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95화 (695/1,000)
  • 695화 병신과 머저리 (5)

    *       *       *

    그 후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휴. 오늘치는 이만 할까.”

    나는 땀을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내가 최근 시작한 운동은 ‘실내 암벽등반’으로 유산소운동과 무산소 운동이 전부 되며 악력이나 근력도 기를 수 있는 좋은 스포츠였다.

    하고 많은 운동들 중에 굳이 이 종목을 고른 이유는 바로 곧 이어질 레이드에 미리 적응해두기 위해서였다.

    내가 막 게임 캡슐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

    -띠링!

    핸드폰에 메시지가 왔다.

    드레이크가 보낸 것이었다.

    <어진, 오늘도 밤 11시에 접속인가? 나는 조금 일찍 접속해 있겠다.>

    나 역시 조금 일찍 들어갈 생각이었기에 조금 기다리고 있으라고 답장을 보냈다.

    혹시나 해서 윤솔에게 전화를 거니.

    [앗? 어진아, 나 오늘 녹화 있어서! 아마 레이드 시간 딱 맞게 접속할 것 같은데 어쩌지?]

    “어어, 괜찮아. 나랑 드레이크 먼저 접속해 있을게.”

    나는 전화를 끊고 바로 캡슐로 향했다.

    이윽고.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

    .

    익숙한 음성 메시지와 함께, 시야가 게임 속 풍경으로 변했다.

    나는 로그인을 알리는 환한 빛무리와 함께 한 발을 내딛었다.

    현재 있는 위치는 대군락지대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한 동굴 입구였다.

    “일찍 왔군.”

    먼저 접속해 있던 드레이크가 손을 들어 나를 반겼다.

    “솔이는 딱 맞춰서 들어올 것 같던데. 오늘 예능 고정 게스트로 나가는 날이라.”

    “그런가? 상관없다. 나는 동굴 내부를 구경하려고 일찍 들어온 것이니.”

    나는 드레이크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내게 삼각 플라스크처럼 생긴 포션 병 하나를 내밀었다.

    안에는 검은 흑맥주가 채워져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맥주를 마시며 동굴을 구경했다.

    대군락지대의 가장 낮은 지대, 커다란 흙무덤 아래로는 석회질의 거대 공동이 도사리고 있었고 우리는 지금 그 입구 부근에 앉아 있는 것이다.

    언뜻 들여다보기로도 동굴 내부는 참 아름다웠다.

    넓고 시원한 공기, 구불구불한 통로, 천장과 바닥에 솟고 돋은 종유석들, 반짝반짝 빛을 뿜는 자수정 원석들.

    “천혜의 아름다움이로군.”

    드레이크는 작게 감탄했다.

    나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먼 훗날, 그러니까 앞으로 5년쯤 더 지나고 나면 이곳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관광명소가 된다.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에는 이처럼 아름다웠던 동굴은 버려진 맥주 캔, 흙먼지, 낙서, 그래피티 등에 의해 보기 싫게 변할 것이다.

    그러니 이 동굴을 지금 탐험할 수 있다는 것은 꽤나 큰 축복이었다.

    “……뭐, 하지만 그것도 ‘입구’까지의 이야기지.”

    나는 고개를 돌렸다.

    동굴의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조악한 솜씨로나마 그려진 그림들이 존재했다.

    높은 벽에 삐뚤빼뚤 그려져 있는 거대한 그림.

    가까이서 보면 그저 어설픈 낙서처럼 보이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사실 그것은 대단히 웅장하고 정교한 모양의 벽화였다.

    드레이크는 벽화의 내용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벌과 개미들이 엄청나게 많이 그려져 있는데. 한데 그것들 사이에 서 있는 저 두 명의 여자는 누구지?”

    너무 큰 벽화라서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그 그림의 내용이 겨우 한 눈에 들어온다.

    드레이크의 말대로, 벽화에는 수없이 많은 벌과 개미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범람하는 물결처럼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고 그 밑에서 인간과 몬스터들이 신음한다.

    오우거, 바실리스크, 샤벨타이거, 뿔도마뱀, 늪코끼리 등 거대한 괴수들 역시 벌과 개미들에 쫓겨 겁먹고 있는 그림.

    그리고 그 모든 벌과 개미들의 위에는 가장 거대한 몸집을 가진 두 명의 여자가 서 있었다.

    긴 창을 든 여인과 커다란 방패를 든 여인은 서로를 마주본 채 대치하고 있었고 그녀들의 하반신, 치마 속에서는 각각 무수한 벌과 개미들이 쏟아져 바글거리는 것이 이 벽화의 내용이었다.

    나는 드레이크에게 짧게 대답했다.

    “두 전쟁군주(The Two Warlords).”

    “…….”

    내 말에 드레이크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때쯤 해서.

    “아앗! 많이 기다리셨나요!?”

    윤솔이 약속시간에서 3분 정도 일찍 접속했다.

    “자, 그럼 또 전진해 보자고.”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드레이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턱!

    드레이크는 내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본격적으로 동굴을 탐험할 시간이다.

    *       *       *

    그리고 또 그 뒤로부터 일주일가량이 흘렀다.

    우리가 그동안 한 일이라곤 그저 동굴 아래로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일뿐이었다.

    “……스카르타리스의 그림자가 상냥하게 떨어지는 스네펠스 요쿨의 분화구 안으로 내려가라. 그러면 지구의 중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내가 이미 이뤄냈던 일이다. 연금술사, 아르네 사크누셈.”

    윤솔은 로프를 타고 절벽을 내려가며 뭔가를 중얼거린다.

    “솔아, 뭐야 그거?”

    “응? 아아, 그냥 내가 좋아하는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구절이야. 그 소설에서도 주인공이 땅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거든.”

    암벽등반을 하며 소설 내용까지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꽤나 여유가 있는 기색인지라 나는 조금 안심했다.

    벌써 며칠째 어둠 속에서 절벽과 좁은 토굴만 나오고 있으니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지쳤을 법한데 다행스럽게도 윤솔과 드레이크는 그런 기색이 없었다.

    하기야, 우리는 이미 게임 속 동굴 탐험에 있어서는 전문가나 다름없다.

    어비스 터미널과 데린쿠유도 끝까지 정복했었고 데스웜의 땅굴 역시도 끝을 봤으니까.

    “자, 여기부터는 어두워지니까 조심해야 해.”

    나는 수직으로 꺾인 벼랑 끝에 로프를 걸었다.

    그리고 야광봉 하나를 ㄱ자로 꺾어 어슴푸레하게나마 주위를 녹빛으로 비췄다.

    절벽 아래 넓게 펼쳐진 원시 화강암층이 보인다.

    그 밑으로는 또다시 좁고 가파르며 험난한 경사로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 반쯤 먹힌 채 이어져 있었다.

    “길고 지루한 여행길이 되겠군.”

    그 말대로였다.

    원래 암벽등반이란 본인에게만 긴장감 넘치고 제3자가 보기에는 느리고 지루한 일이다.

    우리의 작업도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느껴질 공산이 큰 여정이었다.

    우선 절벽지대가 있는 원시 화강암층에 내려서 큰 바위들을 기어올라야 한다.

    동굴 내부가 워낙에 넓은지라 우리는 이 안에서도 몇 개의 작은 동굴과 절벽, 산을 타내려가고 또 때로는 타올라야 했다.

    어비스 터미널이나 데린쿠유보다 훨씬 더 깊고 복잡한, 말 그대로 지저(地底)로의 여행이었다.

    큰 바위들을 몇 개 기어 내려가다 보니 커다란 공동이 나왔다.

    바닥으로 내려가니 지름이 5미터가 넘는 구덩이들이 띄엄띄엄 나 있는 바닥이 보인다.

    구덩이의 깊이는 약 15미터 정도밖에 안 되지만 날카로운 바위들을 피해야 했기에 그 난이도는 더욱 더 높았다.

    때로는 천장까지의 높이가 1미터도 되지 않는 좁은 통로들도 있었는데 일명 ‘하얀 팝콘’이라 불리는 날카로운 조약돌들이 바닥에 깔려 있어 바닥을 엎드려 길 수도 없었기에 아주 불편했다.

    굴의 중간부터는 천장의 높이가 더욱 낮아져 허리를 ㄱ자로 굽히고 걷는 것도 점점 힘들어졌기에 우리는 일명 ‘오리걸음’이라 불리는 동작으로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가야 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이 있다면 동굴 내부의 온도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채 딱 일정하다는 것이다.

    “엇? 어진아! 저기!”

    윤솔이 좁은 틈을 빠져나오는 즉시 외쳤다.

    우리는 굴에서 빠져나와 꽤 큼지막한 공동을 발견했다.

    공동은 어지간한 대광장만큼 넓었고 주변에는 기암괴석들이 깔려 있었다.

    우리는 허리를 펴고 고개를 뒤로 젖힐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나는 윤솔이 가리킨 방향을 보고서야 비로소 지금껏 맞는 방향으로 왔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공동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나뉘는 길.

    총 다섯 군데의 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왼쪽의 두 동굴은 바위와 절벽을 끼고 굽어지다가 중간에 막다른 벽이 나오지. 오른쪽의 두 동굴은 물웅덩이로 통하고.’

    이 4개의 루트 모두 나름의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고 그것을 지키는 독특한 보스 몬스터의 서식지이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하나 탐방할 시간이 없었기에 나는 바로 중앙의 동굴로 직행했다.

    “어진아, 중앙 통로로 가는 거야?”

    “응.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아서.”

    동굴탐사가들이 으레 하는 말이 있다.

    ‘바람이 불면 가라(If it blows, it goes).’

    동굴에서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은 건너편 어딘가로 공기가 통한다는 것이다.

    이는 충분히 탐사해 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중앙 동굴 깊숙이 진입했다.

    길은 지금까지의 여정에 대한 보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평탄했다.

    대부분의 통로가 허리를 펴고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높이 이상이었고 기어 올라가기 좋은 완만한 경사의 바위, 뾰족하지 않고 둥글둥글한 종유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얀 팝콘들도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기에 어쩌다 좁은 틈이 나올 때에는 기어서 통과하는 것도 가능했다.

    “앞에 물웅덩이가 있어. 숨 참아.”

    나는 녹색 불빛을 앞으로 비추며 말했다.

    이윽고, 엎드려 기어가는 우리의 손끝에 차가운 습기가 닿는다.

    동굴을 탐험하다가 잠수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기에 아무도 당황하지 않았다.

    꼬르륵…

    차가운 물이 점점 팔과 배, 다리를 적시다가 이제는 턱 끝을 넘어 이마까지 차올랐다.

    우리는 엎드려 기다가 잠시 몸을 엎드려뻗쳐 자세로 들어 올려 숨을 쉬고 다시 머리를 물속에 파묻어야 했다.

    마치 숨을 쉬러 수면으로 올라오는 금붕어처럼.

    “이런 때 몬스터라도 나타나면 대처하기 힘들겠는데.”

    드레이크가 입안에 들어간 물을 뱉어내며 말했다.

    내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순간, 눈앞에 새로운 알림음이 들려왔다.

    -띠링!

    <히든 던전 ‘전쟁군주의 지하대분묘(地下大墳墓)’를 발견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영구히 기록됩니다>

    그러자 윤솔과 드레이크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여기가 끝 아냐? 이제 막다른 길 같은데?”

    “히든 던전이 어디 있다는 거지? 여기서 어떻게 더 전진하나?”

    의아할 만하다.

    우리는 물이 약간 고여 있는 공동 끝자락에 있었고 이곳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막다른 길이었으니까.

    ……하지만.

    “여기 있지.”

    나는 언뜻 보기에 막다른 벽으로 보이는 곳에서 다음 스테이지로 향하는 문을 찾아냈다.

    그것은 오른쪽 뺨이 바닥에, 왼쪽 뺨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좁고 협소한 바위굴이었다.

    심지어 그 깊이가 어디까지 닿아 있을지도 모르는 좁은 굴, 아니 굴이라기보다는 틈에 더 가까운 영역이다.

    졸졸졸졸…

    나는 그곳에서 차가운 물과 함께 약간의 바람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찾았다. ‘플로이드의 무덤’.”

    이제 묘지를 열어 ‘대멸종의 어머니들(Mothers of All Mass Extinctions)’을 깨울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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