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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701화 (701/1,000)
  • 701화 벌레의 왕 (1)

    집에 돌아온 아이의 몸에 이런 낙서들이 칼과 담뱃불로 새겨져 있는 것을 본 부모의 심경이 어떨까?

    나는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하겠다.

    […….]

    소돔과 고모라. 두 여왕이자 두 어머니는 딸과 아들의 모습을 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츠…

    이윽고, 그녀들의 몸에서 스산한 아우라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쩌억- 쩍- 우지지지직!

    단지 내뿜는 기세만으로도 벽과 바닥이 요란하게 갈라진다.

    고정 S+등급의 몬스터가 어그로에 MAX까지 끌렸을 때 동반되는 현상이다.

    한편, 나는 중압감에 짓눌려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이거 저레벨 플레이어들이었다면 그냥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죽겠는데?’

    내 어깨 위에 있던 오즈조차 끙끙 앓는 소리를 낼 정도면 말 다한 셈 아니겠는가.

    죽음룡 오즈, 한때 모든 흑색 비늘 용들의 군주였던 이 녀석이 신음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으음, 내가 아직 아주 어린 용이었을 때 소돔과 고모라의 전쟁을 본 적이 있지.]

    ……오? 이런 설정도 있었나?

    나는 [SKIP]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오즈의 말을 들어 주었다.

    오즈는 말을 계속했다.

    [이 말을 하려면 그 전에 내가 알껍질을 깨고 나오던 순간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지. 그 당시 나는 알에서 막 깨어난 상태였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지만 그래도 뭔가를 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왜냐하면 나는 알껍질 속에 있을 때부터 배움에 대한 욕구가 충만한 상태였고 이것은 용들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들만이 타고난다는 네츄럴 본 호기심…… 그래서 그 때 흑빛 용군주 직에 계셨던 네크로필리안 님과 모든 용들의 로드였던 핑크 드래곤 클리셰 님께서는 나를 보시곤 싹수가 있어 보인다며 이례적으로 알껍질을 막 깨고 나온 헤츨링이었던 나를 차기 로드 후보로……]

    “야, 됐어. 요점만 말해.”

    아무래도 그동안 비중이 공기화 되었다가 간만에 부여받은 대사에 흥분한 모양이다.

    내가 말을 끊으며 [SKIP] 버튼을 반만 누르자 이내 오즈가 쓸데없는 정보들 말고 그나마 좀 들을 만한 것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아무튼 간에, 내가 아직 어린 헤츨링이었을 때는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위대한 두 전쟁군주’간의 반목이 슬슬 종식되어 가고 있을 무렵이었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분쟁지대에서의 소규모 접전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는데 내가 본 것도 그중 한 전투였다.]

    그 자존심 강한 용족마저 ‘위대하다’라고 칭하는 두 전쟁군주.

    오즈의 증언에 의하면 소돔과 고모라의 대격전은 그야말로 어마무시한 것이었다고 했다.

    [소돔의 창에서 뻗어 나온 여섯 줄기의 참격은 대륙의 끝에서 시작되어 반대편 끝에서 끝났다. 창이 찌르고 간 하늘에는 구멍이 났고 하늘의 천장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돔 모양의 기류에도 구멍이 나 그리로 강렬한 태양빛이 쏟아져 들어왔지. 그로 인해 숲이 불타고 호수가 말라붙었다.]

    [그 무시무시한 폭주를 막아 낼 수 있는 것은 고모라의 방패뿐이었어. 여섯 개의 산맥과도 같은 그 거대한 방패들은 모든 것을 짓눌러 부수며 진격했고 말도 안 될 정도로 넓은 표면적 탓에 창보다도 훨씬 더 많은 피해를 끼쳤지.]

    오즈는 두려움과 경외를 담아 아주 오래 전의 그날을 추억했다.

    두 전쟁대군주의 싸움은 온 세상의 지형을 뒤틀어 놓았고 모든 숲과 강, 생태계들을 말려 버렸다.

    땅과 바다에 있는 모든 생물들은 그녀들이 내뿜는 살기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고 세상은 정말로 멸망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변은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두 전쟁군주는 종적을 감췄다.

    벌과 개미들 역시 오랜 전쟁을 끝마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온 세상을 뒤덮던 그때와는 달리 극소수의 일부만이 남아 지상을 발발발 기어 다닐 뿐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두 전쟁군주는 오랜 싸움을 멈추고 스스로를 봉인해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다. 지금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은 그 덕에 요행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들의 후손이지. 용도, 악마도.]

    오즈의 말에 의하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두 여왕은 내가 알던 것보다 더욱 더 엄청난 존재들이다.

    단순히 설정으로만 알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긴, 나도 회귀하기 전에는 엄청 먼발치에서 한번 본 게 고작이었으니.’

    2차 대격변 때 나는 범람하는 벌과 개미들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었다.

    ……한 1분 버텼었나? 그랬을걸?

    완전 초반부에 순삭당한 것이라서 메인 스토리에 거의 참여하지도 못했다.

    그것도 보스 몬스터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심지어 중간 보스에게 딜 한번 넣어 보지도 못하고 맞이한 죽음이라서 더욱 더 허탈했다.

    그래서 사망 패널티로 접속 못 하는 기간 내내 탑 티어급 천상계 랭커들의 개인방송을 통해 그것을 지켜봤었지.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나는 엄청나게 가까운 거리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목격하고 있었다.

    ‘……근데 좀 너무 가깝지 않나 싶기도 하고.’

    가능하다면 몇 백 미터, 아니 몇 킬로미터 정도는 더 멀어져서 보고 싶은데 말이지.

    한편.

    만신창이 된 아들과 딸을 통해 그간 자식들이 받았던 취급을 모두 눈치 챈 두 여왕이 격분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

    용이 무엇이냐? 악마가 다 무엇이냐? 한때는 온 대륙의 지배종이었던 벌과 개미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나 보니 가장 높은 곳에 남겨두었던 자식들이 어느샌가 가장 낮은 곳에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짧은 잠에 빠져 아주 잠시 아이들을 돌보지 않았을 뿐인데, 대체 왜 내 자식들이 이런 취급을 받게 된 것이냔 말이다!]

    [아이들은 역시 잠시도 눈을 떼면 안 된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았도다!]

    [결국 평화는 모든 것을 좀먹게 할 뿐!]

    [이것은 다 ‘그놈’ 때문이다!]

    소돔과 고모라. 두 여왕은 서로를 마주보고 대사를 맞추었다.

    [옳다! 이 모든 책임은 ‘그놈’에게 있다!]

    [우리의 전쟁을 말린 놈! 그놈이 잘못했다!]

    [감언이설로 우리를 꼬드겨 우리의 자식들을 구렁텅이로 떨어트린 바로 그놈!]

    아무래도 두 전쟁대군주의 전쟁을 중재시켰던 태고의 존재가 있는 듯하다.

    그 제 3자는 바로…….

    [‘중재자 올빼미’를 찾아내라!]

    벌 여왕 소돔과 개미 여왕 고모라는 서로 싸우기는커녕 분노로 의기투합했다.

    원래 내 자식의 학교폭력 문제는 서로 다른 성향의 학부모들도 하나로 집결시키는 법.

    그녀들의 입에서 ‘중재자 올빼미’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X됐다.’

    나는 큰일이 났음을 직감했다.

    슬쩍 눈을 돌려 상태창을 열어보니.

    <이어진>

    LV: 95

    HP: 950/950

    호칭: 불사조의 대리인(특전: 선택)

    ……요런 특성이 나한테 있네?

    예전에 살인자들의 탑을 공략하던 당시 불똥정령에게 들었던 대사가 자연스럽게 생각난다.

    ‘저기, 이봐. 너는 자각흉몽아귀와 무슨 관련이라도 있어? 왜 이런 곳에 있지?’

    [아아, 나는 이 물고기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어. 그저 ‘중재자 올빼미 님’께서 너를 도와주라고 명령하셔서 서둘러 온 것뿐야.]

    ‘중재자 올빼미’란 당연하게도 불사조를 지칭하는 것 같고…… 그 불사조의 기운은 지금 나에게 깃들어 있다.

    자연스럽게.

    [‘그놈’! 그놈의 냄새가 난다!]

    [어디냐! 우리를 이 무저갱에 처박아 놓고 가장 천한 취급을 받게 만든 놈이 있는 곳은!]

    용과 악마들조차 두려워하는 두 전쟁군주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7마리의 용군주와 7마리의 악마성좌를 제외한 ‘세외 3존(世外三尊)’, 그 중 불사조를 제외한 나머지 두 존재의 살의가 오로지 나 한 명에게만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뭐 대꾸할 말이 있나.

    “……따란.”

    네, 그게 바로 접니다.

    나는 그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양팔을 벌리고 꾸벅 인사를 할 뿐이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그것은 두 여왕의 심기를 더욱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모두 죽이리라.]

    2차 대격변의 두 전쟁군주가 세상에 선전 포고를 했다.

    동시에.

    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우글……

    여왕의 전쟁 선포를 실현에 옮기는 벌레들.

    무수히 많은 병사들이 동원령에 따라 굴 밖으로 기어 나온다.

    첨벙! 첨벙! 첨벙! 첨벙!

    바닥에 고인 바닷물은 동굴 깊숙한 곳에서 바글거리던 벌레들을 모두 잠에서 깨워냈다.

    벌레의 왕! 대홍수!

    이렇게 많은 벌레들의 범람이라니!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던 윤솔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나는 인간이 태어나기 오래 전, 성경에 나오는 천지창조의 시대. 지구가 아직은 불완전해서 인간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저번에 잠시 암송한 적 있었던 좋아하는 소설의 대사 한 구절.

    과연 상황은 그 말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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