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2화 병신과 머저리 (2)
예전에 아마 게임 속에서 ‘버스(Bus)’라는 개념에 대해 말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버스란 무엇이냐?
본래 승합마차를 뜻하는 옴니버스(omnibus)에서 나온 이 단어는 정원 11명 이상의 합승 자동차를 의미하지만 게임 상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인다.
흔히 게임을 잘 하는 사람이 못 하는 사람 대신 열심히 뛰어서 끌어 주는 것을 ‘버스 태워 준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실력이 부족하니 잘 하는 사람에게 얹혀서 버스에 타는 것처럼 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택시(Taxi)’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일반적으로 고렙 유저가 저렙 유저들을 데리고 멀고 험난한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는 것을 뜻한다.
……이제 여기에 버스와 택시를 자처하며 대기하고 있는 고렙 유저들의 존재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들은 이제 막 초보자 마을을 벗어난 레벨 10~20대의 저렙 유저들을 이곳 대군락지대로 데려오는 것으로 소소하게 용돈벌이를 하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하, 진짜. 다음 레이드 뛰려면 소모품이 엄청 필요한데… 여기서 택시비로 빡세게 벌어서 충당해야지.”
“그래, 여기서 버스로 돈 벌고 자금 모아서 크게 한 탕 하자고. A급 몬스터 한 마리만 잡아도 노 난다.”
“나는 원래 그린헬 가려고 했는데 그냥 오는 길에 카풀 한번 해 본 거야. 돈 없어서 택시알바 뛰는 거 아냐~ 지금이라도 그린헬 가서 사냥할 수 있…… 앗, 고객님! 어서 오세요! 중앙대륙으로 돌아가시려고요? 유토러스까지 안전하게 모십니다. 80만 골드만 주십셔.”
고렙들 중 가난한 이들이 레이드 자금, 혹은 용돈을 벌기 위해서 커다란 탈 것을 가지고 와 승객을 모집한다.
특이하게도 이런 택시나 버스 존에서는 오크와 리자드맨, 인간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그냥 종족 구분 없이, 심지어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돈만 주면 어디로든 데려다 주는 식이다.
(확실히 돈 앞에서는 차별이 없다)
저렙 유저들 역시 혼자서는 ‘고기 삶는 밀림’이나 ‘육중한 밀림’을 통과할 수 없었기에 올 때나 갈 때나 꼭꼭 택시와 버스를 탄다.
초보자가 골드를 많이 소지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현질뿐이기에 이곳에 택시비를 내고 오는 저렙 유저들은 대부분 현실에서도 돈푼께나 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휴, 저번에 길 안다고 혼자 오다가 오우거 만나서 죽을 뻔했잖아.”
“나는 길 헷갈려서 그린헬로 들어가는 바람에 식인뿌리랑 폭발열매 만나서 바로 죽었어. 렙따 패널티 어쩔거야~ 엄마한테 다일러~”
“빨리 레벨 올려서 이딴 쓰레기 몹들 좀 졸업하고 싶다. 현질 좀 더 박아야지 뭐, 크크크-”
레벨이 높은 유저들이나 레벨이 낮은 유저들이나 서로 각자의 필요에 의해 이곳 대군락지대를 찾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필드의 몬스터를 진지하게 잡는 이는 없었다.
고렙 유저들은 개미와 벌을 사냥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 취급하고 있었다.
저렙 유저들은 개미와 벌을 얼른 졸업해야 할 귀찮은 허들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빨리 돈 모아서 더 돈 되는 몬스터 잡으러 가야지. 이딴 쓰레기들 말고.”
“빨리 레벨 올려서 크고 간지나는 몹 사냥하러 간다. 이딴 허접몹들 말고.”
그래서일까?
개미와 벌들은 엄청나게 많았지만 그만큼 엄청나게 많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리젠되면 죽고, 또 리젠되면 또 죽고.
어떤 유저들은 의무감에, 어떤 유저들은 재미로, 어떤 유저들은 짜증을 담아, 어떤 유저들은 아무 생각 없이 벌과 개미를 죽인다.
물론 그들 중 죽어 가는 벌과 개미들의 눈을 쳐다보는 이들은 없었다.
언제나 더 먼 곳, 더 높은 곳을 향해 있는 시선들.
경험치 노가다가 으레 그렇듯, 그저 최대한 빨리빨리 해치우고 기계적으로 다음 사냥감을 찾을 뿐이다.
그것을 본 윤솔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뭔가 너무한 것 같다. 내가 게이머로서 조금 적응이 부족해서 그런가? 벌과 개미가 아무리 약한 몬스터라고 해도 개발자들이 정성들여 만든 프로그램들인데. 그래도 조금쯤은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사냥을 해야 하는 게 아닐는지…….”
“…….”
나는 팔짱을 꼈다.
그리고 윤솔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사냥터 전체를 관조했다.
그때.
아까 내 어깨를 치고 갔던 대머리 유저가 동료들과 한데 모여 킬킬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놈은 친구들과 함께 개미 한 마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후후후, 이제 경험치도 잘 안 주네 이 자식들. 아니, 내가 너무 강해진 건가?”
“우리도 이제 개미랑 벌 졸업할 때 됐지. 대형 거미나 파충류 잡으러 가자!”
“맞어, 이딴 쓰레기들이나 잡으려고 이 게임 한 거 아니니까.”
저렙 유저들은 킬킬 웃으며 칼을 들었다.
그리고 개미를 쳐 죽이는 대신 개미를 옴짝달싹 못 움직이게 해 놓고는 개미의 등갑에 칼로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이재웅 왔다감^^
그 옆에 있던 고렙 유저들은 낄낄 웃었다.
“오? 몬스터 등에 낙서하기 콘텐츠인가?”
“재밌겠네. 나도 뭐 써야지.”
“저기 벌 하나 잡아 와 봐. 네임드 몬스터로 만들어 줘야지~”
그들은 승객을 기다리다가 무료함을 참지 못했는지 지나가는 벌 한 마리를 붙잡아 왔다.
치이이익-
이윽고, 고렙 유저들은 벌의 등에 담배꽁초를 비벼 끄며 자국으로 문신을 새기기 시작했다.
-이형근♡홍선표 우리 사랑 영원하길
눈 뜨고 봐주기 힘든 문신들이 새겨진다.
바동바동-
벌과 개미들은 저항했지만 자기들보다 훨씬 더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들에게 저항할 수는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플레이어들이 이렇게 레벨이 높아지게 된 것은 개미와 벌 덕분이지만 말이다.
추욱…
이윽고, 더듬이가 떨어지고 배에 화상을 입은 개미와 벌이 바닥에 늘어져 버렸다.
HP가 다 되어 죽은 것이다.
“어? 에이 벌써 죽었어?”
“되게 약하네.”
“아, 낙서된 채로 돌아다녀야 재밌는데.”
플레이어들은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벌과 개미의 시체를 걷어찼다.
툭- 데굴데굴…
전리품으로 빨간색 포션 병 하나가 떨어졌지만 플레이어들은 아무도 그것을 줍지 않았다.
“야, 빨포 나왔다, 누가 주워 먹어라.”
“장난? 인벤토리만 차지하잖아.”
“고급 포션도 많은데 이딴 싸구려 포션을 누가 먹어.”
플레이어들은 빨간 포션이 담긴 병을 발로 탁 차서 날려버렸다.
그렇게 쓰레기처럼 버려진 빨간 포션들이 맵 도처에 가득했다.
‘……쩝.’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한때는 저런 빨간 포션들도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야 게임이 출시된 지 시간이 좀 흘렀고 고급 포션류가 시장에 많이 풀렸기에 초보자라 해도 돈푼께나 있으면 얼마든지 좋은 포션을 구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물량 자체가 얼마 없었기에 빨간 포션도 굉장히 귀한 대접을 받았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올드 아이템은 한 물 갔다.
가도 많이 가 버렸다.
이렇게 쓰레기처럼 맵 도처에 널브러져 있을 정도면.
이윽고, 플레이어들은 또다시 길 가던 개미와 벌을 잡아와 괴롭히기 시작했다.
더듬이를 자르고 날개를 찢고 다리를 떼고… 어딜 봐도 경험치나 아이템을 얻기 위한 사냥은 아니다.
그냥 재미삼아 죽이는 것이지.
그것은 투쟁이나 사냥이 아니라 학대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곤충을 잡아 죽이는 어린이처럼, 아무 생각 없이 쪼렙 몹을 잡아 죽이는 뎀린이.
물론 나도 종종 유희삼아 아카오니 등의 보스 몬스터를 잡기는 하지만 그것은 시청자들에게 사냥 방법을 강의하기 위해 트렌디한 유머 코드를 차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개미와 벌에게 비뚤어진 폭력욕구를 해소하는 눈앞의 저 유저들과는 다르다는 말씀!
나는 앞으로 한 발 나섰다.
그리고 아까 시비가 붙었던 대머리를 향해 물었다.
“왜 사냥하지도 않을 거면서 몬스터를 괴롭히냐?”
그러자 새로운 개미를 붙잡아 더듬이에 담배꽁초를 눌러 끄고 있던 대머리가 고개를 돌렸다.
“뭐야, 너 아직도 안 갔냐?”
대머리와 그 동료들이 낄낄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놈들은 내게 물었다.
“너는 쓰레기 버릴 때 쓰레기통에 대고 농구한 적 없냐? 쓰레기 가지고 제기차기 한 적 없어? 그런 거지~”
“그래도 지금의 너를 있게 만들어 준 몬스터인데 그러면 안 되지.”
“와, 뭔 꼰대짓이야 이게? 내가 살아 있는 생물한테 이랬나? 게임 속 프로그램한테 그러는 거지. 과몰입 노노해~”
대머리와 그 친구들은 나를 향해 짜증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는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협박을 늘어놓았다.
“너 아까부터 자꾸 눈에 밟히는데… 앞으로 여기서 사냥 못 하게 되는 수가 있다?”
“…….”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카르마 쌓기 싫으니까.”
대머리는 칼끝으로 내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나는 놈에게 물었다.
“여기서 사냥을 못 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네가 어떻게? 너 레벨도 낮아 보이는데.”
“……허, 쪼렙용 가죽갑옷도 없어서 알몸으로 다니는 너만 할까?”
아무래도 눈앞의 이놈들은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를 모르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천연기념물이라고 봐야겠지?
그때.
대머리가 고개를 돌리더니 누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형! 이리 좀 와 봐! 나한테 시비 터는 놈 있어!”
그리고는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음흉하게 킥킥댄다.
“내가 아는 형이 레벨 진짜 높거든? 거기에 그레이 시티 출신이라 카르마 수치 같은 것도 안 따져. 넌 이제 뒤졌다.”
아무래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 지금까지 이곳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활보하고 다녔던 모양이다.
이윽고, 대머리의 부름을 받은 형이란 존재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꽤나 고렙인지 대형 도마뱀을 탈것으로 끌고 다니는 버스 운전사인 모양.
대머리는 형이라는 이에게 짐짓 억울한 척을 하며 매달렸다.
“형, 형이 우리 학교에서 제일 레벨 높지? 얘 좀 혼내 줘.”
그 말에 고렙 유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쪽을 향해 다가온다.
하지만.
애초에 이 게임을 좀 해 봤다는 사람 치고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그레이 시티 출신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내 얼굴을 확인한 즉시 고렙 유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허윽!? 고, 고, 고인물!?”
고렙이라고 해 봐야 기껏해야 레벨 40이 될까 말까한 수준, 레벨이 95인 나에 비하면 반딧불과 태양의 차이이리라.
하지만 눈치 없는 대머리는 계속해서 형에게 찡찡거린다.
“혀엉~ 이 자식이 아까부터 나 귀찮게 한다니까! 죽여서 사망 패널티 좀 먹여 줘!”
“…득츠.”
“으응?”
“…득츠르그.”
고렙 유저는 대머리에게 이를 악물고 속삭인다.
내 눈치를 보며 달달 떠는 것이 아무래도 죽으면 떨구게 되는 중요한 아이템들을 소지하고 있는 모양.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윤솔에게 말했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다 나가달라고 해야겠어.”
“응? 그게 될까?”
윤솔은 의아한 표정이다.
무슨 수로 이 넓은 필드의 이 많은 사람들을 내쫓겠다는 걸까? 싶은 기색.
하지만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되면 되게 해야지.”
나는 깎단을 거꾸로 꼬나쥐고 대머리와 그놈의 형에게 바짝 다가갔다.
“버스와 택시의 개념도 알고 있으니 이 개념도 알고 있을 테지?”
“……?”
내 말을 들은 대머리의 표정이 찡그려진다.
무슨 개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표정.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었다.
대상은 이 드넓은 필드 전체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
이윽고, 그들을 모두 필드 밖으로 쫓아낼 수 있는 마법 주문 같은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온다.
“자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