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705화 (705/1,000)
  • 705화 2차 대격변 (2)

    <멸종위기지수>

    (Endangered index)

    인    간          99.9% (1급)

    리자드맨   99.7% (1급)

    오    크          99.8% (1급)

    살아남은 인간 0.1%.

    살아남은 리자드맨 0.3%.

    살아남은 오크 0.2%.

    장비나 소모품 등 아이템의 영향을 많이 받는 인간 종족의 피해가 가장 컸다.

    기관과 시설이 모조리 파괴된 지금, 포션 등의 소모품을 벌충할 기회가 전혀 없으니 말이다.

    타고나길 강력한 육체로 타고난 오크와 리자드맨들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나마 리자드맨들이 오크보다 피해가 약간 적은 이유는 오크 유저들이 대부분 호전적인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벌과 개미에게 더욱 많은 교전 피해를 입었기 때문, 그리고 리자드맨들은 햇볕에 일광욕을 하는 것만으로도 체력이나 마나를 어느 정도 자연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세 종 모두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것은 마찬가지다.

    현재 접속해 있는 생존자들의 수는 약 사백오십 만 명으로 전체 플레이어 수의 약 0.2% 정도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 중 대부분이 상위 티어의 랭커들이다.

    그들은 종족을 불문하고 한 데 똘똘 뭉쳐 농성전을 벌이거나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극한의 서바이벌 게임, 멸망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게임의 장르가 순식간에 아포칼립스(Apocalypse)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원래 요새나 아지트, 벙커나 쉘터로 유명했던 월드맵의 몇몇 요충지로 몰려간 랭커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저항하기 시작했다.

    상점들이 모조리 파괴되어 소모품을 구할 수도 없고 신전들도 모두 벌레지옥이 되었기에 죽어서 부활할 수도 없다.

    죽는다는 것은 곧 그 계정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지금까지 이 게임에 인생을 바쳤던 이들일수록 더욱 더 공포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싸워라! 절대 지지 마! 이 요새가 넘어가면 끝이라고!”

    “젠장! 오크 놈들이랑도 손잡아!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겠다!”

    “성벽을 수리해라! 12시 방향 축대를 받쳐! 성채가 함락되면 리자드맨도 끝이다!”

    몇 개의 유명한 집결지로 모여든 플레이어들은 종족을 불문하고 하나가 되어 벌과 개미의 대홍수에 맞서고 있었다.

    -난공불락으로 소문난 서부전선의 요새 ‘토치카(tochka)’-

    “으아아아! 말도 안 돼! 토치카는 한 번도 넘어간 적이……!”

    “성문이 점점 밀린다 X발!”

    “외성의 소문들은 포기해! 우리는 본문만 사수한다!”

    “그게 아니라 지금 본문이 밀리고 있는 거라고!”

    “말도 안 돼! 본문 한 짝에 400톤이 넘어! 그걸 어떻게……?”

    “도대체 성문 밖에 얼마나 몰려와 있는 거냐고!”

    -유토러스 중심부에 있던, 평화로울 때에는 그 삼엄한 경계의 이유를 알지 못했던 지하 벙커 ‘필박스(pillbox)’-

    “모두 조용히 해! 몇 달…몇 달 만 버티면 된다!”

    “대장, 식량이……!”

    “식량은 이따가 알아서 배분할 거야!”

    “식량이 모두 사라졌다고요!”

    “뭐?”

    “대장! 식량 창고에서 이상한 소리가 납니다! 날개…날갯짓 소리가!”

    “…이, 이런, 빨리 닫아! 식량 창고 문을 닫……! 으아아! 아니다! 바닥! 바닥을 막아!”

    “꺄아아악! 바닥을 어떻게 막습니까!?”

    -동대륙에 우뚝 솟은 채 늘 강자들의 성지순례 대상이 되었던 천혜의 성채 ‘칼침의 탑’-

    “여긴 높이와 강풍 때문에 비행 몬스터도 못 올라오는 곳이야. 적어도 살육 벌이 올라올 일은 없지.”

    “개미도 마찬가지고.”

    “보스 몬스터 자리도 왠지 공석인 듯하니 한동안은 여기서 농성하자.”

    “……근데 왜 탑이 흔들리는 것 같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아니, 진짜… 무슨 소리 안 들려?”

    “11시 방향이다! 으아아아! 개미들이!?”

    “개미들이 서로를 밟고 오르고 있다!”

    “벌레들이 시체로 탑을 쌓아 오르고 있어요!”

    “여기! 3시 방향 62도 높이! 살육 벌들이다!”

    “서로 그물처럼 뭉쳐서 날아오르고 있어! 강풍이 문제가 아니야! 오히려 녀석들 날개 바람이 더 강해!”

    “도, 도망쳐야 돼!”

    “어디로?”

    “…….”

    “어디로!”

    난다긴다하는 랭커들은 핵심 요충지들에 모여 공성전을 벌인다.

    물론 전원 수성하는 쪽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밀려드는 벌레의 쓰나미는 너무나도 강력한 것이었다.

    요새의 굳건한 성벽들이 벌레굴로 인해 약해진 지반 위로 일제히 무너져 내린다.

    험난한 협곡 위의 성채는 벌레들의 시체로 가득 매워져 평지 위의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까마득한 높이에 떠 있던 비행선은 벌레들에 의해 갉아 먹혀지고 구멍이 나 추락했다.

    물가 근처에 있던 벙커들은 전부 침수되었다.

    드넓은 필드에는 벌레들의 시체가 썩어 전염병이 창궐한다.

    그 외, 요충지라 할 만한 장소들 역시도 싹 다 털렸다.

    심지어 던전조차도 벌레들의 범람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흔들귀의 미궁, 악몽숲, 패륜아의 둥지, 부글부 굴, 악의 고성, 꼭두각시 회동, 잊혀진 유적지, 부유섬, 가혹한 사막, 어비스 터미널, 죽음길 나락, 황천의 유극, 데린쿠유, 용자의 무덤, 살인자들의 탑…… 심지어 만마전마저도 벌레들의 방문을 받아야만 했다!

    벌레들이 시도하는 집단 공격의 패턴들은 다양했다.

    턱으로 물고 침으로 쏘는 것 외에도 대규모 군체의 무게를 이용한 압사 공격, 우르르 에워싸 체온으로 쪄 죽이는 공격, 폭발물을 들고 들이받는 자폭 공격, 땅 밑으로 파고들어와 건축물을 무너트리는 테러 공격, 혹은 땅굴로 물을 끌어와 수해를 일으키는 공격, 시체나 배설물들을 마구 떨어트린 뒤 썩게 만들어 전염병을 일으키는 공격 등이 실시간으로 가해진다.

    중부대륙으로 도망치던 아키사다는 토치카 요새를 실시간으로 두들기는 벌과 개미 군단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이, 이런 건 불가능해! 한낱 벌과 개미들이 어떻게 이런 전략을…….”

    그러자 옆으로 피난 가던 행렬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군주라도 있나 보지.”

    일전에 아키사다를 구해 줬던 검은 후드였다.

    그의 말을 들은 아키사다는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벌과 개미들이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필시 이것들을 조종하는 대군주가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순히 첨병들에게 맞서는 것조차도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군단의 심층부로 파고들겠는가.

    포션도, 식량도, 마나도, 체력도 없는 아키사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를 악물고 피난행렬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바로 그때.

    …쾅!

    한 벌이 전장에 굴러다니는 폭발물을 집어 들고 날아가 성벽을 들이받는다.

    토치카 요새의 벽이 무너져 내렸고 이는 곧 함락을 뜻했다.

    구멍이 난 성채 안으로 벌과 개미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간다.

    자연스럽게, 성벽 너머에서는 끔찍한 비명들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안 돼! 싫어! 살려 줘요!]

    한 소녀가 인형을 끌어안은 채 울고 있다.

    그때, 길바닥에서 소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로라! 여기야! 여기로 와 빨리!]

    소녀의 언니로 보이는 이가 하수도 밑에서 동생을 부르고 있었다.

    지하수로로 통하는 길 위에는 철로 된 뚜껑이 덮여 있어서 이것을 닫으면 벌들은 들어올 수 없다.

    로라라는 이름의 소녀는 온 힘을 다해 지하수로를 향해 뛰었다.

    이 위기의 순간까지 꼭 끌어안고 있었던 인형마저 내팽개치며.

    하지만.

    붕-

    그 뒤를 벌 한 마리가 맹렬하게 따라온다.

    [언니!]

    로라는 울먹이는 얼굴로 외쳤다.

    하지만.

    [……미안 로라.]

    언니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벌이 로라의 등에 침을 쏘기 직전, 언니는 로라를 코앞에 두고 지하수로 뚜껑을 닫아 버렸다.

    [……미안, 정말 미안 로라.]

    울먹이는 표정으로.

    이윽고, 벌은 로라를 무참하게 살해했다.

    그리고 꽁무늬의 날카로운 침을 빼들어 로라의 시신에 무어라 글자를 새긴다.

    내용은 분명치 않지만 낙서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순전히 재미삼아서.

    그리고 머지않아.

    …펑!

    지하수로의 뚜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밑에서 수없이 많은 개미들이 지상을 향해 우글우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맨 앞에 있는 개미의 입에는 아까 동생의 발치 앞에서 뚜껑을 닫았던 언니가 물려 있다.

    왠지 웃는 표정인 머리통만 남은 채로.

    “……세상에.”

    아키사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매의 참극을 바라보았다.

    벌들의 날갯짓에 날아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개미들의 발길질에 말라붙어 풀 한 포기 없는 땅.

    리젠되는 몬스터들은 죄다 도륙이 나 고기조각으로 변해 버렸다.

    사냥감이 없어지자 보급도 없어졌다. 건물들은 죄다 파괴되었고 NPC들도 전부 죽거나 어디론가 떠났다.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이 뭘 할래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2차 대격변이 너무 일찍 왔어. 대체 왜일까?”

    아키사다는 하늘을 원망했다.

    왜 유저들이 충분히 강해지지도 않은 지금 시점에서 확장팩이 발매된단 말인가?

    원래 확장팩이라는 것은 유저들이 지나치게 강해지고 익숙해져서 더 이상 이 세계관 내에 즐길 거리가 부족하다고 판단할 때 내야 하는 법이거늘…….

    ‘대체 왜!’

    아키사다는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피난행렬에 몸을 맡겨 빠르게 이동했다.

    지금 여기 모인 수만 명의 생존자들은 전부 북대륙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들은 요새나 쉘터에 처박혀 소모품을 소모하며 농성전을 벌이거나 은밀한 곳에 숨어 있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 판단은 일단 1차적으로는 맞아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농성이나 은폐를 시도했던 이들이 전원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북대륙에 방주가 있을까?’

    아키사다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모든 동료들도 다 잃은 시점이다.

    이제 그녀에게는 마나도 별로 없었고 가진 포션이나 식량도 다 떨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이 게임 세계를 지키고 싶어 하는, 이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여전히 간절했기에 그녀는 로그아웃을 하지 않고 이곳에 남았다.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도 알 수 없는, 오로지 뜬소문으로만 존재하는 불확실한 희망에 모든 것을 건 채 북대륙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놓고 있는 것이다.

    ‘방주(方舟)’

    모든 플레이어들의 마지막 희망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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