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686화 (686/1,000)
  • 686화 정상에서 기다릴게 (6)

    나는 바로 상품을 감정했다.

    이윽고 찬란한 빛무리가 걷히고 그 안에서 아이템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영혼의 천칭> / 한손무기 / S

    보이지 않는 것을 담아 잴 수 있는 천칭.

    양쪽의 무게를 균등하게 맞추려는 성질이 있다.

    -1회용(0/1)

    -특성 ‘등가교환’ 사용 가능 (특수)

    ※기본적으로 일 대 다수의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지만 집단 대 집단의 경우에는 예외 조항이 적용됩니다

    낯익은 아이템이 등장했다.

    두 개의 황금 접시와 그것들을 잇고 있는 사슬, 그리고 사슬 가운데에 있는 저울눈금.

    그것들이 뿜어내는 찬란한 빛은 이미 예전에도 본 적 있었다.

    ‘1차 대격변의 히든 피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레어템이 아니던가!

    과거. 나는 하늘을 떠돌아다니는 유령선, 구름 감옥에 갇힌 거인의 영혼, 천공섬 야시장의 오목 노인에게서 얻은 세 개의 히든 피스들을 조합해 이 ‘영혼의 천칭’을 만들어 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 낸 영혼 천칭은 식인황제 보카사의 무릎을 꿇리는 비장의 무기가 되어 1차 대격변으로 성공으로 이끌었다.

    ‘효과가… 나와 상대방을 동시에 노템으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이었지.’

    공평하게 알몸으로 1:1 다이다이.

    아무런 아이템도 걸치지 않은 채, 오직 모두에게 주어지는 보급 아이템인 항아리와 망치만으로 승부를 내야 하는 ‘혈압 마라톤 오브 더 항아리 게임’의 우승상품으로는 꽤나 잘 어울린다.

    [이 귀한 보물은 전 세계에 딱 두 개뿐이지.]

    스크루지 후작은 내 앞으로 천칭을 내밀었다.

    그리고 인자한 미소로 말했다.

    [부디 좋은 곳에 쓰기를 바라겠네. 뭐, 자네들이라면 문제없겠지만. 허허허-]

    그렇다.

    자네가 아닌 자네‘들’이다.

    나 말고도 이 천칭을 수여받은 자는 한 명이 더 있었다.

    “…감사합니다.”

    성실한 모범생 아키사다 아야카.

    블루팀의 1위를 기록한 특전으로 이 자리에 선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이내 스크루지 후작이 건네는 천칭을 받아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로서 두 개의 천칭은 완전히 나와 아키사다의 소유가 되었다.

    나는 아키사다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번 슬쩍 돌아보았다.

    ‘……쟤는 저걸 가져다 어디에 쓸까?’

    나는 천칭을 한번 써 본 경험이 있으니만큼 이것을 어디에 써먹어야 가장 베스트일지 감이 딱 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인국’ 뿐이란 말이지.’

    훗날 뱀의 땅이라고도 불리게 될 그곳.

    그 험난한 사냥터에서 이 황금빛 천칭은 비로소 제대로 된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A+등급의 천칭으로도 S등급 몬스터인 식인황제 보카사를 리타이어 시켰었는데 S등급의 천칭이라면 그 효과가 얼마나 굉장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

    하지만 아키사다의 경우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최 알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 천칭 아이템은 마음에 쏙 드는 것이었고 꼭 거인국에서만 말고도 여기저기 달리 써먹을 곳이 많았기에 나는 그녀에게 슬쩍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얘기도 안 했네. 네가 협조해 준 덕에 우승할 수 있었어. 고마워.”

    “…천만에요.”

    “그리고 네 팬들이 나를 비겁하다 욕하는 것을 막아 준 것도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래서 말인데 천칭 팔지 않을래?”

    “……? 그게 앞의 말들이랑 무슨 상관이죠?”

    아키사다는 눈썹을 약간 찡그리고는 두 손을 교체해 엑스 자를 그려 보인다.

    “안 팔아요.”

    “그러지 말고. 가격 잘 쳐 줄게.”

    “…놉.”

    아키사다는 생각보다 단호한 아가씨였다.

    나름 무슨 계획을 세워 놓았는지 그녀는 천칭을 소중하게 끌어안는다.

    “…….”

    그리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굳건하게 팔기 싫어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마동왕 모드로 변신한 뒤 한 번 더 요구해 볼까 하다가 빠르게 단념했다.

    “뭐, 하긴.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황금 티켓 같은 거지. 돈이 다가 아니니까.”

    “…….”

    “어서 그 천칭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렴!”

    나는 아키사다 아야카를 향해 손짓하고는 무대를 내려갔다.

    “…….”

    그동안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계속해서 나를 빤히 주시했지만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시상식 동영상을 리플레이 했을 때이다.

    *       *       *

    이윽고, 내가 시상식 무대 옆으로 잠시 물러나자 그 뒤의 순서들이 이어졌다.

    나는 이 무대의 MVP로서 폐막식 직전 우승 소감을 밝혀야 했기에 아직 무대를 떠나지 않고 장막 뒤에 서 있었다.

    그때, 드레이크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뒤로 은밀하게 다가온 그는 내 귓가에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진, 임무 완료다.”

    “로맨틱. 성공적?”

    “…로맨틱은 모르겠지만 일단은 성공적.”

    나는 드레이크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상식이 시작되기 전, 나는 드레이크에게 은밀히 지령을 내린 바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대 뒤에 마련되어 있는 특정한 물건 하나를 훔쳐 오는 것!

    내가 빌려준 샌드웜의 망토를 뒤집어쓰고 ‘흙장난’ 특성을 이용해 몸을 숨긴 드레이크는 특유의 은밀한 움직임으로 무대 뒤로 숨어들어 결국 목표물을 훔치는 것에 성공했다.

    ‘폭식의 악마성좌 벨제붑의 위상(특전: 폭식 창자)’

    파리 대왕 벨제붑 사냥 이후 인벤토리가 거의 무한에 가깝게 늘어나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작전이었다.

    “초대형 불꽃놀이를 못 하게 된 것은 조금 아쉽군.”

    드레이크는 피식 웃고는 자리를 떴다.

    샌드웜의 망토와 특유의 민첩성을 이용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는 그의 신출귀몰함에 나는 잠시 혀를 내둘러야 했다.

    바로 그때.

    “네! 다음은 대회의 마지막입니다! 이번 항아리 게임의 MVP! 고인물 선수의 소감을 끝으로 딱딱한 행사를 마무리 짓자구요! 렛츠 파티 직전입니다아아!”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홍영화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헛기침 몇 번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장막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또다시 나를 비춘다.

    “자, 이 길고도 힘든 시련을 극복한 용자의 입장에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홍영화가 내 앞으로 마이크를 내민다.

    나는 그것에 대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승 소감을 밝히기에 앞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단 한 사람을 위해서.

    “제가 이 게임에 왜 도전했는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옅게 떨리는 내 목소리, 나는 그것을 최대한 억눌러 담담하게 가다듬었다.

    “오를 수 없는 산을 오르는 끔찍한 여정, 저는 제가 좋아하는 다른 게임에 도전할 수도 있었습니다. 가령, 힘을 낼 수 있게 응원을 해 주고, 진행 구간마다 저장할 수 있고, 또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가며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그래서 노력의 보상과 성공의 열매를 맛볼 수 있는 그런 게임에요. ……하지만 저는 그런 게임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먼 옛날 항아리 게임을 개발했던 개발자 ‘베넷 포디(Bennett Foddy)’의 인터뷰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완벽히 똑같다.

    “이 게임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고통스럽고 변덕스러우며 짜증이 치밀어 오르죠. 관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차갑고 비인간적이며 야망에 불타 앞으로 전진하려는 이들에게 있어 걸림돌이 됩니다. 말 그대로 ‘상처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레이스죠.”

    무대 아래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다.

    처음 보는 내 진지한 모습에 당황한 이들도 있고 공감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다.

    자기가 우승한 게임에 대고 이런 혹평을 늘어놓는 것에 당황한 이들도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마이크를 잡았다.

    “쉽지 않은 조작, 까딱 잘못하면 결승선 직전에 출발선으로 되돌아와 버린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 좌절감. 하지만 차분하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요령을 익혀나간다면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은 것이 이 게임입니다. 그렇지 않았습니까?”

    등수에 관계없이 바위산을 완주한 모든 이들을 향해, 내 인터뷰는 조용히 울려 퍼진다.

    “만약 실수해서 원점으로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아니! 원점보다 못한 곳으로 추락해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이 전부 다 물거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을 투자한 만큼 배우고 익힌 경험치가 있기 때문이지요. 역설적이게도, 떨어짐으로서 우리는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바로 노련함과 능숙함 말입니다.”

    나는 개인방송을 통해 무대를 지켜보고 있는 시청자들을 향해서도 말했다.

    “제가 그랬었죠? ‘떨어지는 것을 쿨하게 받아들이라’고. 이것은 제 자신에게 신신당부한 말이기도 합니다. ……웃지 마세요. 물론 중간중간에는 저도 이성을 잃어버린 적이 몇 번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줄곧 노력했다구요.”

    관객석 중간중간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가 다시 조용해진다.

    나는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우승소감을 이어나갔다.

    “대회 시작 전, 스크루지 백작님이 말씀하셨죠. ‘Get Over It’이라고. 그것은 로그라이크 게임의 진수인 ‘다시 시작하기(Start Over)’ 정신을 뜻합니다. 가혹한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고 부딪치는 사람들, 나락으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어 올라올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번 대회가 큰 의미로 남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대 밑. 모든 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공감, 부러움, 선망, 감동… 다양한 시선들이 뜨겁고 촉촉하게 버무려져 나를 향한다.

    끈질겼던 레이스를 펼치며.

    자기와의 길었던 싸움을 통해.

    수십, 수백 번 정상에서 나락까지 떨어지는 경험을 한 모든 이들 사이에는 기묘하고도 끈끈한 유대감이 생겨나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그리고 그들 너머에 있을 한 사람, 단 한 사람을 위해 손을 들어 보였다.

    …반짝!

    내 손에 들려 찬란한 빛을 내뿜는 것은 바로 이번 대회의 MVP플레이어를 뜻하는 우승컵이었다.

    “…….”

    나는 약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I dedicated this trophy to you, the one who came this far. I give it to you with all my love.”

    ‘나는 이렇게나 멀리 온 당신에게 이 우승컵을 바친다. 나의 모든 사랑을 담아.’

    베넷 포디의 명대사. 그리고 거기에 꼭 남기고 싶었던 한 마디를 덧붙여 우승 소감을 끝냈다.

    “정상에서 기다릴게, 꼭 다시 돌아와 줘.”

    …….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내가 했던 말들이 생각보다 큰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형 포털사이트의 연예란 1면을 보고서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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