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706화 (706/1,000)
  • 706화 2차 대격변 (3)

    휘이이이잉-

    눈보라가 불기 시작했다.

    체력을 깎아먹는 하얀 악귀.

    하지만 이 무서운 자연재해 역시도 벌과 개미의 대홍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생존자들은 기나긴 피난 행렬을 이뤄 북대륙으로 향했고 이내 중부와 북부를 나누는 거대한 벽, ‘가혹한 설산’을 마주하게 되었다.

    “으으, 이 시즌에 북대륙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인데.”

    아키사다는 몸을 오들오들 떨며 중얼거렸다.

    보통 신년이 시작되는 1월에서 2월 사이에는 북방의 추위가 더더욱 기승을 부린다.

    눈보라의 지속시간이 몇 배나 길어지고 산사태의 발생 확률도 크게 올라가서 어지간한 고수들조차 이 기간 동안에는 북대륙 레이드를 삼가는 편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모든 대륙이 벌레들에게 먹힌 지금에야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지금도 귓가에 빗발치는 뉴스 속보들은 연신 다른 생존자 그룹의 궤멸을 알려 오고 있었고 그것은 동상으로 얼어붙은 발등에마저 불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피난민들은 얼어붙은 눈길을 걷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가파른 경사. 눈이나 얼음, 눈보라가 없다고 해도 험난한 산길이었다.

    벌과 개미를 피하기 위해 설산에 뛰어들었다지만 눈보라와 추위 역시도 무서운 적이다.

    …픽!

    리자드맨 유저 한 명이 바들바들 떨며 산을 오르다가 그대로 눈 위로 고꾸라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유난히 주변 환경 온도에 영향을 잘 받는 종족 특성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한곳에 멎었다.

    리자드맨이 아닌 리자드맨이 손에 쥐고 있는 물건에.

    “오빠, 저거…….”

    “그냥 가자. 지속시간 얼마 안 남았을 거야.”

    “만약에 방금 꺼낸 거면?”

    “…….”

    여자의 말에 남자는 고민했다.

    지금 피난민들이 가장 애용하고 있는 조합 아이템이라면 ‘가루슈파 손난로’다.

    대여섯 가지의 재료가 들어가는 다소 까다로운 레시피지만 그렇다고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귀한 아이템은 아니었다.

    -<가루슈파 손난로> / 악세사리 / C

    성냥팔이 소녀는 소원했다.

    ‘단 1분이라도, 단 1초라도……아니면 단 1도라도.’

    -특성 ‘잔불’ 사용 가능 (특수)

    -지속시간 6시간 (1회용)

    특성 ‘잔불’은 빙결 데미지에 의한 사망을 막아 주는 특성.

    ‘잔불’ 특성을 발동한 플레이어의 체력은 최하 1로 고정된다.

    쉽게 말해 냉기 한정 ‘앙버팀’ 특성이라 볼 수 있다.

    “오빠.”

    여자가 다시 보채자 남자는 머뭇거리며 손톱을 깨물었다.

    “자기야…저 사람도 힘들 텐데.”

    “죽었잖아 이미!”

    “……그래도.”

    “망설이는 사이에 갔다왔겠다!”

    여자의 보챔이 점점 심해지자 결국 남자는 고개를 떨궜다.

    “하, 여기 그대로 있어.”

    “…그 말 할 사이에 다녀왔겠다구!”

    남자는 조심스럽게 쓰러진 리자드맨에게 다가갔다.

    금세 핏기가 싹 가신 걸 보니 죽은 게 확실하다.

    남자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뒤 리자드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꽉!

    죽은 줄 알았던 리자드맨이 별안간 손아귀에 힘을 주어 손난로를 움켜쥔다.

    잔불 특성 때문에 HP가 1남은 상태로 숨만 붙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격까지는 할 힘이 없는지, 리자드맨은 그저 반쯤 감긴 눈으로 숨만 헐떡일 뿐이었다.

    “…….”

    남자는 갈등했다.

    이 리자드맨의 손아귀 속에 있는 손난로를 가져갈지 말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손난로의 미약한 온기에 기대어 있는 이 가느다란 목숨줄을 확실히 끊어 놔야 할 것이다.

    남자가 막 허리춤의 이 빠진 단검을 향해 손을 뻗던 그때!

    …후두둑! 우르릉!

    평평해 보이는 눈 바닥이 별안간 검은 입을 벌리더니 세 명의 플레이어를 순식간에 삼켜 버렸다.

    남자도 여자도 리자드맨도 모두 크레바스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세 명의 고레벨 플레이어가 한꺼번에 리타이어 되는 것을 본 아키사다는 그녀가 지금껏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긴 발자국들의 행렬. 그리고 시체, 또 시체.

    수많은 시체들이 본연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희게 탈색되고 있었다.

    그리고 꽁꽁 언 시체들은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을 위한 표석이 된다.

    단지 설산을 넘는 과정에서 수 천 명이 넘는 플레이어들이 리타이어 당했다.

    다들 어느 정도 레벨이 높은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만큼 이 시즌의 북대륙은 가혹한 곳이었다.

    “…….”

    아키사다는 이를 악물고 꽁꽁 얼어붙은 절벽을 타올랐다.

    바로 그때.

    …쩡!

    아키사다의 몸이 한번 크게 흔들렸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밧줄이 그만 중간에 깨져 버리고 만 것이다.

    “으윽!?”

    아키사다는 재빨리 플라이 마법을 쓰려 했지만 눈보라 때문에 균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가다간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때.

    아키사다가 허공으로 곤두박질치기 직전.

    …턱!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채는 억센 손아귀가 있었다.

    검은 후드!

    어느새 옆에 나타난 것일까, 그가 아키사다의 뒷목을 잡아올린 것이다.

    “눈에 자주 띄네, 너.”

    공치사는 그것이 끝이었다.

    검은 후드는 그 짧은 한마디만을 내뱉은 뒤 도로 피난민 행렬로 돌아갔다.

    콩닥- 콩닥- 콩닥-

    아키사다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산기슭에 서 있었다.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는 건 왜지?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할 뻔해서 그런가?

    아키사다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피난행렬을 따라갔다.

    저 앞에서 검은 후드가 앞서 성큼성큼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 가혹한 설산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지역에 눈이 많이 쌓여 있는지, 어느 방향에 몬스터들이 오간 흔적이 있는지, 어느 방향에 숨겨진 오브젝트나 표지판이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 같다.

    눈보라에 펄럭이는, 삶의 풍파를 수없이 겪어온 듯한 너덜너덜한 망토가  그를 굉장히 든든해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저, 저기요!”

    아키사다는 더듬더듬 외쳤다.

    앞서 성큼성큼 걷던 검은 후드는 귀를 한번 후비적거리더니 계속 갈 길을 간다.

    아키사다는 다시 외쳤다.

    “저기요! 검은 후드 씨!”

    그제야 검은 후드는 고개를 돌렸다.

    아키사다는 그의 모습이 어딘가 굉장히 낯익다고 생각했다.

    “왜?”

    목소리 역시도 낯익다.

    억지로 목소리를 변조하려고 하는 저 음색조차도.

    아키사다는 긴가민가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감사인사가 나오기도 전에 검은 후드는 이미 등을 돌려버린 뒤였다.

    저 과도할 정도로 쿨한 태도 역시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아키사다는 검은 후드에게서 풍겨오는 익숙한 기운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막 검은 후드에게 다가가 다시 한번 말을 걸려 했을 때.

    …쿠르릉!

    요란한 굉음이 아키사다의 말문을 막는다.

    산비탈 저 너머에서 엄청난 양의 눈사태가 떠밀려 오고 있었다.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 저 규모면 못 막아!”

    “도망가!”

    “어디로!?”

    피난민 인파 중에는 고레벨 랭커들이 꽤나 보였지만 그들도 저렇게 거대한 규모의 산사태를 막아낼 수는 없다.

    바로 그 순간.

    “비켜.”

    검은 후드가 앞으로 나섰다.

    후읍-

    그는 짧게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그리고 검은 망토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한 자루의 긴 삼지창!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는 양손무구였다.

    퍼펑!

    검은 후드는 삼지창을 뻗어 몰려오는 눈사태를 한 방에 역방향으로 걷어내 버렸다.

    …….

    정적.

    너무나도 엄청난 신위에 모든 유저들이 죄다 입을 딱 벌리고 말이 없다.

    검은 후드는 삼지창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방주로 가지.”

    그 오연한 태도에 사람들은 두 번 홀렸다.

    그리고 홀린 사람들 중에는 아키사다 아야카도 있었다.

    ‘대, 대체 누구지?’

    방금 전의 산사태는 그야말로 역대급 규모였다.

    반경 십 수 킬로미터를 통째로 뒤덮어 버렸을 정도의 자연재해.

    한데 그것을 단 일격으로 뒤집어 버리다니.

    저 정도면 거의 한 나라를 대표할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이다.

    어디서 저런 천상계 랭커가 튀어나왔는지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었다.

    ‘말하는 걸로 봐서는 한국인? 같은데. 한국엔 정말로 게임 잘하는 사람이 많구나.’

    아키사다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검은 후드의 뒤를 따랐다.

    만약 자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전성기의 피지컬로 승부를 본다면 검은 후드를 이길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다.

    하물며 자기가 이렇게 지치고 피로한 상태일지언데 검은 후드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즉 벌과 개미의 대홍수로 인해 지치고 피로한 와중에도 검은 후드는 저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화로울 때에는 대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세상이 위기에 빠지니까 진짜 강자들도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아키사다는 검은 후드가 정체를 감추고 은거한 최상위 티어의 랭커일 것이라 생각했다.

    굳이 랭킹에 자신의 이름을 등록시켜 두지 않는 부류의.

    그녀가 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찾았다!”

    저 앞에서 꿈결같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키사다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눈보라 너머를 가리키며 미친 듯이 외치고 있었다.

    “찾았다! 저기 방주가 있다!”

    아키사다는 두 눈을 찡그리고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세게 부는 눈보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헛것을 보는 건가?’

    너무도 간절한 나머지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

    하지만.

    이윽고 눈보라가 조금씩 조금씩 걷힘에 따라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하나의 검은 그림자였다.

    탑(塔)!

    시커먼 탑 하나가 가혹한 설산의 설원 중앙부를 차지하고 위로 치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피난민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검은 탑을 향해 모여들었다.

    방주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다만.

    피난민들이 당장 방주 안으로 들어가 벌과 개미, 그리고 지독한 추위로부터 지친 몸을 쉬게 하기에는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방주> -등급: S

    어버이: 고인물

    집주인이 명확하다는 것 정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