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93화 (693/1,000)

693화 병신과 머저리 (3)

“자리요.”

내 말을 들은 모든 고렙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핼쑥해진다.

‘자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 설명한 버스나 택시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개념이다.

(※주의! 콜로세움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자리’란 기본적으로 사람이나 물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뜻한다.

현실에서 쓰이는 ‘자리’라는 단어의 뜻은 상당히 애매한데 ‘여기 자리 있어요’와 ‘여기 자리 없어요’의 뜻이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여기 자리 있어요=장소의 주인이 없다 or 다른 누군가가 곧 차지할 장소이다

(예를 들어 식당 주인이 손님을 맞이할 때와 교실에서 친구의 자리를 맡아 줄 때가 서로 용례가 다르다)

여기 자리 없어요=다른 누군가가 이미 차지한 장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리라는 단어가 이런 식으로 쓰일 때는 기본적으로 약간의 분쟁 요소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것이 온라인 게임 속에서는 조금 더 분쟁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여러 사람들이 공용으로 사냥하는 인기 사냥터에서는 사냥꾼이 사냥감보다 많아서 원활한 사냥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그래서 ‘자리’ 문화가 생겨났는데 이 문화의 핵심은 사냥터를 선착순으로 점거하는 것이다.

먼저 온 사람이 사냥터의 일정 구간을 먼저 점거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의 사냥을 방해하지 않고 일정 영역을 그의 자리로 인정해 주는 암묵적인 룰, 심지어 자리를 맡은 사람은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고 팔기도 한다.

물론 자리 문화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리가 있든 없든 모두가 이용하는 게임인데 내 것 네 것이 따로 어디 있냐며 의문을 품는다.

그래서 자리가 있든 없든 그냥 사냥을 하게 되고 자리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들과 마찰을 겪게 되는 것이다.

오픈필드 게임의 영원한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내 말을 들은 대머리 플레이어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자리? 하! 이 새끼가 돌았나 진짜.”

그는 칼을 빼들고 칼끝으로 내 가슴팍을 콕콕 찔렀다.

물론 뒤에 있는 형이란 작자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지만 그는 보지 못한 모양.

“야, 뭔 또라이야 이거. 자리 같은 소리하네. 묫자리 파 줄까 아주?”

“하지만 여기는 내 자리인걸?”

“미친놈이네 이거 진짜. 개미랑 벌 한 마리도 제대로 못 잡을 것 같은 게. 아니, 어디부터 어디까지 니 자리라는 건데?”

대머리의 가시 돋친 질문에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내가 중지 손가락을 들어 그은 범위는 이 드넓은 대군락지대 전체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자 내 앞에 있던 뉴비들이 개미와 벌 등에 문신을 새기던 것을 멈추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하, 이 새기 이거 뭐하는 새기지 진짜.”

“뭐지? 죽고 싶다는 건가?”

“변변찮은 장비도 없는 놈이 뭔 자신감이래.”

게임을 막 시작한 뉴비들이라 그런가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모양.

하지만 택시나 버스 존에서 그들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던 중렙에서 고렙 사이의 유저들은 하나같이 나를 알아봤는지 핼쑥해진 표정으로 덜덜 떨고 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레벨 20 이하까지는 뭔 짓을 해도 귀여울 레벨이지. 걱정 마.”

그러자 저렙 유저들은 뭔 소리냐는 듯 코웃음치거나 표정을 구긴다.

하지만 고렙 유저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데 말이야.

나는 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보호자들은 책임을 져야겠지?”

그리고 바로 응징이 시작되었다.

뙇!

거꾸로 쥐어진 깎단이 야구배트처럼 허공을 가른다.

대머리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던 형의 머리통을 향해서.

…우그적!

철 투구가 움푹 들어가는 소리.

동시에 형이란 작자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살려 줘요! 이번에 죽으면 진짜 안 된단 말예요! 엄마 몰래 현질해서 산 아이템들인데! 떨구기라도 하면……!”

뭐야, 보니까 초등학생 같은데?

하지만 현실에서는 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 나이의 촉법소년이라고 해도 게임에서는 어엿한 고렙 유저이다.

사회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이다.

나는 깎단으로 녀석의 왼쪽 옆구리를 때렸다.

턱-

처음에는 살살, 부드럽게.

그러자 손쉽게 내 공격을 막은 녀석의 얼굴에 작은 희망이 번진다.

나는 녀석의 자신감을 북돋아 줬다.

“어쭈, 이걸 막아?”

휙- 턱-

빠르게 깎단을 등 뒤로 돌려 오른쪽 옆구리를 가격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주 살살, 약하게 때린지라 놈은 내 공격을 방어해 낸다.

“……히익! 뭐야!?”

“오? 이것도 막네?”

“히…히히힛, 막아 보니 별거 아니잖아!”

“그럼 이것도 막아 보렴.”

후욱-

이번엔 깎단이 정수리를 향한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하지만 놈은 양손바닥을 마주해 내 깎단을 잡았다.

‘칼날 잡기’를 시전한 것이다.

“헤헤.”

녀석의 표정은 이미 오만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고인물이라는 녀석도 별게 아니잖아? 아니지, 이놈이 별것도 아닌 게 아니라 내가 더 대단한 건가? 이봐, 방금 봤어들? 내 컨트롤 쌉지리지 않았어?”

그러자 그의 등 뒤에 고렙유저들이 하나같이 그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히, 힘내, 새꺄! 승산 있어!”

“저놈 별거 아냐!”

“이제 보니 편집빨이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역시 뉴비란 재밌어.’

모름지기 진정한 절망은 지고의 희망 끝에 오는 법이다.

휘익- 탁!

나는 이번에도 막을 수 있는 공격을 날렸다.

하지만 녀석의 반응이 이상하다.

“……끙!”

아마 손목이 꽤나 아플 것이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힘을 실었으니까.

“이거 살짝 아프…….”

조금 전보다 아프다고 말하려는 순간, 등 뒤에서 또다시 응원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오! 또 막았어! 또!”

“잘한다! 야 니가 그냥 방송해라!”

“고인물은 니가 고인물이었네! 너 1000시간이나 했잖아!”

녀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 그런가?”

아무래도 방금의 고통을 환각통 쯤으로 생각하는 모양.

나는 슬슬 깎단을 제대로 쥐기 시작했다.

“왼쪽!”

“막았다!”

“오른쪽!”

“막았다고! 아야!”

“왼쪽…인 척하면서 오른쪽!”

“마, 마, 마, 막았다!”

“왼쪽…인 척하면서 오른쪽…인 척하면서 왼쪽!”

“아악! 그냥 그건 왼쪽이잖아!”

“말하는 틈을 타 오른쪽!”

“막았…어억!? 내 팔이 왜 이래!”

“집중해! 오뢴쪽!”

“그건 어디야!”

“오른쪽에서 왼쪽 사이를 말하는 거란다.”

“그런 말이 어디 있냐고!”

“오른쪽 말고 왼쪽 말고 오른쪽에서 30cm 밑 허벅지 말고 왼쪽 옆구리 말고 정수리…에서 미간 훑고 쭉 내려서 명치.”

“푸허억!”

“왼왼오, 오오오왼, 왼오왼외.”

“……그만! 내 팔이!”

녀석은 절규하고 있지만 내 깎단이 내지르는 풍압에 비명은 모조리 삼켜지고 있었다.

그 결과.

“대단하다, 형근아!”

“저걸 어떻게 다 막은 거야!”

“피지컬 미쳤어!”

“극한의 효율충이다. 아주 조금 움직여서 공격 궤도를 모두 막았다고!”

같은 무리의 고렙 유저들은 흥분해 날뛰기 시작했다.

반면 형근이라는 이 초딩은 울상이 되었다.

이미 팔이 너덜너덜해졌기 때문이다.

“잘 막네.”

“……부파만은 제발.”

부파.

부위 파괴의 준말.

특정 부위에 기준 이상의 데미지를 입히면 해당 부위가 파괴되는 것을 뜻한다.

실제 K.O 데미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데미지(약 수백 배)를 한 부분에 주어야 하기 때문에 실전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기술.

이 기술의 용도는 오직 하나 뿐이다.

농락(籠絡).

나보다 압도적으로 약한 상대를 못살게 구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란 말이지.

“히익!”

형근이가 비명을 지른다.

퍽! 퍽! 퍽! 퍽!

나는 아랑곳 않고 깎단을 들어 녀석의 몸 군데군데를 마구 후려쳤다.

“자아- 이리로 오도로(참치 뱃살), 저기로 쥬도로(참치 중뱃살), 이리 와 엔가와(광어 지느러미), 가만있어 가마도로(참치 목살), 메챠쿠챠 메카도로(황새치 뱃살), 아주 오마카세로 패 줄게, 나만 믿어.”

마침내 형근이의 두 팔이 축 늘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부들부들 떨리는 두 동공은 허공을 향한다.

-띠링!

[‘손목 관절’이 부위 파괴됩니다. 3일 동안 가용 불능 상태가 됩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부파 메시지가 뜬 모양이지.

“잘 막네. 역시 고수님이시다.”

녀석의 두 팔, 정확히 손목 관절은 ‘부위 파괴’ 상태에서 회복되려면 3일이 걸린다.

그사이에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컨트롤 불가 부위가 되어 신체에 달려 있을 뿐, 차라리 없으니만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이러면…….”

이윽고, 형근이는 무릎을 꿇고 그대로 엎어져 버렸다.

완전히 회쳐지듯 발려 버린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것이다.

후두둑- 후두둑- 쿵!

설상가상, 장비하고 있던 아이템들까지 모두 파괴되자 그의 알몸이 새하얗게 드러났다.

정말 간신히 목숨만 건진 모양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형으로 모시고 있던 대머리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이제야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챈 모양.

나를 모르는 저렙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믿는 구석에게 도움을 청하기 바쁘다.

“뭐야 저 팬티맨은!? 왜 저렇게 쎈데!?”

“기사님! 빨리 저놈 좀 어떻게 해 주세요!”

“형! 도와줘! 형이 우리 학교에서 제일 싸움 잘하잖아!”

하지만 나를 아는 대부분의 중고렙 유저들은 애초부터 전의를 상실한 상태이다.

잠시나마 어떻게든 비벼 보나 했지만, 바로 앞에서 플레이어 하나가 부파(부위 파괴) 당한 뒤 장파(장비 파괴)까지 당한 꼴을 목격했으니 말이다.

그들은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가자, 고인물이 자리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어.”

“너 임마, 누구한테 시비를 건 거야!? 저 인간, 진짜 무시무시한 놈이라고!”

“우리 전부가 덤벼도 못 이겨. 저 괴물은…….”

든든한 뒷배였던 고렙 유저들이 이런 말을 하자 저렙 유저들도 슬슬 상황 판단이 되는 모양이다.

그때, 나는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정중하게 말했다.

“자 여러분들, 제가 자리를 주장하는 이유는 별 거 없어요. 다 여러분들을 위한 겁니다.”

그 말에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지금 이렇게 강짜를 부리며 모든 이들을 내쫓고 있는 주제에 웬 착한 척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어진 내 말에는 확실히 일리가 있다.

“여기는 기껏해야 벌과 개미밖에 안 나오는 사냥터인데 레벨 90이 넘어가는 제가 여기를 독점해 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안 그래요?”

그 말에 고렙 유저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개중 한 유저가 물었다.

“택시나 버스 사업을 독점하려고 하는 거 아닌…가요?”

“저 돈 많습니다. 유토러스에서 제가 개최한 파티 모르세요? 제가 그날 뿌린 돈 한 번도 안 주워 보신 인간 유저 분 이 자리에 계십니까?”

그러자 다들 눈치만 볼 뿐 말이 없다.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맞아, 저 사람 돈 많잖아.”

“히익! 레벨이 90이 넘어? 그런데 왜 이 저렙 사냥터를 독점하려는 거지?”

“여기서 자리를 주장할 이유가 없는데?”

다들 의아한 기색으로 수군거린다.

나는 쐐기를 박았다.

“말했잖아요. 여러분들을 위해서라고.”

그 말에 모든 시선들이 나를 향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이 사냥터는 곧 초고렙들을 위한 사냥터로 바뀝니다. 리젠되는 몬스터들이 엄청나게 강하고 포악해질 거예요.”

“엥? 왜요?”

“……흠, 그야 저도 모르죠. 아마 앙신 조디악의 행패가 아닐까 합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이럴 때 조디악의 악명을 팔아야지 어쩌겠어?

…바로 그때.

파사삭-

덤불이 세차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이밍이 좋았다.

내가 막 약을 판 순간, 일찍이 내 부탁을 듣고 움직였던 드레이크가 은밀하게 대군락지대로 되돌아온다.

[크워어어어어어억!]

[그-아아아아아!]

[시리리릭! 킥!]

폭발열매, 식인뿌리, 융해끈끈이, 살육잎사귀 등등…….

그린헬의 고위 몬스터들을 우르르 몰고 말이다.

“저런, 그래서 제가 아까부터 경고드린 건데.”

나는 기겁해서 도망치는 플레이어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알아서들 잘 살아남아 보세요.”

아마 불가능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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