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1화 병신과 머저리 (1)
내가 목적지로 삼은 곳은 서대륙의 깊숙한 곳이었다.
‘고기 삶는 밀림’을 지나 ‘육중한 밀림’, ‘항구도시 아크레’를 거쳐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가면 푹푹 찌고 습할 뿐만 아니라 빽빽하기까지 한 정글로 접어들게 된다.
안개가 끼는 날에는 바다 저 멀리 여덟다리 대왕의 영역 부유섬이 보이는 이곳은 일명 ‘그린헬(Green Hell)’.
녹색 지옥으로 통하는 고대의 숲지대로 대격변에도 불구하고 그 푸르른 기세가 조금도 죽지 않은 거대한 원시림이다.
나는 지금 이곳 그린헬의 맞은편에 있는 남서쪽의 습지대로 향하고 있었다.
‘대군락지대(大群落地帶)’라 불리는 거대한 흙산과 버섯 숲이 있는 구역이었다.
막 파헤쳐진 것처럼 붉으죽죽한 흙들이 산을 이루고 검푸른 버섯들이 수없이 피어나 계단을 이루고 있는 구릉지대.
고기 삶는 밀림과 육중한 밀림을 뚫고 와야 하는 곳이니만큼 꽤나 진입장벽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인기 사냥터이다.
“야! 빨간 포션 남았냐?”
“빨리 잡고 가자. 노가다도 이제 지겨워~”
“나 아직 일일퀘 남았어. 잠깐만!”
“우와! 몬스터 진짜 많다! 완전 꿀 자리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버섯을 밟고 흙산을 오른다.
대부분 조악한 갑옷과 무기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레벨 플레이어 같았다.
윤솔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와아, 사냥터 레벨이 꽤나 높을 것 같은데… 레벨이 낮은 사람들이 많네?”
“아냐. 여기 사냥터 레벨 의외로 엄청 낮아.”
나는 윤솔의 의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레벨 10에서 15사이의 플레이어로 이제 막 튜토리얼을 완료한 이들이 많다.
사냥터에 돌아다니는 몬스터들 역시도 우리가 익히 하는 초보자용 몬스터들이었다.
<살육 벌> -등급: D / 특성: 독, 벌레, 군락
-크기: 1m.
-서식지: 전 대륙.
-덩치는 크지만 느린 벌.
날개를 움직이는 속도조차 느려 높이 날 수도 없다.
양 앞다리와 꽁무니에 붙어 있는 송곳 끝에는 맹독이 감돌고 있다.
<살육 개미> -등급: D / 특성: 독, 벌레, 군락
-크기: 1m.
-서식지: 전 대륙.
-덩치는 크지만 느린 개미.
다리를 움직이는 속도조차 느려 빨리 뛸 수도 없다.
양 앞다리에 붙어 있는 방패 끝에는 맹독이 감돌고 있다.
이 세계관에서 가장 흔하고 가장 약한 보급형 몬스터.
아마도 벌과 개미 한 마리 안 잡아 본 플레이어는 없을 것이다.
“와, 엄청 북적거린다.”
“그러게. 사람이 진짜 많군.”
윤솔과 드레이크는 새삼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앙대륙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숲인데다가 중간중간 꽤나 위험한 사냥터들도 많아서 초보들이 오기 힘들 것 같은데 다들 용케도 찾아왔다.
아니, 그에 앞서 더 의아한 것은 왜 하필 이런 외진 곳에 초보자용 사냥터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서쪽 대륙 가장 깊숙한 곳에 외떨어져 있고 접근도 힘든 만큼 고레벨 몬스터들이 도사리고 있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어째서 가장 약해빠진 몬스터들이 드글거리는 걸까?
용사와 마왕의 흔한 동화에 비유하자면 점점 강해지는 몬스터들을 뚫고 최종 스테이지에 들어갔더니 스켈레톤이나 슬라임 같은 1레벨 몬스터들이 뽈뽈뽈 돌아다니고 있는 꼴이다.
“…….”
나는 친구들의 의문을 뒤로한 채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툭-
나는 한 대머리 플레이어와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장비로 미루어 짐작컨대 레벨이 한 15 정도는 될까?
그는 한껏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야 이 새끼야,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녀.”
……오? 오랜만에 걸려 보는 길거리 시비다.
그레이 시티에서 시비 거는 놈들을 한 715명가량 쳐 죽인 이후로는 처음인가?
원래 먼저 싸움은 걸지 않지만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날뛰지 않았다.
내 얼굴도 모를 정도면 정말 이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뉴비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귀여워.’
뉴비는 사랑인 법.
레벨 10이하는 촉법소년이나 다름없고 20이하는 사회초년생이나 다름없으니 봐준다.
그때.
…파앗!
내 어깨를 치고 간 대머리 플레이어가 허리춤의 칼을 빼들고 갑자기 나를 공격해 왔다.
물론 너무나도 느린 동작이었기에 나는 굳이 피하지 않고 눈만 끔뻑거렸다.
저 정도는 속눈썹으로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웅-
대머리는 갑자기 칼의 궤도를 바꾸더니 내 볼을 스치게끔 휘둘렀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를 공격했다.
우직-
단단한 외골격이 부서지는 소리.
D급 몬스터 살육 개미가 칼에 맞아 나자빠졌다.
그는 칼에 묻은 개미 체액을 닦으며 씩 웃었다.
“쫄았냐?”
나는 순간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사실 내가 보기에는 눈앞의 대머리 유저나 그 옆을 지나다니는 개미나 그게 그거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개미가 ‘야 덤벼!’라고 시비를 건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평소에 싸운다는 것을 상상해 본 적도 없을 만큼 약한 존재에게 이런 도발을 듣는다면 기가 막히는 것을 넘어 우습기까지 하다.
내가 웃음을 참으며 가만히 서 있자 대머리 플레이어는 내가 무서워한다고 생각했는지 내 볼을 툭툭 치고는 돌아섰다.
“앞으로는 눈깔 똑바로 뜨고 다니라고. 고수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나는 게 이쪽 바닥이니까.”
그 말에 담긴 패기에 나도, 윤솔도, 드레이크도 깜짝 놀라 버렸다.
한편.
내 어깨를 친 대머리 플레이어는 이내 다른 개미와 벌을 잡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투덜거리면서.
“아 씨, 간지 안 나게. 빨리 레벨업해서 좀 멋있는 몬스터 잡아야지. 이 따위 쓰레기들 말고…….”
하지만,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내가 옆에서 참견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쓰레기 같은 건 없어.”
언젠가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유다희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내 충고를 들은 대머리 플레이어는 개소리라도 들은 듯 표정을 구겼다.
“뭐야? 장비도 제대로 못 걸친 허접이 누구한테 충고질이야?”
대머리는 아마 내 알몸 룩을 보고 기본 갑옷조차도 걸치지 못한 뉴비라고 여기는 듯했다.
게임에서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뉴비가 맞다 싶었다.
나는 오래 전, 메두사 레이드 직전에 했던 말들을 그대로 다시 끄집어냈다.
“현실 세계에서야 쓰레기들이 넘쳐난다지만, 적어도 이 게임 속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서는 그런 게 없어. 다 무언가 쓸모가 있어서 만들어진 것들이라는 소리지.”
D급 몬스터 중 최약체라고 평가받는 살육 벌과, 살육 개미.
이것들은 다른 몬스터들의 먹이가 되어 게임 속 생태계가 돌아가게끔 한다.
생태계 안에 존재하는 생물 개체수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이 존재들이 사라진다면 아마 세계는 순식간에 멸망하겠지.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고.’
나는 옆으로 지나가는 살육 벌과 개미를 쳐다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살육 개미. 그리고 살육 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 하찮은 생명체들에 의해 대격변이 일어난다는 것을 누가 알까?
그것도 세 번의 대격변 중 가장 끔찍하고 무시무시하다는 두 번째 대격변이 말이다.
‘뭐, 하지만 그건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 인 줄 알았는데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네?’
나는 회상을 마치고는 다시 눈앞에 대머리 플레이어를 쳐다보았다.
“이 벌과 개미들이 약해빠진 기본 몹이긴 해. 하지만 모든 랭커들의 시작에는 이 녀석들이 있었지. 벌과 개미를 잡지 않고 높은 레벨까지 올라간 플레이어는 없어. 어떻게 보면 지금의 너를 만들어 준 것도 이 벌과 개미들이란 말야. 너도 다 이 녀석들 잡으면서 컸잖아?”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 했다.
크고 멋진 몬스터를 픽픽 거꾸러트리는 최상위권 랭커들도 다 뉴비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도 그때 목검이나 가죽 갑옷 등 조악한 장비에 의지한 채 여기에 있는 이 벌과 개미들을 잡아 레벨 업 해 왔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 있는 벌과 개미들을 쓰레기 취급하는 것은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 꼴일 수밖에.
하지만 눈앞에 있는 대머리 플레이어는 전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아 뭔 개소리야, 진지충 새끼. 에코파시스트도 아니고. 카르마 쌓일까 봐 그냥 간다, 운 좋은 줄 알아. 성질대로면 확 마 그냥.”
그는 내게서 멀어지며 길 가던 개미 한 마리를 발로 아무렇게나 퍽 걷어찼다.
움직임이 느린 개미가 미처 뭔가를 하기도 전에 대머리는 홱 가 버렸다.
“진짜 더럽게 많네, 이 쓰레기들은. 아아- 빨리 용이나 악마 같은 것 잡고 싶다!”
계속해서 투덜거리면서.
한편.
필드를 발발발 돌아다니는 벌과 개미들의 수는 여전히 정말 많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잡는 뉴비들도 정말 많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잉, 요즘 뉴비들은 당최 기본 몹에게 고마워할 줄을 몰라요. 라떼는 말이야~”
“어진, 약간 꼰대 같다.”
“크크크, 그래도 나는 어진이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드레이크와 윤솔 역시 뉴비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주변에 수북한 흙더미와 토굴들, 엄청난 규모로 번식해 있는 버섯들의 군락지를 살피던 윤솔이 다시 한번 의문을 표한다.
“그런데 진짜 잘 이해가 안 돼. 어떻게 저렇게 레벨이 낮은 플레이어들이 이 멀리 떨어진 대군락지대까지 올 수 있었는지 말야. 중간에 있는 ‘고기 삶는 밀림’이나 ‘육중한 밀림’에는 먹깨비 개구리나 하피 퀸, 트윈헤드 오우거 같은 강력한 몬스터들이 많이 서식하잖아. 걔네들을 어떻게 뚫고 왔지?”
하지만 굳이 내가 대답해 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정면을 향해 슬쩍 눈짓했다.
“……!”
그러자 윤솔 역시도 내가 가리키는 것이 뭔지 금방 알아들었다.
그곳에는 낙타나 말, 도마뱀을 타고 있는 몇몇 플레이어들이 무료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택시요~ 택시~ 개미굴에서 초보자 마을까지 99만 골드~”
“버스 모집합니다! 30명 다 차면 출발요~ 청소년은 깎아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모범 택시입니다! 개미굴 광장에서 초보자 마을까지 단돈 100만 골드! 왕복으로 오시면 할인해 드려요! 심야할증이나 맵외할증도 안 붙어요!”
장비나 탈것으로 보아 꽤나 레벨이 높아 보이는 플레이어들로 굳이 이곳까지 와서 벌과 개미를 잡을 필요가 없어 보이는 이들이다.
그들의 목적은 명확해 보였다.
바로 ‘운송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