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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707화 (707/1,000)
  • 707화 2차 대격변 (4)

    “……어버이가 ‘고인물’이라.”

    ‘방주’ 앞에 선 검은 후드가 중얼거린 말에 피난민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검은 탑의 주인은 명확했다.

    어떻게 일개 플레이어가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 안으로 피신하기 위해서는 고인물, 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모든 피난민들이 간절한 표정으로 방주 앞에 모여 안으로 들어가길 소망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파앗!

    방주 앞으로 무언가가 나타났다.

    뿌연 오로라 같은 그것은 피난민들의 앞에 커다란 환상을 비추었다.

    홀로그램 영상 속에는 고인물의 얼굴이 커다랗게 둥둥 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어린아이 몇몇이 기분 나쁘다며 울기 시작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홀로그램 속 고인물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 방주의 꼭대기까지 올라간다면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피난민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만세! 이제 우린 살았다!”

    “역시 고인물 님이셔!”

    “……근데 이 탑 엄청 높아 보이는데?”

    사람들은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이 열광하는 한편 하늘에까지 닿아 있는 탑의 높이를 보며 암담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

    피난민 행렬 맨 앞에 있던 검은 후드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전에, 이 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부터 말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자 고인물의 환영은 인자한 미소로 화답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이 탑은 입구가 따로 없지요. 하지만 자격을 갖춘 이가 접근한다면 탑은 저절로 입구를 열어 준답니다.]

    그 말인즉슨 이 탑에 그냥 들어올 수는 없다는 말이다.

    수많은 피난민들은 일제히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고인물의 입이 열렸다.

    [옛날 성경을 보면, 대홍수를 버티기 위해 만들어진 노아의 방주에는 필히 한 쌍의 짝을 이룬 동물들만이 탑승할 수 있었죠.]

    그 말을 들은 피난민들 중 일부의 얼굴이 환해졌다.

    전부 다 옆에 애인의 팔짱을 끼고 있는 이들이었다.

    한편, 혼자의 힘으로 악전고투를 하며 여기까지 온 이들의 표정은 시무룩해진다.

    지금 이 난리통에 어디서 짝을 구해온단 말인가?

    ……하지만. 이어진 고인물의 말에 그들의 표정은 뒤바뀌어야 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아, 지금부터 제가 애인이 없음으로 음슴체를 쓰도록 하죠. 이 방주에는 커플인 사람들은 못 들어옴. 오직 솔로만 입장 가능함.]

    그러자 커플들의 표정이 멍하게 바뀌었다.

    그때.

    “에, 에잇! 밑져야 본전이지!”

    피난민 행렬 중 맨 선두에 있던 털복숭이 남자 하나가 심호흡을 하더니 성큼성큼 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스르르르르-

    검은 탑은 너무나도 부드럽게, 마치 달콤한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스푼을 입술 사이에 넣듯 털복숭이 남자를 삼킨다.

    굉장히 스무스한 입장이었다.

    그것을 본 선두에 한 커플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나섰다.

    “우, 우리도 가자!”

    그러나.

    커플이 검은 탑에 닿는 순간.

    …카악! 퉤에엣!

    검은 탑은 마치 똥을 씹기라도 한 듯 커플을 뱉어내 버렸다.

    결국 이로 인해 확실해졌다.

    짝을 이룬 이들은 방주에 입장할 수 없다. 살아남는 것은 오직 솔로뿐이다.

    그러자 몇몇 이들이 앞으로 나와 협상을 시도했다.

    “저희는 남남 커플인데 안 되나요?”

    “우리는 여여 커플인데…….”

    하지만 고인물의 환영은 단호하다.

    [아아, 뭐 어찌되었든 간에 커플은 안 됩니다. 그냥 다 안 돼요.]

    그러자 쌍쌍이 붙어있던 모든 이들이 다 시무룩해졌다.

    결과적으로, 방주 앞에 모인 피난민들 중 커플들은 모두 떨어지게 되었다.

    “쟈기야 미안해…… 우리 잠시만 안녕하자.”

    “사랑해. 네가 어디에 있든 그것만은 변치 않을 거야.”

    “자기야아아아! 잠시도 떨어질 수 없어! 그러느니 차라리 죽겠어!”

    “2차 대격변만 끝내고 다시 합치자. 서로 기다리는 거야.”

    울먹이며 서로 마지막 포옹을 하는 그들 때문에 대다수 피난민들이 이를 갈았지만 뭐 아무튼, 생존자 전원이 방주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이내 한 명 한 명이 방주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범생 아키사다 역시 검은 탑으로 들어갔다.

    “저는 모태솔로예요!”

    씩씩하게 한 손을 들고 외치면서.

    고인물의 환영은 그런 그녀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런 것까지 밝힐 필요는 없습니다만?]

    “…….”

    아키사다는 아차 싶어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푹 숙였다.

    그때.

    “나도 모쏠.”

    무심하게 툭 솔로 인증을 하고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검은 후드. 그는 별다른 감흥도 없다는 듯 검은 탑 안으로 들어와 내부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아키사다는 잠시 그런 검은 후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

    꽤나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말이다.

    *       *       *

    방주 안으로 들어온 생존자들은 깜짝 놀라야만 했다.

    검은 탑의 내부 공간은 겉에서 봤을 때보다도 훨씬 더 넓고 광활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중앙 광장. 그리고 광장의 드넓은 벽에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나선형의 계단들이 끝도 없이 빙글빙글 솟구쳐 있었다.

    그 계단의 끝은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천장과 이어져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세상에.”

    모든 피난민들은 입을 딱 벌렸다.

    이런 규모의 던전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이게 원래 있던 던전이 아니라 한 플레이어 개인이 만든 것이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업적이었다.

    “고인물, 그 사람은 대체 어디까지 올라가 있는 걸까.”

    아키사다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예전부터 범상치 않은 파이오니아(Pioneer)인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런 건축물을 축조할 수 있을 경지에 이르러 있다니.

    그때.

    “…에취!”

    아키사다의 옆에 있던 검은 후드가 갑자기 재채기를 한다.

    그리고는 머쓱한 태도로 주위를 둘러본 뒤 계단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검은 후드가 첫 물꼬를 트자 그동안 서로 눈치만 보던 피난민들이 슬슬 계단을 향해 움직인다.

    “어우, 토 나와. 이 높이를 어떻게 계단으로 올라가.”

    “그래도 이 위에 2차 대격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잖아.”

    “마법으로 못 올라가나?”

    “마나 포션이 없어서 올라가다가 떨어지고 말걸?”

    플레이어들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선계단을 올라간다.

    아주 길고 높은 등반.

    그것은 혈압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게임을 뛰어넘을 만큼 길고 단조로우며 지루하기까지 한 노가다였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버텨낸다. 아무리 길고 험난하고 고생스러운 길이라도 버텨내고 또 버텨낸다.

    여기까지 온 이들은 모두 이 게임을, 이 세계를 사랑하는 이들.

    자신들의 소중한 일상을 지키고자 용기를 내어 지금 이곳 방주의 문을 두드린 용사들이다.

    비록 행군의 중간 중간 지쳐 쓰러지거나 못 버티고 로그아웃하는 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이를 악문 채 결연한 표정으로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고 있었다.

    음.

    끝없는 계단을 따라 하늘까지 닿아있는 검은 탑의 꼭대기로.

    아키사다는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훔치며 계단을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스테미너 수치가 떨어지면서 몸이 점점 말을 듣지 않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문득, 항아리 게임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극도로 힘들고 또 지치는 레이스, 까딱 실수하면 바닥으로 떨어져 다시 시작해야 하는 절망적인 시스템.

    하지만 아키사다는 결국 꿋꿋하게 해냈다.

    그날의 경험이 지금 그녀의 한 걸음을 가능케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가혹한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고 부딪치는 사람들, 나락으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어 올라올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번 대회가 큰 의미로 남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인물.

    그는 일찍이 이런 상황을 예견했음일까?

    탑을 오르는 아키사다는 그날 고인물이 항아리 게임에서 우승하고 난 뒤 말했던 소감을 조용히 따라 읊조렸다.

    “……I dedicated this trophy to you, the one who came this far. I give it to you with all my love. 나는 이렇게나 멀리 온 당신에게 이 우승컵을 바친다. 나의 모든 사랑을 담아.”

    하지만, 아키사다는 그 말을 미처 채 끝맺지 못했다.

    “콜록! 콜록!”

    아무것도 마시지 못해 바짝 말라붙은 목이 먼지가 달라붙은 듯 까끌거린다.

    기침을 몇 번 하자 이내 목에 낀 먼지는 가시가 되어 날카로운 통증을 유발했다.

    피로가 극도로 누적되었다.

    바닥을 친 스테미너는 이제 HP마저 깎아먹고 있었다.

    ‘……여기까지인가.’

    아키사다는 다리를 옮겨 놓으려 했지만 몸은 이미 진즉에 그녀의 통제를 벗어났다.

    쿵!

    아키사다는 계단 중간에 무릎을 꿇었다.

    앞서 가거나 뒤에 오던 몇몇 이들이 힐끗 고개를 돌렸지만 그뿐인 관심이었다.

    이내 피난민 행렬은 쓰러진 아키사다를 지나쳐 위로 올라간다.

    그들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아키사다 역시 방주를 찾는 과정에서 가혹한 설산의 낙오자들에게 똑같이 했으니까.

    그녀는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었다.

    …….

    ……그렇게 생각했는데?

    “마셔.”

    누군가 쓰러진 아키사다의 볼에 차가운 유리병을 가져다 댄다.

    유리병 표면에 맺힌 습기에 깜짝 놀란 아키사다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후드.

    그가 그곳에 있었다.

    아키사다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유리병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유리병에 담긴 그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는 생명수(生命水)나 다름없는 것.

    바로 ‘빨간 포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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