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708화 (708/1,000)
  • 708화 2차 대격변 (5)

    -<빨간 포션> / 소모품 / D

    붉은 약초로 만든 회복제.

    이 세상 모든 물약들의 근간이 되는 기본적인 물약이다.

    -HP +100

    D급 몬스터인 벌과 개미들이 주로 떨구는 아이템.

    최하급 회복제로 완전 기본 아이템 취급을 받는 포션이다.

    HP가 너무 낮은 쪼렙 시절에나 조금 쓰지만 그나마 이제는 더 좋은 물약들이 많이 풀리는 바람에 쪼렙 유저들의 손길도 끊긴, 그야말로 추억의 아이템이었다.

    종종 사냥터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 빨간 포션들이 길바닥에 대량으로 버려져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자매품인 파란 포션 역시도 그렇다.

    -<파란 포션> / 소모품 / D

    파란 약초로 만든 회복제.

    이 세상 모든 물약들의 근간이 되는 기본적인 물약이다.

    -MP +100

    각각 체력과 마나를 회복시켜 주는 이 물약들은 사실상 쓰레기나 다름없던 것.

    시간이 흘러 강해진 유저들에게는 회복 효과도 극히 미미한 주제에 괜히 인벤토리나 차지하는 애물단지였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벌과 개미들의 침공으로 인해 모든 NPC들과 상점들이 사라진 지금, 미미하게라도 원기를 회복할 수 있게 해 주는 이런 류의 소모품들은 그야말로 생명수와도 같았다.

    아키사다는 떨리는 목소리로 검은 후드에게 물었다.

    “이,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검은 후드는 무심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사다는 불면 꺼질라 쥐면 깨질라 조심조심 유리병을 넘겨받았다.

    눈앞에는 영롱한 빛을 내는 빨간 물약이 찰랑거리고 있다.

    아키사다는 두 눈 딱 감고 그것을 마셨다.

    달작지근하면서도 톡 쏘는 맛이 목구멍을 시원하게 씻어낸다.

    목구멍 벽에 붙어 있던 먼지들도, 가시들도 전부 싹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다.

    동시에 바닥을 치고 있었던 HP 역시도 살짝 차올랐다.

    가뜩이나 체력이 약한 마법사에게는 정말로 귀중한 한 몫이었다.

    아키사다는 유리병의 바닥까지 고인 붉은 액체를 탈탈 털어서 마셨다.

    그리고는 텅 빈 포션병을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초보 시절의 기억이 절로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래 맞아. 나도 한때는 이런 포션 한 병 한 병이 소중했었을 때가 있었지.’

    벌과 개미를 열심히 목검으로 때려잡던 시절, 어떤 직업으로 전직하게 될지 몰라 눈에 보이는 모든 아이템을 다 주워먹던 그때 그 시절.

    사냥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몬스터가 드랍하는 것은 아무리 사소한 아이템이라도 다 주워 모았었다.

    재료 아이템은 퀘스트 재료로, 혹은 상점에 팔았고 사냥을 하며 필요한 물약은 빨간 포션과 파란 포션이 전부였다.

    그것들 하나에 울고 웃었던 뉴비 시절의 추억이 아련하게 몽글거리고 있었다.

    그때.

    아키사다에게 포션을 건넸던 검은 후드가 입을 열었다.

    “……아까 전에 뭐랬어?”

    “네?”

    “방금 전에 중얼거린 것 말야.”

    검은 후드가 재차 묻자 아키사다는 그제야 말귀를 알아들었다.

    “아. 방금 제가 혼자 중얼거리던 거요?”

    방금 뭐라고 했더라?

    아키사다는 고개를 갸웃했다.

    검은 후드는 참을성 있게 침묵을 지켰다.

    이내, 아키사다는 자기가 방금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던 말을 기억해 냈다.

    “이,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라고 했어요.”

    “……아니. 그 전에.”

    “콜록! 콜록?”

    아키사다는 정말 CTRL+Z라도 누른 것처럼 바로 직전의 대화를 복원하고 있었다.

    검은 후드가 이마를 짚자, 아키사다는 드디어 그가 원하는 대답을 했다.

    “……I dedicated this trophy to you, the one who came this far. I give it to you with all my love. 나는 이렇게나 멀리 온 당신에게 이 우승컵을 바친다. 나의 모든 사랑을 담아.”

    “앞의 영어는 뭐야?”

    “같은 말이에요. 뒤에 한국어가 번역.”

    아키사다가 친절하게 대답하자 검은 후드는 가만히 선 채 미동이 없다.

    “……나는 이렇게나 멀리 온 당신에게 이 우승컵을 바친다. 나의 모든 사랑을 담아.”

    그저 아키사다의 말을 조용히 따라했을 뿐이다.

    이내, 검은 후드는 아키사다에게 물었다.

    “흐음, 이 대사는…….”

    “마음에 드시나요?”

    “……마음에 안 들어서 물어보는 거야.”

    검은 후드가 시니컬하게 대답하자 아키사다는 약간 풀죽어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거 항아리 게임 우승자가 인터뷰에서 말한 거예요.”

    “그래, 그건 나도 알아. 대회 봤으니까.”

    검은 후드는 재차 물었다.

    “내가 알기로 너는 거기서 준우승을 했을 텐데?”

    “네. 그랬죠.”

    아키사다는 뿌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검은 후드는 아키사다의 준우승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바로 다음 질문을 한다.

    “너는 그 사람이 밉지 않아?”

    “네? 왜 미워요?”

    “널 밟고 위로 올라갔잖아.”

    검은 후드의 말을 들은 아키사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동안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생각이라는 듯.

    이내,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괘씸하긴 하네요.”

    “……역시 그렇지?”

    “네. 하지만 괜찮아요.”

    아키사다는 밝게 웃었다.

    “저라는 계단을 밟았기 때문에 그가 그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거니까요.”

    “…….”

    “만약 절 밟고 올라갔는데도 성과가 시원찮았으면 정말 괘씸했겠죠. 하지만 그는 정상에 올랐잖아요?”

    검은 후드는 말이 없다.

    아키사다 역시 딱히 그가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다짐하듯 말했다.

    “그가 지금 높은 곳에서 빛날 수 있는 것은 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른 바 명예로운 죽음을 당했달까? 뭐, 정신승리일지도 모르지만…….”

    “…….”

    “아무튼 그 항아리 게임 대회에 출전해서 확실하게 배운 건 하나 있어요.”

    말을 마친 아키사다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끝없이 빙글빙글 위로 뻗어 있는 나선계단의 탑을 바라보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실패했을 당시의 구간보다 더욱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거요.”

    그녀는 실패와 도전을 거의 같은 것으로 보고 있었고 두려움과 포기 역시도 거의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모양이다.

    실패 다음에 이어지는 도전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로지 포기하는 자신뿐.

    “…….”

    검은 후드는 말없이 서 있다.

    붉은 포션 한 병으로 겨우 회복한 미약한 체력, 그것으로 또다시 끝없는 행군에 재도전하는 아키사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       *       *

    약간의 시간이 더 흘렀다.

    “주마등이 보여.”

    “……빨간 포션 한 병, 딱 한 병만 있었으면.”

    “목말라… 다리가 부서질 것 같아…….”

    피난민들의 체력은 이제 정말로 한계에 도달했다.

    …풀썩! 픽-

    물도 식량도, 포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유저들은 하나둘씩 쓰러져 간다.

    “…….”

    아키사다 역시 힘겨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빨간색으로 변한 HP 바, 이제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단은 끝나지 않는 순례길처럼 길게, 빙글빙글, 위로 쭉 뻗어 있다.

    이대로는 도저히 천장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풀 컨디션으로 도전해도 등반이 가능할까 의구스러운데 하물며 지금의 녹초가 된 몸으로는 도저히.

    그때.

    “……?”

    흐려져 가던 아키사다의 시야로 이상한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끝없는 계단들의 위로 보이는 수많은 환영들.

    “죽을 때가 되니까 헛것이 다 보이네.”

    아키사다는 건조한 미소를 피식 입가에 걸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아까 먹은 빨간 포션이 하나, 둘…… 파란 포션이 셋, 넷…… 다시 빨간 포션이 다섯, 여섯…… 또 파란 포션이 일곱, 여덟…… 사막에서 봤던 오아시스 신기루인가. 포션들이 엄청 많이 보이네. 왜일까?”

    그러자, 뒤에 오던 검은 후드가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툭 던지듯 말했다.

    “왜긴 왜야. 진짜 눈앞에 있으니까 그런 거지.”

    그 말에 아키사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다.

    그것은 신기루나 환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진짜로 존재하는 수많은 빨간 포션, 파란 포션들이 계단에 쭉 늘어놓아져 있었던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포션들의 양에 피난민들은 뜨겁게 환호한다.

    “세, 세상에! 진짜야!”

    “헉! 저게 진짜 포션들이라고?”

    “……이, 이건 기적이 틀림없어!”

    평소에는 줘도 안 가졌던 잡템들.

    사냥터에 쓰레기처럼 그냥 널브러져 있었던 빨간 포션, 파란 포션에 유저들은 열광했다.

    잡템이라고 실망하고 뭐 할 겨를도 없었다.

    사람들은 다급하게 뛰어가 포션들을 주워 들이켜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계단을 오르면 오를수록 빨간 포션과 파란 포션들의 양은 굉장히 많아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들을 주워 먹으며 자연스럽게 계단을 올라갈 수 있었다.

    “캬, 빨간 포션이 원래 이렇게 달았었나?”

    “몰랐는데 파란 포션이 목넘김이 진짜 좋네. 청량해!”

    “참… 원래는 줘도 안 갖던 것들인데, 이게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그러고 보니 옛날에는 다 이런 거 먹고 살았지. 그동안 이 맛을 잊고 살았어.”

    “한때는 정말 벌과 개미 잡으면서 이거 한 병 떨어지면 꼭꼭 주워서 모았었는데. 그거 모아서 보스 레이드 뛰고 그랬지.”

    “진짜 이 빨간 포션 한 병에 든든하고 행복했었던 적이 있었다.”

    유저들은 어느 정도 체력이 차자 자연스럽게도 혀끝에 맴도는 그 추억의 맛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끓여 주던 된장국, 저렙이었을 때 푼돈을 모아 샀던 하급 포션.

    그 맛은 자연스럽게 유저들로 하여금 초심(初心)을 회상하게 만들었다.

    게임을 막 시작했을 때의 순수하던 자신을 말이다.

    바로 그 순간.

    츠츠츠츠츠츠……

    갑자기 계단에서 흰 빛이 나기 시작했다.

    빨간 포션과 파란 포션들이 줄지어 알려 주고 있는 길이 은은한 흰 빛으로 변해간다.

    모든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한 바퀴를 돌아 위로 향하는 구간마다 무언가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몬스터들이었다.

    “습격인가!”

    “설마 함정!?”

    “전투준비!”

    체력과 마나를 어느 정도 회복한 피난민들은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들이 단순히 홀로그램에 불과한 환영이라는 사실을 알자 사람들은 조금씩 조금씩 경계를 푼다.

    심지어, 몬스터들의 환영과 함께 나타난 것들은 아주 낯익은 것들이었다.

    자기 자신.

    과거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때, 막 캐릭터를 생성한 직후의 자신이 홀로그램으로 떠 있었던 것이다.

    “……저건 나잖아?”

    “오, 완전 쪼렙 때의 나네!”

    “그래, 나도 저랬을 때가 있었지. 완전 뉴비일 때.”

    “아니 근데 이 탑에 대체 무슨 장치가 되어 있길래 저런 게 뜨지?”

    저레벨일 때의 자신이 저렙 몬스터를 잡는 풍경.

    그리고 계단을 크게 한 바퀴 돌아 한 층을 올라갈 때마다 환영들은 레벨업 한다.

    레벨업 한 자신이 더 높은 레벨의 몬스터를 잡는 광경.

    그리고 또 한 층 위로 올라가면 더 레벨업 한 자신이 더더욱 레벨이 높아진 몬스터를 잡는 광경.

    그렇게 계속해서 위로 올라갈 때마다 환영 속 자신은 레벨업을 하며 현재의 자신에게 가까워지고 있었고 잡는 몬스터 역시도 바뀔 때마다 점점 더 크고 강력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탑의 맨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는 어떻게 될까?

    유저들은 기이한 열망과 호기심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더 두 다리에 힘을 내어 계단을 박차고 위로 올라간다.

    희망(希望).

    이 탑의 꼭대기에 있을, 멸망을 막아 낼 무언가를 찾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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