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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689화 (689/1,000)

689화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한 준비물 (2)

나는 게임 커뮤니티 스크린을 껐다.

어젯밤 잠시나마 게시판을 핫하게 만들었던 ‘ㅇㅇ(124.91)’은 사실 나였다.

드레이크에게 부탁해 몇 장인가의 스크린샷을 찍고 그것을 업로드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식의 낚시를 한 적이 있었지.”

죽음룡 오즈를 잡기 전 피카레스크 마스크의 연쇄살인 스텍을 쌓기 위해 오크와 리자드맨 유저들을 대거 낚은 적이 있었다.

윌리엄 레그랜드의 풍뎅이 바위 위에서 만 명이 넘는 숫자의 사람들을 황금동상으로 만들어 버렸었지.

그 덕에 종족 킬 수치도 크게 증가해 인류 전체가 약간 혜택을 입기도 했었다.

“그때는 확실히 조금 미숙했었어.”

거기서 황금으로 변한 사람들의 시체를 그대로 방치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조디악이 그 시체들을 되살려내 화석 해골병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 덕에 조디악은 1만이 넘는 강력한 언데드 병사들을 휘하에 거느리는 군단장이 되어 버렸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준 꼴이다.

그 때문에 나는 이번 낚시에 더더욱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하기 위해.

……하지만.

이번 낚시는 전과는 180도 다르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서 기획한 낚시였다면 지금은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기획한 낚시였다.

“2차 대격변은 조금 가혹할 테니 어느 정도 경고를 해 줘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커뮤니티에 달린 댓글들을 쭉 모니터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잠시 화제가 되었다가 묻힌 떡밥이 되었지만 언젠가 때가 오면 다시 재점화될 것이다.

나는 ‘검은 탑’을 쌓기 전, 그러니까 며칠 전의 상황을 회상해 보았다.

검은 탑. 다른 말로 하면 ‘방주(方舟)’.

그것은 2차 대격변을 일으키기 전 필수적으로 마련해야 하는 ‘준비물’이었다.

*       *       *

휘이이이잉-

지독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 북대륙.

나는 눈이 허벅지까지 쌓인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옆에는 노르딕페이스 브랜드의 공주님 표 드레스를 몇 겹씩 걸친 드레이크가 입김을 내뿜고 있다.

“어진. 괜찮겠나? 이 날씨에 북대륙의 설산을 오르는 것은 자살행위야.”

그의 말은 옳다.

-띠링!

<눈보라가 몰아칩니다>

<눈보라는 초당 최대 HP의 0.01%를 앗아 갑니다>

이곳은 설산 중에서도 높고 가파르기로 악명 높은 ‘가혹한 설산’이 아니던가.

산세도 험준하지만 HP를 깎아먹는 눈보라까지 밥 먹듯이 몰아친다.

제아무리 대단한 랭커라고 해도 전문 장비 없이는 2시간을 버티기 힘든 곳이었다.

윤솔 역시 옆에서 입김을 뿜어내며 드레이크의 말을 거들었다.

“거기에 눈보라가 가장 심해진다는 연초의 한 달이네.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정말 춥겠는데?”

북대륙은 새해 초만 되면 유난히 날씨가 가혹해진다.

그 때문에 어지간한 플레이어들은 새해 초 북대륙 레이드는 가능한 피하는 추세였다.

몬스터들이 강해지거나 흉폭해진다면 사냥 시 더욱 높은 추가 보상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지형이나 날씨가 궂어질 경우 레이드 난이도만 상승하고 딱히 특별한 추가 보상도 없기 때문이다.

한편.

드레이크는 흩날리는 눈발을 보며 눈보라가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지를 점치기 시작했다.

“이번 눈보라는 좀 길겠군.”

그러자 옆에 있던 윤솔이 고개를 갸웃했다.

“눈보라가 부는 시간은 랜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야 그렇지. 근데 대충 어느 정도 지속될지 짐작할 수는 있다.”

“…어떻게요?”

윤솔의 의문은 계속된다.

드레이크는 가슴을 펴고 으쓱거리기 시작했다.

“눈보라의 패턴을 보는 거지. 랜덤이라고는 하지만 오래 지속되는 눈보라일수록 프로그램 리소스를 줄이기 위해 움직임이 단순화된다. 요컨대 떨어지는 눈들 중에서 같은 각도, 같은 속도로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찾아내서 그 빈도수를 평균 내면 되는 거야. 살짝 보기에도 분당 40개 정도의 눈송이들이 같은 각도로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 눈보라는 굉장히 오래 지속될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지. 눈보라의 지속 옵션이 상, 중, 하 어느 것으로 설정되어 있느냐에 따라 눈 튀는 거나 서리 내리는 것 등의 효과도 바뀌는 게 당연한…….”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컸구나, 드레이크.”

“후후. 너에게 배운 것은 잊지 않는다.”

나와 드레이크는 서로 주먹을 부딪쳤다.

그저 윤솔만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다.

하지만 눈보라가 오래 지속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그것을 뚫고 갈 수 있느냐의 문제는 다른 것이다.

윤솔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눈보라가 앞으로 오래 지속될 것 같은데… 이대로 설산을 넘을 수 있을까?”

연초의 북대륙에는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날씨가 너무 나빠서 플레이어들은 물론이요 NPC들마저 집안에 꼭꼭 틀어박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레벨이 낮은 몬스터들 역시 필드의 가혹함을 이기지 못하고 동굴에 틀어박혀 있을 정도.

하지만, 나에게는 이 기후의 장벽을 뚫을 수단이 있었다.

삐익-

나는 허공에 대고 휘파람을 불었다.

“……?”

윤솔과 드레이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본다.

하지만 이윽고, 둘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일이 벌어졌다.

“아앗!”

눈보라를 뚫고 흐릿한 그림자들이 내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서리 늑대> -등급: C+ / 특성: 백전노장, 뺑소니, 얼음, 야수

-서식지: 가혹한 설산, 얼어붙은 부패

-크기: 3m.

-추운 곳에 적응한 늑대.

무리를 이루어 살며 사냥감이 약해질 때까지 치고 빠지기를 반복해 결국 숨통을 끊어놓는다.

흰 털을 가진 거대한 늑대들이 내 앞으로 다가온다.

눈길을 열심히 달려온 모양인지 빳빳한 털 사이에는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은 서리가 끼어 있었다.

가혹한 추위와 험준한 지형에 완벽하게 적응한 몬스터.

극지방에 주로 서식하며 등급에 걸맞지 않은 높은 체력을 보유하고 있기에 이런 날씨에도 문제없이 먹이활동을 한다.

“…오오, 과연.”

윤솔과 드레이크는 처음에는 경계했으나 이내 긴장을 풀었다.

서리 늑대들이 내 앞에 얌전히 엎드렸기 때문이다.

마치 길들여진 가축처럼 말이다.

나는 오래 전에 들었던 알림음들을 떠올렸다.

-띠링!

<세계 최초로 ‘하린마루’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중간지대의 괴물’이 죽었습니다.>

<중간지대의 생태계가 크게 바뀝니다.>

<‘중간지대의 괴물’이 부활할 때까지 ‘서리 늑대’의 개체수가 증가합니다.>

<‘서리 늑대’ 일족이 ‘조력자’를 향해 경의를 표합니다.>

.

.

과거 리치왕의 중간 보스로 있던 하린마루를 잡았을 때 서리 늑대 일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문일까? 가혹한 설산에 사는 서리 늑대 일족 역시 나와 내 일행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크흠, 큼.]

내 어깨 위에 올라타 있는 오즈와는 꽤나 어색한 사이였지만.

“이 친구들 등에 타고 가면 금방이지.”

나는 맨 앞에 있던 애꾸눈의 서리 늑대 등에 올라탔다.

윤솔과 드레이크 역시 각기 마음에 드는 늑대를 골라 그 위에 앉았다.

“와아! 되게 얌전해!”

“근육이 단단하군. 낙타나 말보다 훨씬 더 잘 달리겠어.”

가혹한 설산이 아무리 험준하다고 해도 이 늑대들의 이동속도라면 몇 시간 안에 주파할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때.

이히히히히……

바람소리에 섞여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빨리 가자. 이제 얼음땡은 지긋지긋해.”

나는 늑대들을 재촉했다.

[……그르르릉.]

서리 늑대들 역시 이 웃음소리가 그리 반갑지 않은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바로 그때.

이히히히히……

끼힛히히……

히이 히히…

웃음소리가 여러 개 겹쳐 들린다.

아무래도 하나가 아닌 모양.

“…눈보라 치는 날에는 술래가 여러 명이 되는 건가?”

땡에는 관심 없고 그냥 얼음만 시키면 된다는 식이라니, 실로 사기적인 얼음땡이다.

“빨리 가자. 분량만 잡아먹힐라.”

내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도 더 이상 이히히히와의 얼음땡 콘텐츠는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씀!

*       *       *

몇 시간 후, 나는 눈보라를 뚫고 설산의 심층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후아! 진짜 극한의 얼음땡이네. 다시는 안 하고 싶어.”

윤솔은 귀밑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토해 냈다.

그녀는 여기까지 넘어오는 이래 자그마치 32번이나 얼음 속에 갇혀야만 했었다.

나름대로 베테랑인 드레이크 역시도 세 번이나 당했을 정도이니 말 다한 셈.

유일하게 한 번도 얼음에 갇히지 않은 나만 한숨을 돌리며 얼어붙은 식은땀을 살갗에서 떼어낼 뿐이다.

“그래, 아무튼 다들 무사하지?”

“어어, 늑대들도 아무도 안 다쳐서 다행이야.”

“맞다. 우리 셋만으로는 산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태워 준 보답으로 소금에 절인 햄을 몇 덩이 주었지만 늑대들은 받지 않았다.

녀석들은 우리를 내려주고는 별다른 반응 없이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자, 그럼 계속 가 볼까?”

나는 설산의 건너편으로 이동했다.

눈보라는 거의 멎었지만 역시나 날씨는 추웠다.

눈앞엔 깎아 내지른 듯한 쌍둥이 절벽이 마주 서 있었고 그 주변을 눈과 얼음의 산맥들이 웅장하게 둘러싸고 있다.

푸른빛의 오로라가 산맥의 끝자락에 걸려 빨래처럼 넘실거리는 것을 제외하면 흰 눈과 검은 바위, 오로지 흑백으로만 가득 찬 세상!

보는 이를 압도하는 대자연의 위엄은 여전한 것이었다.

-띠링!

<된서리 숲 (2) 구역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 고인물>

몇 년 전에 세웠던 기록이 뜬다.

그러고 보니 이 구역에 처음으로 왔던 이는 나였었지 참.

‘그러고 보니 여기서도 유다희와 쫓고 쫓겼었지.’

그 와중에 온몸이 핑크색으로 물들었었고 말이다.

생각해 보면 적폐망령 녀석도 여기에 오는 과정에서 탄생했었다.

‘…다사다난했었네.’

내가 잠시 추억에 잠겨있을 때, 윤솔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어진아, 여기는 왜 온 거야?”

드레이크 역시 말은 안 했지만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여기 사는 히든 보스를 좀 만나러.”

바로 그때.

[…Mox nox.]

양반은 못 되는지, 얼어붙은 숲 저편에서 굵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윤솔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말라죽은 고목과 잎사귀 대신 수북하게 쌓인 눈, 열매 대신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 말고는.

뿌드득-

그러나 소리는 계속 들려온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천천히 발자국을 옮겨 놓는 소리.

얼음이 깨지고 눈이 단단하게 짓뭉개지는 소리가 이쪽을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

윤솔은 당황해서 이곳저곳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하다못해 하늘까지 올려다보았지만 아무런 몬스터도 보이지 않는다.

나와 드레이크는 그런 윤솔을 보고 웃었다.

“원래 나무를 숨기려거든 숲에 숨겨야 하는 법이지.”

내 힌트를 듣는 순간.

“……!”

윤솔의 눈이 그제야 휘둥그레진다.

드디어 이 필드의 히든 보스 몬스터를 발견한 것이다.

도저히 눈에 띄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거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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