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0화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한 준비물 (3)
-띠링!
<‘얼어붙은 보스’가 눈을 떠 불쾌감을 표합니다>
<‘얼어붙은 보스’가 돌아갈 것을 권합니다>
귓가에 빗발치는 알림음은 이 숲의 보스 몬스터가 출현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
나는 얼어붙은 수풀 사이로 시선을 집중했다.
눈보라, 그리고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 수북하게 쌓인 눈, 앙상하게 말라죽은 고목.
이내 그것들 사이로 익숙한 형상을 한 괴물이 거대한 몸을 끄집어낸다.
<된서리 엔트> -등급: A+ / 특성: 풀, 독, 얼음, 무한성장, 바벨(Babel)
-서식지: 된서리 숲
-크기: ?
-북대륙에 빙하기가 찾아옴에 따라 많은 생물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이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이 기묘한 나무괴물들은 혹독한 추위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고 얼어붙은 몸으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들이 어떤 목적 어떤 과정으로 이 땅에 나타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역시 나무는 숲에 숨어 있을 때 눈에 띄지 않는 법이다.
흰 서릿발과 시커먼 껍질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나무 괴물이 우리들의 앞으로 넓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윤솔이 그제야 손뼉을 쳤다.
“와아- 진짜 나무랑 똑같이 생겼네. 그리고… 되게 크다!”
윤솔은 고개를 들어 엔트의 머리를 쳐다보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된서리 엔트를 마주했다.
그것은 나와 함께 이 녀석을 사냥한 적 있었던 드레이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이군. 예전에 너와 함께 이 녀석을 잡다가 그냥 간 적이 있었지.”
“맞아. 거의 다 잡았었지만 굳이 안 잡고 넘어갔었어. 오늘을 위해 아껴뒀던 거지.”
“……그런데 이 녀석이 이렇게 컸던가?”
물론 아니다.
된서리 엔트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커졌고 위험 등급도 두 단계나 상향 조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무한성장 특성 때문이야.”
무한성장 특성은 온 세계를 다 뒤져도 찾기 힘든 초희귀특성 중 하나로 해당 특성을 보유한 몬스터의 몸을 무한에 가까운 크기로 생장시키는 패시브 스킬이다.
다만 무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들이 필요할 뿐.
가령 플레이어에게 한 번쯤은 발각된 이후부터 자라난다거나, 근처에 물이나 불이 있어야 한다거나, 동족을 죽여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귀찮은 조건들이다.
조건만 맞으면 꾸준히 성장한다는 점에서 백전노장이나 연쇄살인 같은 특성과도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겠다.
“된서리 엔트의 경우에는 충분한 면적의 공간과 충분한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지. 이론 상 하늘에 닿는 것도 가능해. 어쩌면 달까지 자랄 수 있을지도 몰라.”
“와아, 아주 넓은 땅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겠네.”
윤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이크 역시 확 달라진 된서리 엔트의 크기에 신기해하는 기색.
하지만, 나는 친구들과는 다른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바벨(Babel)’ 특성!
나는 오래 전에 중얼거렸던 말을 떠올렸다.
‘…뭐, 아직은 먼 미래니까.’
그리고 바로 지금, 그 먼 미래라는 것이 코앞의 현재로 다가왔다.
씨앗을 뿌려 놨으니 이제는 열매를 수확할 시간이다.
……그때.
[…Mox nox!]
된서리 엔트가 먼저 선공을 가해 왔다.
촤아악-
땅 위에서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나무줄기.
뿌뿍! 쿠드드득!
그리고 땅 밑에 매복해 있다가 솟구쳐 오르는 송곳 같은 뿌리가 우리를 노린다.
하지만 딱히 긴장할 것도 없다.
된서리 엔트는 덩치만 커졌지 옛날의 공격 패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된서리 엔트 레이드는 처음인 윤솔을 위해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 주었다.
“단조로운 공격 패턴에 느린 공격속도, 하지만 덩치가 워낙 커서 예상치 못한 피격에 주의할 것. 가끔 보이는 상태이상 공격이나 지형 데미지 역시도 경계해야 해.”
윤솔은 초심자의 마음으로 내 강의를 듣고 드레이크는 복습하는 모범생의 태도로 나를 따른다.
이윽고, 된서리 엔트가 내가 말한 대로의 공격을 감행해 오기 시작했다.
철썩!
먼저 전방의 부채꼴 모양의 범위를 나무줄기로 쓸어버리는 공격.
피격 판정 범위가 넓어서 꽤 까다롭다.
촤아악-
짧은 시간 동안 입에서 녹색의 수액을 뿜어내는 공격.
끈적한 것은 둘째쳐도 독 데미지가 들어와서 귀찮다.
뚜두둑…
땅 속에 매복시켜 놓은 뿌리를 송곳처럼 뽑아내는 공격.
육안으로 보고 피하기는 힘든 공격이다.
콰콰쾅!
특정 방향으로 돌진해 오는 공격,
기본 덩치가 있는지라 맞으면 꽤 아프다.
하나하나가 강력한 데미지를 주는 공격이다만…… 결국 맞지만 않으면 아플 일도 없다.
“자, 한 방에 잡는다는 생각은 버리고. 각 부위들을 먼저 파괴하면 편하겠지? 저번처럼 드레이크가 팔을 맡고 내가 왼쪽 다리를 맡자고, 솔이는 처음이니까 가끔 땅 위로 튀어나오는 뿌리가 다시 못 들어가게만 잡고 있어 줘. 뿌리는 재생되지 않으니 제거하면 더 좋고. 뿜어내는 수액은 맹독이나 극독 특성이 아니라 그냥 독 특성이니까 맞아도 상관없어. 아니, 오히려 맞으면 좋지. 추위방지용 도료로 쓸 수 있거든. 일반 독 데미지는 최대 HP의 0.0025%밖에 되지 않는 반면 눈보라는 0.01%를 깎으니 오히려 데미지를 1/4로 줄일 수 있다고. 차라리 이 녀석의 독은 맞는 게 이득이야.”
내가 주절주절거릴 때마다 윤솔과 드레이크는 열심히 엔트를 무력화시킨다.
[와두두… 포애앵…]
그동안 쥬딜로페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우리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꼬옥-
추운지 내 몸에 찰싹 달라붙은 채로.
“춥냐?”
나는 팔에 착 달라붙은 쥬딜로페를 쳐다보며 물었다.
예전 같으면 아무리 추워도 도도한 척 어깨에 앉아 콧물만 질질 흘렸을 텐데, 아무래도 호감도가 거의 MAX에 근접했기 때문인가 대하는 것이 많이 스스럼없어졌다.
나는 호빵처럼 따듯한 슬라임 젤리 하나를 건넸다.
쥬딜로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잘 받아먹는다.
[호애앵!]
호감도가 약간 더 올랐다.
바로 그때.
“어진아! 거의 끝난 것 같은데!”
윤솔이 잡고 있던 나무뿌리를 놓으며 외쳤다.
고개를 돌리자 된서리 엔트가 서서히 주저앉고 있는 것이 보인다.
우지지지직-
마치 노인이 아픈 몸을 이끌고 와 앉는 느낌이었다.
그 모습을 본 드레이크가 쇠뇌를 거뒀다.
“이번에도 죽이진 않는 건가?”
“응. 그러면 지금까지 살려둔 의미가 없지.”
나는 지난 몇 년간 많이 성장한 엔트를 올려다보았다.
놈은 지친 기색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Alea iacta est.]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이쯤에서, 나는 된서리 엔트를 위해 준비했던 선물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빨간 색과 파란 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조약돌 두 개.
-<시간의 돌> / 재료 / S
시간을 다루는 불사조의 권능이 조금이나마 깃들어 있는 돌.
-시간 컨트롤러 (특수)
-1회용
-<공간의 돌> / 재료 / S
공간을 다루는 불사조의 권능이 조금이나마 깃들어있는 돌.
-공간 컨트롤러 (특수)
-1회용
불사조가 마지막 순간 윤솔과 드레이크에게 떨군 아이템이었다.
나는 그 돌 두 개를 된서리 엔트의 뿌리 근처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이내, 환한 빛무리와 함께 내 앞에 스크린 창이 떴다.
-띠링!
<특정 구역의 시간을 임의대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특정 구역의 공간을 임의대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불사조의 힘을 일부나마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일시적인 것이고 제약도 엄청나게 많지만, 적어도 내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반경 수 킬로미터 정도 안에서는 이제 내가 신이나 다름없다.
“오오, 어진. 뭘 하려는 건가?”
“설마?”
드레이크와 윤솔이 나를 보며 눈을 반짝거린다.
나는 말 대신 행동으로 대답했다.
<시간 배속을 *10,000배로 설정합니다(※플레이어를 상대로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반경 10km*10km의 공간의 모든 것들을 밖으로 밀어냅니다>
이제 이 근방의 모든 사물들은 내가 쳐 놓은 결계 밖으로 강제 이동될 것이다.
또한 이 결계 안에서 시간은 1만 배의 속도로 흘러간다.
“……아깝네. 시간이 플레이어에게도 똑같이 흘러간다면 창해룡의 특성을 써먹을 생각이었는데.”
‘잠수’ 특성을 써먹는다면 나 역시도 경험치를 대폭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돌이 플레이어에게 미치는 영향이 없다니 별 수 없는 일.
그때.
“아앗!? 어진아! 저것 좀 봐!”
윤솔이 깜짝 놀라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된서리 엔트가 주저앉아 있던 곳에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지직! 우지지직! 우드득! 뿌드득!
엔트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땅에 뿌리를 깊게 박아 넣더니 이내 몸을 꼿꼿하게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놀라운 스피드로 몸을 키워나갔다.
원래도 컸던 몸은 이제 하늘에 닿을 기세로 쭉쭉 뻗어나가고 있었다.
드넓은 설원을 꽉 채울 정도로 두꺼워진 몸, 하나의 도시를 품을 수도 있을 정도로 넓어진 체적, 그리고 달을 어루만질 기세로 높아지는 가지들.
<된서리 엔트> -등급: S / 특성: 풀, 독, 얼음, 무한성장, 바벨(Babel) / 어버이: 고인물
-서식지: 된서리 숲
-크기: ?
-북대륙에 빙하기가 찾아옴에 따라 많은 생물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이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이 기묘한 나무괴물들은 혹독한 추위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고 얼어붙은 몸으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들이 어떤 목적 어떤 과정으로 이 땅에 나타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보다 더 상위의 종으로 진화한 그 모습은 흡사 ‘검은 탑’, 인간이 하늘에 닿기 위해 세웠다던 바벨탑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
“…….”
윤솔과 드레이크는 하늘까지 쭉쭉 뻗어나가는 검은 탑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벌리고 섰다.
심지어 몬스터 상태창에는 기존에 없던 ‘어버이’라는 항목까지 추가되었지 않은가!
윤솔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엔트는 거인의 머리털에서 탄생한 몬스터라고 들었는데. 이걸 보면 그 설정이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네.”
한편.
나는 엔트가 성장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역시도 다음 계획을 머리에 구상하고 있었다.
“…이제 ‘방주’ 마련은 끝났어.”
방주(方舟)! 세상의 멸망으로부터 살아남은 이들이 머물렀던 유일한 안식처.
내 말을 들은 윤솔과 드레이크의 눈빛이 흔들린다.
불안감이 담겨 있는 눈.
그 시선은 내게 다음으로 일어날 일을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의문에 답했다.
“대홍수지 뭐.”
그것도 그냥 홍수가 아니다.
내가 범람시킬 것은 물이 아니라 더 ‘위험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