팅해 대포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치이이이익!

    이내 작렬하는 화염과 함께 대포의 포신이 떨리기 시작한다.

    어마어마한 온도로 가열됨에 따라 점점 시뻘겋게 변해 가는 모습이 꽤나 압도적이다.

    그때.

    아키사다 아야카가 외쳤다.

    “포탄! 대포 안에 포탄이 없어요!”

    전 세계를 구할 대포. 하지만 정작 그 안은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피난민들은 제각기 가진 아이템들을 꺼내들었다.

    “여기! 제가 만들어 뒀던 대형 폭탄이 있습니다! 이걸 쓰세요!”

    “제 철 속성 마법이라면 특대형 철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빨리 뭐라도 쑤셔 넣고 쏘죠!”

    하지만 안 된다. 이 대포에는 크고 단단한 포탄을 사용할 수 없게끔 제어장치가 있다.

    오로지 불꽃놀이용 폭죽처럼 곱고 부드러운 가루만을 장전할 수 있게 약실 내부에 필터가 달려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피난민들은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폭탄이나 쇠구슬, 하다못해 마법이라도 장전해야 하는데 그 모든 게 다 안 되는 상황.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쏠 것인가?

    나는 결전의 순간, 시뻘겋게 달구어진 대포를 앞에 두고 잠시 망설였다.

    “…….”

    물론 포탄이라면 있다. 당연히 준비해 뒀다. 아주,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말이다.

    한 번 발사 후 온몸을 불사르며 날아가 모든 벌레들을 일격에 무력화시킬, 최초이자 최후일 한 발.

    그것은 1차 대격변 이전부터 안배해 뒀던 나의 비장의 무기였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한번 망설였다.

    전 세계를 멸종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벌과 개미의 대홍수, 그리고 두 전쟁대군주.

    이 벌레들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알기로는 단 하나뿐.

    벌레 타입 몬스터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생물.

    원래라면 1차 대격변과 함께 진즉에 사라졌어야 할 존재.

    그리고 지금…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救援者).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내 어깨 위,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호앵?]

    와두두 여왕 쥬딜로페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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